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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나 봐 (78/94)


78화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나 봐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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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돌아와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델리나는 제 손에 들린 봉투를 천천히 뜯었다. 이윽고 보이는 종이 위로 셀린의 이름이 보였다.

“이름, 셀린 울피림, 흑발에 청안, 성별 여자……. 진짜 의뢰서 형식대로 해 줬네.”

자세하게 조사된 셀린의 정보에, 델리나의 눈동자가 빨라졌다. 내용 중 델리나의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셀린의 출신 마을이었다.

‘불타 없어졌다고? 마을이?’

생존자는 0명.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셀린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셀린이 출신 마을을 숨긴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반역.

마을이 불태워진 것은 반역죄 때문이었다.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온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고, 마을 주민들 또한 그 자리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비공식적으로 살아 있는, 셀린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이후에는 셀린의 말해 준 그대로였다. 귀족 가문의 사용인으로 전전하며 일을 해 왔고, 그녀가 일했던 가문의 일원들 또한 셀린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사용인 중에 벨리온 대공의 딸이 있다면 놀라 뒤집어질 일이지.’

정말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겨온 듯, 셀린은 성인이 되고서야 대공가에 왔다. 잠시 후 델리나의 입매가 굳어졌다. 정확히는 불이라는 단어를 보고서 그랬다. 델리나의 눈앞에 붉은 화염이 일렁거렸다.

사방에서 울려 대던 비명 소리와 폐부까지 깊숙하게 박혀 들어오던 열기, 그리고 불꽃 한가운데 서 있던 다섯 명…….

불타 없어진 마을, 오래전 광장을 휩싸던 화염. 이 모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델리나가 맨 마지막 문단으로 시선을 내리자, 편지처럼 쓰인 노아의 유려한 글씨가 보였다.

<그리고 디아몬 가문 최고 고객님께 하나 더 정보를 줄까 하는데, 이건 정말 여기 아니면 알 수도 없는 정보일걸? 사실 말이야, 셀린 울피림은 벨리온 대공의 딸이 아니라……>

델리나가 뒤의 내용을 읽어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밖이 요란해지더니,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델리나가 고개를 들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전하?”

복도를 달려왔는지, 벨리온의 앞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델리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제 행동에 제가 놀란 듯 자리에 굳은 채 우뚝 서 있던 벨리온이 도로 방문을 닫고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델리나의 말에 벨리온이 그제야 다시 들어왔지만, 어색한 공기는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곧바로 벨리온의 뒤에서 펠릭이 나타났다.

“아가씨이이! 루넨 제국 황자한테 공개 구혼 받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응?”

“설마 받아 주신 건 아니죠? 안 됩니다, 아가씨. 아무리 전하랑 사이가 안 좋으시더라도 결코 그런 황자랑은……! 악!”

펠릭이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벨리온이 왜 이리 다급히 왔는지 깨달은 델리나였다. 벨리온이 펠릭을 걷어차고는 방에서 내쫓았다. 곧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먼저 묻는 것은 벨리온이었다. 펠릭만큼의 호들갑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음,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요. 루넨 제국 황자님한테 공개 구혼 받은 건.”

그 말에 벨리온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리자, 델리나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거절은 확실히 했어요. 애초에 프러포즈 받고서도 설레거나 그런 감정도 전혀 없었고요.”

“…….”

“들어 보니까 그쪽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만 확실히 거절 의사를 밝히면 괜찮을 것 같아요.”

데미안 나름대로 계속 구애 활동을 이어 나갈 듯했지만, 사정을 들으니 차마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참, 그리고 그분이 셀린도 한번 만나 본다고 하던데요.”

“…….”

데미안과 셀린이 만난다는 소리에 벨리온이 잠시 침묵했다. 곧 벨리온의 입이 열렸다.

“셀린은 내 친딸이 아니다.”

“!”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내 누나의 딸이지.”

“전하의 누님이시면…….”

‘마리엔 울피림?’

분명 예전에 저택의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다른 이들의 초상화와는 다르게 유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기억에 남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오래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하기로 했었지.”

‘아.’

델리나는 벨리온의 말뜻을 바로 깨달았다.

“신분을 숨기고 바깥에서 사셨던 건가요?”

