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제가 좋으시단 말입니까?
(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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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제가 좋으시단 말입니까?
2023.08.27.
“갑자기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길래 얼마나 대단한 사냥감이 있나 해서 왔더니.”
델리나를 보며 에드윈이 미소 지었다.
“광대 사냥을 하고 있었네.”
“…….”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에드윈이 데미안의 사태를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듯 벨리온은 데미안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루넨 제국 황자님께서 여기 계셨습니다.”
펠릭의 짧은 설명에 단숨에 상황을 이해한 에드윈이였다. 하지만 장난기는 사라질 줄 몰랐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주 열렬한 구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러다가 진짜 광대 영애 루넨 제국으로 가는 건 아니지?”
그러자 벨리온이 에드윈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런 놈 말고, 광대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해.”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고, 에드윈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루넨 황자도 객관적으로 보면 꽤 준수한 편인데, 광대 영애의 기준에는 안 미치나 보네.”
“그놈이 뭐가 잘생겨.”
“왜, 그만하면 괜찮지.”
에드윈과 벨리온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를 본 델리나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설마, 설마?’
“두 분이 이렇게 대화하시니 저도 최근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델리나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전하 얼굴보다도 제 얼굴이 더 잘생겼다던데요.”
“누가.”
“전하 광대가요.”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벨리온이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해 놓은 말이 있는 델리나로서는 침묵을 유지하며 벨리온의 눈을 슬며시 피했다.
“아, 그런 거였어?”
“예. 냉철한 얼굴보다는 온화한 얼굴이 더 좋다던데요. 자기 취향이라고.”
“하긴. 저쪽은 너무 차갑지.”
노아와 닮은 외모를 가진 에드윈이 싱글싱글 웃었다. 반대로 벨리온과 닮은 칼릭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광대 영애가 아주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고 있었네.”
“예……, 뭐…….”
“그런데도 대공가에서 그렇게 잘 지내고. 그동안 차가운 얼굴들 보고 사느라 어떻게 버텼어? 무서웠겠네.”
에드윈의 말에 벨리온과 칼릭스가 한 번 더 충격 받은 얼굴을 하자 델리나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아니죠. 그냥 온화한 얼굴 쪽이 조금, 아주 조금 더 취향일 뿐이지 전하가 차갑거나 무섭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그래. 그러면 그냥 우리보다 덜 잘생긴 얼굴인 거네.”
한순간에 덜 잘생긴 얼굴이 된 벨리온과 칼릭스의 분위기는 참으로 어두웠다. 하필이면 또 벨리온과 칼릭스 사이에 있던 델리나는 제 이마를 짚었다.
‘……어디 멧돼지라도 안 나타나나.’
차라리 사나운 맹수라도 와서 이곳을 휘저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차라리 사냥을 하는 게 나을 듯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주위에는 작은 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델리나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 * *
사냥제가 시작되자 사냥을 하지 않는 이들은 막사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변 숲을 산책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 손수건을 줬는지 말하며 수다를 떠는 영애들도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하지만 그들의 활달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우울하게 막사 안에 웅크려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머닌. 예전에 황궁 성인식에서 노아에게 쫓겨나듯 사라졌던 그였다.
당시에는 화려하게 단장하고 보석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몸은 잔뜩 움츠린 채였으며, 옆에는 술병까지 놓여 있었다. 술을 따르면서도, 잔을 들면서도 머닌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거기에 돈을 전부 다 거는 게 아니었는데……. 이걸 아버지가 알면…….”
성인식 이후로 머닌은 어떻게 해서든 사업을 일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 좋지 못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집안의 보석이며 패물들을 몰래 가져다가 도박에 쏟아부었고, 계속해서 돈을 잃자 급기야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지르고야 말았다.
“가문의 인장을 담보로 했다는 게 들키면 난 진짜 쫓겨날 텐데……. 어쩌지, 이제는?”
도움을 청할 만한 이도 없었다. 성인식 사건 이후로 주변 영식들과 영애들이 하나둘씩 저를 피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심지어 로즈립 후작가의 모임에서는 그에게 먼저 대화를 청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오늘 사냥제에서는 아예 근처에도 오지 않겠다는 듯 몸을 피했다.
