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소중한 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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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소중한 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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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소중한 내 사람들
2023.09.02.
“뭐?”
“가지 말라고.”
기드온이 무서운 얼굴로 반대하자 에일리가 놀란 듯 눈을 굴렸고, 델리나가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쟁이잖아. 이번에는 진짜 죽을 수도 있어.”
“…….”
“독살당할 뻔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그런 위험한 곳을 가려고 하는 건데? 이번만큼은 대공 전하나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면 안 돼?”
기드온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애초에 대공가에 간다고 집을 떠날 때부터 그랬어. 너는 항상 그렇게 아슬아슬한 행동을 많이 했어. 그만큼 위험한 일도 많았지. 이번 독살 사건도 그렇잖아. 그 다섯 명과 있으면 네가 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기드온은 단순히 이번 일 때문에 화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쌓인 걱정과 불안이 지금 터진 것이었다.
“솔직히 내가 오빠로서, 가족으로서 너한테 못해 준 것이 많다는 건 잘 알아. 내가 해 줘야 할 역할을 대공가가 해 준 것도 알고.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위험해지는 꼴은 못 봐.”
기드온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기드온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델리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오빠가 왜 나한테 해 준 게 없어. 오빠는 항상 노력해 왔는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빈자리를 채워 주려고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있는 거 다 알아.”
“…….”
“그리고 오빠. 난 희생이나 봉사하기 위해 가는 게 아니야. 그 다섯 명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이야.”
그래, 처음에는 단순히 제국의 파멸을 막기 위해 의무를 수행하듯 그 다섯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섯 명은 델리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갔다. 그리고 델리나도 소중한 그들이 제국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이 나한테 해 준 것도 참 많아. 만약 총이 나를 향했으면 그 애들도 나처럼 행동했을 거야.”
예비 흑막에서 흑막으로 바뀌는 조건은, 극심한 마음의 동요였다. 거기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제 죽음에 얼마나 크게 동요했는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걱정 마. 난 자연사가 꿈이니까. 꼬부랑 할머니 되어도 오빠 놀리는 게 내 꿈인데, 억울해서라도 절대 못 죽지.”
“너는 말을 해도 참…….”
결국 기드온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얼굴은 조금 전보다 한결 풀려 있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 말라고 말해도 넌 갈 거잖아.”
“아주 정확하게 맞췄어.”
“이럴 때는 별로 맞히고 싶지 않은데……. 하여간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거나 피해. 그리고 너 진짜 죽으면 나한테 죽는다.”
“거참 살벌한 걱정 고마워.”
두 사람은 어느새 평소처럼 티격태격했다. 델리나는 기드온과 에일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둘 다 항상 고마워.”
“…….”
“알고 있지? 에일리랑 오빠도 나한테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거.”
그 말에 기쁜 듯 눈을 빛내며 에일리가 델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럼! 델리나! 나도 항상 고마워! 나도 할머니 되고서도 기드온 같이 괴롭혀 줄 테니까, 무사히 잘 다녀와야 돼. 알겠지?”
“당연하지. 지팡이 싸움도 해야 하는데. 아주 단단한 나무로 지팡이 만들어서.”
“이것들이.”
델리나와 에일리의 대화에, 기드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 에일리와 떨어진 델리나가 머뭇거리다가 양팔을 쫙 벌렸다.
“뭐 하냐.”
“……안기려면, 오빠도 안기라고.”
“미쳤냐. 두드러기 나게. 그리고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대. 그냥 하지 마.”
기드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델리나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악수.”
기드온이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델리나의 손을 잡았다. 델리나가 그의 손을 한 번 더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반드시 돌아올게. 걱정하지 마.”
“그 말 꼭 지켜.”
기드온도 델리나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에일리가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 * *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돼.”
황궁 응접실에는 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에스텔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설명 못하는 것도 처음이긴 한데, 그때 본 반센트의 모습은…… 뭐랄까, 반센트긴 한데 반센트가 아니었어.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남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황당해했겠지만, 적어도 응접실 안에 있는 이들은 에스텔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맞아, 나도 딱 느낌이 그랬지. 심지어 날 보더니 그렇게 말하던데.”
