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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잘생긴 우리가 인정하는 수밖에 (89/94)


89화 잘생긴 우리가 인정하는 수밖에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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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냥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제법 많이 쌓인 동물의 사체를 보며 펠릭이 말하자 기사들이 사체를 싣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델리나도 쥐고 있던 검을 도로 검집에 꽂았다.

“이쪽은 다 아가씨가 잡으신 것들입니까?”

“응.”

대공가에서도 잡은 것들도 어마어마했지만, 델리나가 잡은 것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처음 사냥하신 건데도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신 거예요.”

“그래? 그런데 확실히 실전이 어렵긴 하더라. 몇 번 놓칠 뻔하기도 했고.”

“그래도요. 열심히 훈련하신 보람이 있으십니다. 이제는 검도 잘 다루시고, 총은 말할 것도 없고요.”

확실히 델리나도 훈련의 성과를 느끼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디아몬 공작가가 잡은 동물들도 보였다. 공작가에서 잡은 것들 또한 수나 종류가 굉장했지만, 대공가에는 조금 못 미쳤다.

“사냥 내기는 저희가 진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지. 잘생긴 우리가 인정하는 수밖에.”

표정만 보면 공작가가 승리한 것 같았다. 내기에서 졌는데도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띠고 있는 에드윈과 노아를 벨리온이 무섭게 노려봤다.

“델리나.”

“아, 칼릭스. 너도 끝났어?”

사냥을 마친 칼릭스가 슬며시 델리나에게 다가왔다.

“너도 엄청 잡았네. 어, 뭐야. 멧돼지도 사냥했었네?”

“맞아. 그런데…….”

“응?”

“정말 나, 차가워?”

그 말에 델리나가 잽싸게 답했다.

“전혀.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애초에 냉철한 외모랑 마음이 차가운 건 관계가 없다니까? 그건 공작님이 농담하신 거고, 신경 안 써도 돼.”

델리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벨리온에게도 몇 번이나 한 상태였다. 눈물 나는 노력 끝에 벨리온은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였다. 이제 칼릭스 차례였다.

“물론 너나 전하나 얼굴만 본다면 조금, 아주 조금 냉정해 보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보는 너는 하나도 안 차가워.”

“…….”

“도리어 널 보면 따뜻한 게 떠올라.”

“따뜻한 거?”

“갓 구운 빵 같은 거.”

함께 디저트를 먹어서인지 델리나는 칼릭스를 볼 때마다 따뜻하고 달콤한 디저트가 생각났다. 델리나의 말에 칼릭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돌아가서 또 만들어 줄게.”

“아주 좋아. 그렇지 않아도 몸을 너무 썼더니 엄청 배고프거든.”

몹시 보기 드문 칼릭스의 미소에 델리나도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자연스레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 노아가 있었다. 노아와 눈이 마주친 델리나는 놀란 얼굴로 칼릭스 뒤로 쏙 하니 숨었다.

“…….”

“갈까? 동물들 다 실은 거 같으니까.”

델리나는 저를 보는 노아를 애써 외면한 채 칼릭스를 이끌었다. 그러자 노아를 힐끔 본 칼릭스가 델리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노아 또한 별말 없이 돌아섰다.

“아직 안 돌아온 기사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더 가면 휴식 장소가 있는 걸로 아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나무와 수풀로 우거진 숲이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드넓은 평지가 있는 구역 근처였다. 사냥하는 이들은 그곳을 휴식 장소라 칭하며, 대열을 정비하거나 휴식을 취하곤 했다.

“가자.”

대공가와 공작가도 그곳에서 휴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벨리온의 말대로 조금 이동하니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다.

“진짜 이런 곳이 있었네?”

“예, 나무도 수풀도 없는 곳이다 보니 동물들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식 장소로도 요긴하게 쓰이죠.”

이미 많은 이들이 사냥을 끝마친 듯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곧 델리나는 엘피샤 후작가의 깃발을 발견했다.

“또 실험하다 저렇게 됐나 본데.”

“응.”

에스텔은 기사들 사이에 누워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에스텔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듯 에드윈도 벨리온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반센트!”

에스텔 근처에는 반센트도 있었다. 그를 본 델리나가 다가왔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실험은?”

“누나가 안 일어나니까 근처에서 나 혼자 하긴 했지.”

반센트 뒤에 있는 수많은 사체들이 실험 결과를 알려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에스텔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후작님은 오늘 내로 깨어나시는 거지?”

“몇 시간만 자도록 양을 조절했으니까 곧 깨어날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후작님이 깨어나시면 상당히 아쉬워하시겠는데. 실험을 못 보셔서.”

에스텔의 실험 정신은 반센트 못지 않았다. 하지만 반센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한 번 하고 끝낼 실험은 아니니까. 다른 곳에서 또 하면 되는 거고.”

