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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변하는 건 없어 (77/94)


77화 변하는 건 없어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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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린을 살려 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메이린을 두고 협박하면 나는 별수 없거든.”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알겠는데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하셔도 괜찮은 거예요?”

“뭐, 어차피 영애도 그 사람 성격 알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더더욱 제가 안 가겠다고 할 텐데요.”

둘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거긴 했지만, 데미안이 서슴없이 데카르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한 것은 델리나였다.

“어차피 사랑한다느니 뭐니 하는 말보다 이런 이야기가 영애한테는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

“…….”

“그리고 새삼 느끼는데 난 연기를 못해.”

“네, 그건 맞아요.”

데미안과 이야기한 것 중에 가장 깊게 공감을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새삼 이렇게 보니 아까 전의 공개 프러포즈도 참 짠했다.

‘그래, 이 사람도 살자고 그렇게 하는 거긴 하지만…….’

“만약에 제가 프러포즈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뭐, 죽겠지. 내가 없으니 메이린도 딱히 살려 두지 않을 테고.”

늘 생각했던 일이라는 듯이 데미안이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대공가도 힘들어질걸.”

“…….”

“그 사람이 루넨 제국과의 약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하기야 데카르는 대공가에도 관심이 많았다. 참으로 복잡하게 얽힌 약혼사에 델리나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렇다고 루넨 제국에 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델리나를 가만히 보던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임에 울피림 대공녀도 보이던데.”

데미안의 말에 델리나가 바로 물었다.

“셀린이요?”

“응. 거기도 한번 만나 보려고.”

“그건 왜……, 아.”

셀린.

무려 벨리온의 딸이자, 울피림의 이름을 가진 여인. 그렇다면 분명 데카르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긴 공식적인 목적은 울피림 대공가와 루넨 황가와의 화합인 거잖아요. 황자님이 그쪽을 만나는 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죠.”

‘그런데 나한테 충격과 공포의 구애를 하고서 만난다는 말이지.’

데카르의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셀린은 차선책일 뿐, 데카르의 본 목적은 저나 벨리온일 것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까 나중에 대공녀 쪽으로 편지 보낸다고 전해 줘. 한번 만나자고.”

“예, 뭐…… 네.”

‘결혼 쪽으로는 누구든 상관없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둘 다에게 프러포즈를 할 수는 없을 텐데.’

제게 공개 프러포즈까지 하며 구애했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셀린을 만난다고 하니 의구심이 더더욱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영애가 나랑 결혼하는 게 제일 좋지만.”

“…….”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

“예?”

데미안이 진지한 얼굴로 델리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솔직히 내 얼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은데. 넌 너무 덤덤해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제 턱을 쓸어내리는 데미안의 모습에 델리나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도 결혼 작전 중 하나인가요?”

“아니. 진심으로 묻는 건데.”

“예……, 그렇죠. 확실히 황자님 외모가 빼어나시기는 한데……. 단순히 외모만으로 사람이 좋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그런가. 루넨 제국에 있을 때는 다들 난리였는데.”

데미안의 말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겉으로만 본다면 데미안은 루넨 제국의 하나뿐인 황자였고 외모까지 빼어났다. 분명 그곳에서 영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테다.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물어본 건 왜인가요?”

“거기 맞춰서 따라 해 보려고. 얼굴은 실패니 행동이라도 따라 해 보는 수밖에.”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에 짠한 얼굴을 하던 델리나가 답했다.

“그런데요, 황자님. 제가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말 그 어떤 짓을 하셔도 제가 황자님께 설레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데카르를 많이 닮은 것이 주된 이유였다. 데미안을 아무리 보고 있어도 제 심장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차라리 공포나 놀람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더 빠를 것이었다.

“이후에 황자님께서 제게 또 구애 행동을 하시거나 외모 칭찬을 하셔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요.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 싶어요.”

“…….”

“아니면 제가 전하께 말씀드려 볼까요? 황자님 사정을 아시면 뭔가 도움을 주실지도 몰라요.”

사정을 들으니 두 사람을 마냥 외면하기도 그랬다. 벨리온 또한 델리나가 루넨 제국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니, 어쩌면 데미안에게 도움을 줄지도 몰랐다.

“울피림 대공이? 도움을?”

“그럼요. 그래 봬도 얼마나 따뜻한 분이신데요.”

데미안이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델리나도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데미안은 말이 없었다.

“글쎄. 솔직히 소문으로만 듣고 본 적은 없어서.”

“…….”

“아무튼 그런 건 최후의 수단일 뿐이고, 지금은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잖아.”

“저 유혹하는 일이요?”

“응.”

“……예, 알아서 하세요.”