“그래. 본디 귀족들의 사교계 같은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사는 삶을 꿈꿨었지.”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곧 델리나는 셀린의 목에 있던, 울피림의 문양을 가진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러면 대공가 문양 목걸이는요?”

“대공가를 빠져나가기 전 내가 줬던 목걸이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오라는 증표로.”

“……그랬군요. 전하의 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그걸 셀린에게 줬고, 셀린은 그걸 들고…….”

‘죽은 이유도 분명 마을이 불타 없어진 거랑 같겠지.’

벨리온이라면 이미 그를 조사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제야 델리나도 수긍했다.

“그래서 셀린을 전하의 친딸이라고 하셨군요. 만약 조카라고 하면 전하의 누님이 살아 계셨다는 걸 들키게 되니까.”

울피림 대공가 같은 가문에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일원이 있다면 파장이 클 것이다. 특히나 대공가를 견제하는 황실에 알려진다면 더더욱.

“잠깐만요. 그러면 이건 진짜 숨겨야 하는 비밀 아니에요? 저한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이 일이 퍼지면 곤란해지는 사람은 벨리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직접 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델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벨리온은 덤덤했다.

“광대.”

“네?”

“나한테 딸이 있든 조카가 있든 광대랑 나 사이에 변하는 건 없어.”

“…….”

“그러니까 그쪽으로 마음 쓰지 마.”

낮고 덤덤했지만, 귓가를 파고드는 벨리온의 음성에 델리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네. 알겠어요.”

분명 그쪽으로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참으로 신기할 노릇이었다. 이렇게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 * *

“황자님이 편지를 보내셨다고?”

“응. 아무래도 내가 대공가에 새로 들어와서 관심이 많으신가 봐. 한번 보자고 하셔서 그러자고 했어.”

셀린을 보겠다는 데미안의 말은 사실인 듯, 데미안은 셀린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내가 황자님 봐도 괜찮은 거 맞지?”

“응? 왜?”

“그야 둘이 결혼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허락받아야 할 것 같아서.”

“아니, 아니. 전혀 아니야. 결혼할 일 전혀 없으니까 걱정 말고 만나.”

셀린의 말에 델리나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셀린의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도 황자님 멋지던데. 거절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야?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음, 뭐…….”

그 말에 델리나가 말끝을 흐리고 찻잔을 가만히 기울였다. 그러자 델리나를 빤히 보던 셀린이 눈매를 휘었다.

“그러고 보면 델리나는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나 봐.”

“내가?”

“응. 칼릭스도 그렇고 젠도 그렇고. 아, 그리고 이번에 만난 디아몬 공자나 엘피샤 영식도 말이야, 보니까 무척 친해 보이던데.”

“아무래도 칼릭스나 젠은 같은 저택에서 살았으니까 그렇긴 한데…… 두 사람은 어떻게 알았어? 나랑 친한 거?”

“그때 모임에 세 사람만 유독 늦게 돌아왔잖아. 그래서 모임 끝나고서 만나 물어봤거든. 델리나 너랑 친한지 궁금해서 말이야.”

노아와 반센트까지 따로 만나 봤다는 소리에 잔을 잡고 있던 델리나의 손이 움찔 떨렸다.

“물어보니 울피림 대공가의 후원을 같이 받아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역시 어렸을 때의 인연이 큰가 봐. 지금도 그게 이어지는 걸 보면.”

“……그렇지, 뭐.”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지금도 대공가에 한 번씩 들르는 거야?”

“글쎄. 애초에 거기 둘도 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쿠키를 집었지만 델리나의 모든 감각은 셀린의 대답에 쏠려 있었다.

“사실 그동안 사용인 일을 하면서 지내서인지 내 또래 친구들이 없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 그래서 혹시 괜찮으면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시켜 줄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거라면 바로 소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데. 에일리라고, 어때? 같은 또래 영애라서 말이 더 잘 통할지도 모르는데.”

“아, 그것도 좋은데 아버지가 후원했다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말이야.”

‘소개. 그것도 하필 그 둘을 콕 찝어서 말했단 말이지.’

여전히 셀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쿠키를 먹던 델리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나중에 기회 되면 그렇게 하자.”

“정말? 고마워.”

“응. 그러면 나도 부탁이 좀 있는데.”

“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데미안과 셀린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눈을 굴리던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황자님 만나러 황궁에 갈 때 나도 좀 끼워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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