“뭐라고?”
“살아 있었냐고.”
에드윈의 말에 에스텔이 벙찐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벨리온이 덧붙였다.
“우리 쪽도 비슷해.”
원래 칼릭스는 말수가 적지만,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쯤은 벨리온도 알 수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건 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 황실 군대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에스텔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쏠렸다. 그레이스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국경 근처까지 가 있다가 지금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고 방금 소식을 들었어. 아직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군대가 동원되어서 분위기가 좋지는 못해.”
“네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는 거야?”
에스텔이 다시 물었다.
“아슈드가 성인이 되고서 거의 모든 권한이 아슈드한테 갔어.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하이르는 계속 병상에 누워 있었고, 황실 군대는 아슈드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걱정스럽다는 듯 그레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군대를 끌고 갈 애가 아닌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네 사람 모두 아이들의 변화에 심히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그때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국경 쪽으로 사람을 보냈어.”
“왜?”
“사건과 관련이 있는 셀린을 데려오기 위해서.”
사건이라는 말에 모두 동시에 벨리온을 쳐다봤다.
“설마 사냥제 독살 사건에 그 아이가 관련되어 있는 거야?”
“자르버네 영식이 마셨던 술병이 발견됐어. 술에 약이 섞여 있어서 그 약도 조사했고.”
“…….”
“술병에 든 것과 동일한 약이 셀린 방에서 발견되었지.”
이어지는 벨리온의 말에 모두 침묵했다. 잠시 후 에드윈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래서 사건의 용의자로 데려올 셈이었나 보네. 하지만 대공녀가 황궁에 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 아이들이 거부했으니까. 그 애를 보낼 수 없다고 하더군.”
황족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한 일인데도 거부하는 이들의 행동에 에드윈이 황당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광대 영애 사건 때문에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았나.”
“…….”
“뭐 어쩌겠어. 뒤늦게 사춘기가 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말썽 피우는 애들을 챙기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덧붙였다.
“나도 갈게. 국경.”
그러자 에스텔도 손을 들었다.
“나도 갈 거야. 진짜 어쩌겠어. 벌어진 일, 수습은 해야지. 아, 그레이스 너는 여기에 있어.”
“……응.”
상황이 상황인 만큼 황궁에서 총지휘를 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것을 알기에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에스텔이 그레이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걱정 마. 아슈드도 우리가 잘 데려올 테니까. 그렇지, 벨리온?”
에스텔의 말에 벨리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드윈이 말했다.
“좋아. 하지만 루넨 제국 쪽을 경계해야 하니 우리가 애들 쪽으로 다 갈 수는 없고, 아이들한테 대표로 갈 사람을 정해야 하는데…….”
에드윈의 말과 동시에 밖에서 펠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실례합니다, 전하. 아가씨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오셨는데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펠릭 뒤에는 델리나가 서 있었다. 벨리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델리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해요. 회의 하시는 중인지는 몰랐어요.”
“괜찮아. 어차피 거의 다 끝났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지?”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델리나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국경에 같이 데려가 주세요.”
“…….”
“상황은 저도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한테 가고 싶어요.”
다섯 명이 있는 곳에 간다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다.
“아이들이 그렇게 변한 건 아마…… 저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직접 그 애들을 만나서 설득해 볼게요.”
벨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놈들은 네가 알던 놈들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가겠다고.”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
“하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졌다. 잠시 델리나를 바라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좋아.”
“!”
“대신 네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났다가는, 그놈들이 죽을 거야.”
“감사합……! 어, 네?”
감사 인사를 하던 델리나가, 살벌한 벨리온의 말에 당황한 얼굴로 뒤에 있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더 크게 사고 치는 것보다야, 그냥 벨리온 손에 죽는 게 더 낫겠지.”
그레이스도 에스텔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에 델리나는 그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