“내가 좋다고 웃으며 다가올 때는 언제고……! 가증스러운 것들!”
머닌이 잔을 거세게 내려놓자 옆에 있던 병이 요란스레 나뒹굴며 떨어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머닌이 씩씩댔다. 하지만 머닌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제 상태였다.
머닌이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며 도박과 술에 의존한 지도 꽤 되었다. 사냥제에서도 대놓고 술 냄새를 풍기며 어두운 얼굴로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머닌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더 이상 사용할 돈도 없는데, 아니면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서…….”
디아몬 공작가.
돈이라는 말에 제국의 모두가 떠올리는 그곳. 하지만 디아몬을 떠올리는 순간 머닌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자식. 그깟 돈 좀 있다고 그렇게 나를 모욕해? 두고 봐…….”
분노로 머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노에 이어 또다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머닌이 제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잡아당겼다.
“……도망칠까?”
급기야 머닌은 제국에서 도망치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머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사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이는 셀린이었다. 셀린을 본 머닌의 눈이 커졌다.
“……예?”
느닷없이 나타난 셀린을 보며 머닌이 당황해하는데 셀린이 웃으며 머닌에게 다가갔다.
“저, 기억하시죠? 예전에 후작가 모임에서 인사한 적 있었는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왜……?”
사교계에 데뷔한 사람이라면 셀린을 모를 수가 없었다.
누구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교계의 새로운 꽃이 아닌가. 하지만 성인식에서 벨리온의 무서움을 맛봤던 머닌은 셀린과 만나는 일을 꿈꿔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 셀린이 저가 있는 막사에 나타나다니. 머닌이 얼떨떨해할 만했다.
“실은 이걸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손수건…… 아닙니까?”
“예, 실은 모임에서 뵈었을 때부터 영식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음을 전하게 되네요.”
셀린이 손수건을 내밀자 머닌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저를 말입니까?”
“그럼요. 그날 모임에서도 제일 멋있으셨는데요. 그런데 대화를 오래 못 나눠서 너무 아쉬웠거든요.”
환한 셀린의 미소와 손에 쥔 손수건. 순간 머닌은 놀랍도록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얼굴에 열이 훅 올라서 머닌은 당황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좋으시단 말입니까?”
“그럼요.”
머닌은 이게 꿈인가 싶었다. 그사이에도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으며, 붉어진 볼 또한 그대로였다. 거기에 술기운까지 겹치니 머닌은 점점 머리가 몽롱해졌다. 머닌의 눈이 서서히 풀려갈 즈음, 셀린이 새 술병을 가져와 머닌의 잔에 부었다.
“저 때문에 술 못 드시는 거 아니세요? 어서 드세요.”
“아닙니다. 제가 따라도 되는데…….”
“괜찮아요.”
머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을 잡으려고 했지만 셀린이 병 대신 잔을 내밀었다. 술이 찰랑거리는 잔 안으로, 순간 작은 거품 방울이 뽀글대며 사라졌지만 머닌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최근에 많이 힘든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머닌은 셀린이 내미는 술을 받아 마셨다. 셀린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이지 다른 영식들과 영애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게 속상할 따름이에요. 머닌 영식이 얼마나 사업 수완도 좋고 유능한 사람인데.”
“그럼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감히 그 자식들이……!”
그 순간 머닌은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조금 전보다 심장이 더 거세게 뛰었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동시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내가, 내가 누군데! 왜 다들 그딴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왜!”
급기야 머닌이 손에 있던 잔을 내던졌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셀린은 차분했다. 오히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시늉을 했다. 머닌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나를 이상하게만 보고, 자기들이 이상한 거면서! 내가, 내가 그렇게 우스운 건지…….”
깨진 유리 조각에 베인 듯 머닌의 손에서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하지만 머닌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머닌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셀린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머닌 영식 말이 다 맞아요.”
“…….”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우리 같이 보여 줘요. 머닌 영식이 결코 우스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귓가로 들려오는 셀린의 목소리는 참으로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