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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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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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2023.08.30.
“델리나, 델리나! 정신 차려 봐!”
‘여긴…….’
신기한 기분이었다.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고 눈조차 뜰 수 없는데, 눈앞의 광경이 생생했으니까.
‘이건 꿈일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 수도가 온통 불길에 휩싸이고,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채 죽음을 목전에 둔, 그날이었다.
“델리나…….”
하늘을 뒤엎는 강렬한 화염과 이글거리는 열기, 그 사이에서 에일리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에일리는 쓰러진 누군가를 깨우듯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자신이었다.
‘맞아. 그때 오빠랑 같이 에일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었지. 다 함께 도망치자고 하고서는…….’
그러나 세 사람 중 살아남은 이는 에일리뿐이었다. 그 사이에도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슬픔과 충격에 빠진 에일리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에일리 영애. 여기서 다 뵙네요.”
그때 에일리 뒤에서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셀린이었다.
“당신……!”
“왜 그러고 주저앉아 계세요? 다리라도 다치셨나요?”
셀린을 본 에일리의 얼굴이 분노로 뒤덮였다.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난 에일리가 셀린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 소중한 친구가…… 아악!”
하지만 에일리는 셀린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셀린을 보호하듯 나온 팔 하나가, 사정없이 에일리의 몸을 밀친 탓이었다. 에일리는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젠, 나는 괜찮으니까 가 있어도 돼.”
셀린 옆에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젠이 있었다.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에일리를 죽일 듯이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셀린의 말에 젠은 고분고분 돌아갔다.
“그러게 왜 멋모르고 덤벼들고 그래요, 영애. 제게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아시면서.”
“…….”
“이제는 정말 다리를 다쳐 버렸네요.”
방금 넘어지면서 에일리의 발목이 어딘가 부러진 듯 부어올랐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에일리 대신, 셀린이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에일리가 몸을 잠시 움츠렸다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
“대공가도 몰락시키고, 제국도 그렇고……. 왜 당신의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만드는 건데요? 당신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말할수록 셀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에일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셀린은 덤덤했다.
“제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은 이미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공 전하는 당신의 아버지고, 게다가 지금 당신의 곁에는 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에 놀란 듯 에일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섯 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셀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글쎄요. 전 한 번도 저 다섯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따지자면……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좋은 도구들이죠.”
그렇게 말하며 셀린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참 재미있는 일이죠. 제국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남자들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그래서 본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날뛰는 것이 말이에요. 그래서 더 수월했어요. 여기까지 오는 게.”
“…….”
“이게 뭔지 아시나요, 영애?”
셀린이 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가운데에 작은 헝겊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였다.
“전요, 다른 영애들보다 특별히 외모도, 화술도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혼자만의 힘으로 저 다섯의 관심을 얻기는 힘들었죠.”
“…….”
“하지만 도움을 주신 분이 계세요. 거기서 재미있는 약들도 많이 얻었고요.”
약이라는 말에 에일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건 그중에서도 제일 특별한 약 가루를 담은 목걸이에요. 이 목걸이 덕에 그날 일이 한결 수월했죠. 제국의 황제가 자기 제국을 짓밟는, 통쾌한 광경을 보는 것이요.”
“그럼, 이 끔찍한 결과가 모두…… 당신이 계획한 일이었던 거예요?”
말하면서도 충격적인지 에일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셀린은 대답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거리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고,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셀린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 눈매를 휘었다.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에일리 뒤로도 불길이 치솟았다. 호흡이 힘들어진 에일리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눈을 감고서 그대로 쓰러졌다.
셀린은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셀린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새빨간 화염은, 제국을 모두 삼킬 듯이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 * *
“……!”
눈앞까지 다가온 화염에 휩쓸리면서 델리나는 눈을 번쩍 떴다.
“윽……!”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곧 어색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이 마치 물을 먹은 솜처럼 축 처졌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델리나는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를 살폈다. 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이곳은 어느 낯선 방 안이었다.
