92화 흑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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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흑막
2023.08.31.
데카르.
루넨 제국이라는 말에 모두 그 이름을 떠올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델리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독이 루넨 제국에서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증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알겠어.’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던 에일리과 셀린의 대화와, 셀린이 보여 준 약. 꿈을 떠올린 델리나는 확신했다. 셀린은 분명 데카르에게서 약을 받았을 것이라고. 그것도 데미안을 통해.
‘분명 그때 본 상자에는 약이 들어 있었겠지.’
상태가 이상하던 젠과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머닌. 난데없이 숲에 퍼졌던 인공 연기와 총알에 발려 있던 독약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둘씩 퍼즐처럼 맞춰지며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 사건들 뒤에 있는 이는, 바로 셀린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 당시의 다섯 명이 유달리 셀린에게 집착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이유도…….’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약으로 조종하고 있었을 것이다. 온전히 저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그것을 깨달은 델리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가씨.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십니까?”
델리나의 얼굴색이 나빠진 것을 본 펠릭이 걱정스레 물었다. 베티는 의사를 부르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고, 벨리온의 얼굴도 굳어졌다.
“셀린, 셀린은 어디 있어요?”
델리나가 다급한 얼굴로 묻자, 벨리온과 펠릭이 잠시 침묵했다.
“아가씨. 사실 그날 이후로 상황이 많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자신이 말해도 되겠냐는 듯 펠릭이 벨리온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자 벨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 아가씨는 지금 수도에 안 계십니다.”
“뭐? 그러면?”
“국경 부근으로 가셨습니다. 그…… 다섯 분들과 함께요.”
델리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셀린이 수도에 없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맞아. 분명히 그때…….’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들의 눈은, 과거에 광장의 불꽃 한가운데에서 보았던 눈과 지독하리만치 똑같았다. 델리나는 빠르게 창을 켰다.
<흑막>
붉고 선명한 글자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을 힘겹게 이불 속으로 감추며 델리나가 다시 물었다.
“그 다섯 명은 왜? 왜 갑자기 셀린과 같이 간 건데?”
“예, 사실 다섯 분들의 상태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아무리 아가씨가 독에 당하는 걸 바로 앞에서 봤다지만 그렇게 행동하다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정말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습니다. 다섯 분 기세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아무도 말을 못 붙일 지경이었고요. 유일하게 셀린 아가씨만 다섯 분 곁에 있으면서 말도 걸 수 있었습니다.”
“뭐?”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이 몇 년도냐고 묻기도 하고, 주변 풍경을 이상하다는 듯 보기도 하셨어요. 무엇보다…… 황태손 전하께서 전하를 보시고…… 그게…….”
차마 제 입으로 못 말하겠다는 듯 펠릭이 벨리온을 힐끗 보자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나보고 관에서 튀어나왔냐고 묻던데. 왜 살아 있냐고.”
“네?”
어마어마한 소리에 델리나가 입을 떡 벌렸다가, 벨리온의 마지막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도 모르고 전하를 죽은 사람 취급했다니. 설마, 설마…….’
델리나의 머릿속에 독에 당해 쓰러지기 직전에 봤던, 섬뜩한 다섯 쌍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창의 글자는 ‘흑막’으로 바뀌었고 다섯 명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들 곁에는 셀린만이 있을 수 있었다.
제가 목격한 것과 펠릭과 벨리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니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 다섯 명도 똑같이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래서 셀린에게 집착하고, 국경으로 가는 등의 일을 벌이는 거라면…….’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들 또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제국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공포와 혼돈으로 몰아넣었던 그들이.
“그럼, 그럼…… 국경으로 간 이유는?”
“그것도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군대까지 끌고서 국경으로 갔으니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할 겁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델리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았다. 델리나는 애써 머릿속을 정리했다.
“전하. 가실 거죠, 국경에?”
만약 아슈드가 루넨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면, 헬리움 제국의 귀족들도 참전해야 했다. 울피림 대공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다 해도 주목적은 경계야.”
“그래도 만약에 상대 쪽과 부딪히면 싸우실 거잖아요. 기사들을 이끌고요.”
“…….”