“후작님이랑 같이?”

“응.”

델리나와 대화하면서도 반센트는 사용했던 기구들을 손보기 바빴다. 그러다가 델리나에게 제안했다.

“너도 껴도 상관없고.”

“진짜?”

반가운 얼굴로 묻던 델리나가 곧 깨달은 듯 웃었다.

“내가 실험체니까 그러는 거야? 나 상대로 실험하려고?”

“…….”

“설마 갔는데 내 목숨이 위험해지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없어.”

“그래? 그러면 나도 같이 가고.”

반센트가 제 목숨을 위협할 만한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델리나는 괜히 농담을 던졌다.

“으아아악!”

그때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델리나가 고개를 들어 소란이 난 곳을 확인하다가 입을 쩍 벌렸다.

“델리나!”

도망가는 사람들 사이로 젠이 델리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달리는 사자의 등에 올라탄 채 말이다.

“젠!”

그 기가 막힌 상황에 놀라 델리나가 젠을 불렀다. 젠이 보란 듯이 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때? 멋진 애로 데려왔어.”

“뭐?”

“델리나 선물이야.”

“아, 그…… 고맙기는 한데…….”

사자의 등장에 모두 바짝 긴장한 얼굴로 델리나와 젠 쪽을 쳐다봤다. 그것을 전혀 모르는 듯 마냥 해맑은 젠의 얼굴에,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델리나였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이렇게 큰 동물보다는 아주 작은, 주먹만 한 동물들을 더 좋아하거든.”

“그래?”

“응. 초식 동물이면 더 좋고, 새나 토끼 같은…… 그런 소동물들. 그러니 사자는 그만 돌려보낼까, 우리?”

“그래, 그러면.”

델리나의 말에 젠이 흔쾌히 사자를 풀어 주었다. 사자는 젠의 손짓에 고분고분히 숲 쪽으로 돌아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면 다음에 작은 애들로 데려올게.”

“고맙긴 한데 너무 많이 데려오지는 말고 한 마리씩. 알겠지?”

“응.”

까딱하다가는 대공가가 동물 천국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델리나의 말에 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이렇게 또 소란스럽나 했더니…….”

소란스러움에 몰려든 이는 또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나온 아슈드가 앞에 있는 델리나와 일행들을 보고서 ‘또 너희들이냐’ 하는 눈빛을 보냈다.

“사자는 지금 막 보냈습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전하.”

“……그래. 돌려보냈으면 됐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델리나는 아슈드에게 예를 갖췄다. 아슈드도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영애도 사냥감 잡았나?”

“예, 제법 만족스럽게 잡았습니다.”

“……그래?”

델리나의 말에 아슈드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혹시 거기에 사슴도 있고?”

사슴 소리에 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델리나의 시야에 아슈드 뒤에 있던 사슴 한 마리가 들어왔다.

“황태손 전하. 슬슬 사냥 시간이 끝나서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슈드가 한 번 더 입을 떼려고 하는데 노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미 다들 채비를 하고 있고요.”

그의 말대로 사냥 시간이 끝나가는 터라 휴식하던 다른 기사들은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각 가문의 대표인 벨리온이나 에드윈, 그리고 막 잠에 깨서 비틀대는 에스텔도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전하께서 숲에 너무 오래 계시면 다른 귀족들이 걱정할지도 모릅니다.”

“…….”

노아가 웃으며 말했고, 아슈드는 그런 노아를 노려보다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돌아갈 준비 해.”

“예, 알겠습니다.”

아슈드의 말에 황궁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소란에 모여 있던 이들도 하나둘 사라지며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자리엔 델리나와 다섯 명만 남았다.

“그거 사슴, 데미안 황자님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한테 먼저 주려고?”

사람이 사라지자 델리나가 다시 아슈드에게 편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한 델리나가 웃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함께한 보람이 있네. 루넨 제국으로 시집갈까 봐 황태손 전하께서 걱정도 다 해 주고.”

“걱정은 무슨……! 그냥 사슴 한 마리 남으니까 주려고 한 거지.”

“에이, 괜히 또 그런다.”

화내는 아슈드가 익숙한 듯 능청스레 대꾸하는 델리나였다. 그러자 젠이 바짝 다가왔다.

“나도 사슴 데려올 수 있는데.”

“너도?”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칼릭스도 할 수 있다는 듯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반센트도 입을 열었다.

“함정 설치만 해도 사슴 열 마리는 잡힐 껄.”

“그 정도면 사람도 잡히겠다.”

너 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이자 델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가 델리나의 시선이 문득 노아에게 닿았다.

“…….”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노아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노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델리나를 쳐다봤다.

“……너도, 혹시 사슴…….”

델리나도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뭐, 뭐야! 저건!”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먼 곳에서 어마어마한 연기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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