‘꿈,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델리나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마에 난 식은땀까지 닦은 후, 델리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했다.
‘분명 그때 독에 당해서 쓰러지고…….’
이후 치료를 위해 침대 위로 옮긴 모양이었다. 델리나는 제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줄을 당기기 무섭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베티였다.
“아가씨.”
“베티!”
대공가에 남아 있었던 베티를 이곳에서 본 델리나가 반가워서 외쳤다. 그러나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베티가 물을 내왔다.
“며칠 동안 누워 계셔서 제대로 목소리가 안 나오실 수 있습니다. 천천히 목만 축이십시오.”
“내가,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다고?”
목을 캑캑거리면서 놀란 듯 델리나가 물었다. 그러자 베티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황궁입니다. 저는 아가씨의 소식을 듣고 간병과 호위를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럼 나를 제일 먼저 치료해 준 사람은 누구야? 사냥제 이후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다들 무사한 거지? 그리고, 그리고…… 그때 내 주위에 있었던 다섯 명은?”
이제 막 정신을 차려 정신이 없었지만 델리나는 궁금한 것을 빠르게 물었다.
“그건 곧 설명해 주실 분이 오실 겁니다.”
베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문이 열렸다.
“아가씨!”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벨리온과 펠릭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아가씨, 깨어나셨군요! 어디 더 안 좋으신 데는 없으십니까? 특별히 아픈 곳은요?”
“아, 응. 몸에 힘이 없는 것 빼고는 괜찮아.”
“그러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이대로 아가씨께서 안 깨어나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깨어난 델리나를 보며 펠릭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벨리온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델리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전하?”
델리나가 그를 불렀지만 벨리온은 말없이 델리나의 손만 꽉 붙잡았다.
“…….”
덩달아 델리나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굴렸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정신없이 달려온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단정하지 못한 옷매무새로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광대.”
“……네.”
델리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미약했지만 벨리온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괜찮은 거지.”
“네, 말했다시피 힘이 좀 없는 것 빼고는 아주 좋아요. 그리고 저 잘 아시잖아요. 몸 하나는 튼튼한 거. 며칠 후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
“전하 직속 광대가 이 정도 체력도 없으면 되나요.”
벨리온의 염려를 눈치챈 델리나가 밝게 말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설마 총알에 독이 묻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방심했네요.”
델리나의 말에 벨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총 쏜 놈이 잘못이지, 광대 잘못은 없어.”
“뭐, 그건 그렇긴 하지만……. 맞아, 그러고 보니 머닌 영식은 어떻게 됐어요? 지금 감옥에 있나요?”
델리나의 물음에 벨리온이 침묵했고, 펠릭과 베티도 표정이 묘해졌다. 곧 펠릭이 입을 열었다.
“그게……, 이게 참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씨.”
“왜?”
“머닌 영식은 죽었습니다.”
“뭐?”
“아가씨께서 쓰러지시고 난 후 일이 벌어졌습니다. 심문도 하기 전에 괴롭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그대로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에 델리나가 멍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머닌 영식이 죽어 버려서 남은 단서라고는 총과 총알, 그리고 총알에 발린 독약뿐입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는 천만다행이셨습니다. 상처로 들어간 독이 정말 극소량이어서 해독제를 쓸 때까지 아가씨의 몸이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해독제를 가진 사람이 무리 중에 있어서 더더욱 다행이었고요.”
“누가 가지고 있었는데?”
“메이린 황녀님이십니다.”
메이린의 이름이 나오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요. 루넨 제국은 다양한 약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그래서 루넨 제국 사람들은 해독제 한두 개 정도는 늘 들고 다닌답니다. 황족은 말할 것도 없고요.”
“…….”
“황녀님이 적당한 해독제를 줬다는 건, 아가씨가 당했던 독약에 대해 메이린 황녀님도 잘 아신다는 말이 되는데…….”
펠릭은 말끝을 흐리며 벨리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 독약은 루넨 제국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이지.”
그의 말이 끝나고 방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