여전히 집요하게 저를 보는 데미안의 시선에 델리나가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델리나의 어깨 위로 보석이가 내려왔다.

“끽!”

“응, 목걸이 잘 돌려주고 왔어?”

자연스레 보석이의 털을 쓰다듬는 델리나였다. 보석이 또한 델리나의 손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볐다.

‘슬슬 돌아가야겠는데.’

목걸이를 찾았다면 실비아 또한 모임에 돌아올 것이다. 델리나도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여기 오래 있어도 이상한 오해를 받을 테니까요.”

“내 입장에서는 좋은데.”

“제 입장에서는 안 좋고요.”

델리나가 자연스레 데미안의 말을 받아쳤다. 이후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즈음이었다. 저 멀리서 델리나를 발견하고 에일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영애.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에일리가 다가오자 다정히 작별 인사를 청하는 데미안이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덤덤한 표정에, 델리나도 애써 웃음을 참고 답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황자님.”

두 사람이 다정히 인사하니 에일리의 얼굴이 더욱 상기되었다. 데미안이 사라지자마자 에일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뭐야, 뭐야. 진짜 그래서 루넨 제국 가는 거야? 결혼식은 어디서 해? 부케는 당연히 내가 받는 거지?”

“그런 거 아니니까 거기까지.”

이미 두 사람의 신혼여행까지 상상하듯 흥분한 에일리의 말을 막는 델리나였다.

“그런데 왜 나와 있어?”

“왜긴. 애초에 그러고 모임이 제대로 되겠어? 다들 돌아가니까 나도 나와서 너 기다리고 있었지.”

실비아에 이어 데미안의 일까지, 에일리 말대로 모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다른 영애와 영식들이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오빠는?”

“속이 안 좋은지 재빠르게 가던데. 어지간히도 프러포즈가 충격이었나 봐.”

“하긴. 헛구역질 안 한 게 어디야.”

상상이 너무 잘되는 기드온의 반응에 델리나도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으음, 아마 다들 돌아간 것 같은데? 그 대공녀도 기다리다가 먼저 돌아간 것 같고.”

“그래, 그럼. 우리도 가자.”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돌아갔다는 소리에 델리나도 잘되었다는 듯 마차를 부르기 위해 사용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델리나는 품속의 것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노아가 건네준 봉투를.

* * *

벨리온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하지만 펠릭은 할 말이 있는 듯이 벨리온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왜.”

역시 펠릭의 시선을 눈치 못 챌 벨리온이 아니었다. 눈을 서류에 고정한 채 벨리온이 묻자, 이때다 싶었는지 펠릭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는 역시 말씀 안 드릴 생각이십니까?”

“뭘.”

“셀린 아가씨에 관한 거 말입니다.”

“…….”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던데. 질문도 없다고 하고.”

“정말 안 궁금하셔서 그러시는 게 아닐 겁니다. 아가씨도 나름 눈치를 보고 계신 거라고요.”

그 말에 서류에서 눈을 뗀 벨리온이 펠릭을 올려다보았다.

“왜?”

“전하께서 셀린 아가씨를 딸로 받아들이신 이후 사교계가 시끄럽습니다.”

셀린의 등장으로 델리나의 입장이 무척 애매해졌으리라, 귀족들은 그리들 추측하고 있었다. 이제 델리나에 대한 벨리온의 관심이 식었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델리나 아가씨의 후원이 끊기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말에 벨리온이 딱 잘라 답했다.

“광대는 여전히 내 광대고, 변하는 건 없어.”

“바로 그겁니다, 전하. 그런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시면 델리나 아가씨도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요.”

왜 답이 있는데 그걸 말하지 못하냐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펠릭이 말했다.

“그러다가 전하한테 서운해하면서 아가씨가 대공가에서 나가면 어쩌시려고요? 전하 같은 남자 안 만나고 그냥 아무 남자나 잡아서 결혼도 일찍 한다고 하면요?”

그 말에 벨리온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집무실의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베티였다. 벨리온과 펠릭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지금 아가씨께서 돌아오셔서, 알려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델리나가 모임에서 돌아왔다는 소리에 펠릭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단순히 델리나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하러 베티가 이곳에 올 리 없었기에.

“그리고 아가씨와 함께 갔던 이들에게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게 뭐지.”

바로 벨리온이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베티가 답했다.

“아가씨가 공개 구혼을 받았다고 합니다.”

“뭐?”

“루넨 제국 황자에게서요.”

공개 구혼이라는 말에서 이미 집무실 공기가 달라졌다. 그런데 구혼을 한 이가 밝혀지자 펠릭의 입이 턱까지 내려왔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벨리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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