‘전하뿐만이 아니야. 분명 디아몬 공작가나, 엘피샤 후작가, 그리고 플로렌 백작가도…….’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제국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델리나는 전쟁의 무서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를 깨고 베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허겁지겁 달려온 의원이 델리나의 몸을 진찰했다. 벨리온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의원의 진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곧 의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해독은 전부 된 것 같습니다. 다만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 당분간은 몸 상태를 지켜봐 주십시오. 몸이 빨리 회복되도록 돕는 약도 곧 지어 올리겠습니다.”
“정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
“무, 물론입니다! 독에 중독되었을 때 해독제를 빠르게 드신 덕분에 해독도 잘되었고, 원래 몸이 튼튼하셨기에 회복도 빠르게 되실 겁니다.”
벨리온의 질문에 의원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의원의 말이 끝나자 델리나가 펠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펠릭. 지금 데미안 황자님과 메이린 황녀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아?”
“그분들이라면 각자 방에 계실 겁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전해 줄래? 내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지.”
“예,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고 오겠습니다.”
약을 가져오기 위해 베티가 의원과 함께 나갔고 펠릭 또한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는 델리나와 벨리온 둘만 남았다. 델리나가 신기한 듯 물었다.
“그래도 만나게 허락해 주시네요.”
“목숨을 구한 건 맞으니까.”
데미안 쪽은 몰라도, 메이린에게만은 조금 더 마음이 열린 듯한 벨리온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만나는 건 안 돼.”
“예,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도 함께 만나자고 부탁하려던 참이었어요.”
지금 데미안과 벨리온의 사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데미안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델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만약에 제가 이번 독살 미수 사건의 배후를 알고 있고, 그리고 그 배후가…… 전하의 가까운 사람이라면 어쩌시겠어요?”
“…….”
델리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셀린인가.”
“……알고 계셨어요? 아니, 그…… 뭔가 눈치를 채셨나요?”
벨리온의 답에 델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사건이 있던 날, 자르버네 영식 막사에 누가 들어갔었는지 조사했으니까.”
“…….”
“거기에 그 아이가 있었더군.”
“셀린은 왜 머닌 영식 막사에 갔었대요?”
“그 영식이 마음에 들어서 손수건을 주러 갔다고 하던데.”
실제로 셀린은 손수건을 머닌에게 주었다. 그리고 머닌은 그것이 마음에 든다며 주변 영애들에게 자랑했고, 그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 이렇다 할 물건이 나오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셀린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머닌 영식이 마셨던 술병 같은 건요? 그것도 조사해 보셨나요?”
당시 술에 거하게 취해 있던 머닌을 떠올리며 델리나가 다시 물었다.
“막사에 술병은 없었어.”
“…….”
“그땐 다들 정신이 없었지. 그러는 사이에 사라진 것 같다.”
독살 사건으로 혼잡해진 틈을 타 술병을 처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증인.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펠릭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말씀하신 대로 두 분을 모셔 왔습니다. 아가씨 몸만 괜찮으시면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겠습니다.”
“난 괜찮아. 대신에 침대에서 맞이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것만 말씀드려 줘.”
“알겠습니다.”
펠릭이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메이린과 데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님과 황녀님을 뵙습니다.”
“어머, 아뇨. 그렇게 일어나려 할 필요 없어요, 영애.”
델리나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메이린이 그녀를 만류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잖아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황녀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요.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모시게 되었어요.”
“때마침 해독제가 있어서 저는 그걸 드린 것뿐인걸요.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한차례 인사를 오가는 가운데, 데미안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 있는 델리나를 보지 않고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있었다.
“지금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으세요?”
“네. 다행히 독이 극소량만 들어가서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체력이 좀 좋았던 것도 있고요.”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저보다도 영애께서 쓰러졌을 때 오빠가 무척 놀랐거든요. 물론 저도 놀랐지만요.”
“……그런가요?”
당시 저가 쓰러진 것을 보고 데미안이 크게 놀랐다는 말에 델리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저, 황녀님. 잠시 황자님과 대화를 하고 싶은데, 실례지만 자리를 피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저희 오빠는 왜……?”
“아, 그게 그러니까…….”
궁금한 듯 메이린이 눈을 깜빡이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델리나가 말을 이었다.
“약혼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메이린이 델리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먼저 가 볼게, 오빠. 이야기 잘하고.”
데미안이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생긋 웃어 보인 메이린이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데미안과 벨리온, 델리나 셋만 남았다. 델리나는 데미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