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한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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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한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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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한 방에서
2023.08.18.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황궁 앞으로 마차가 서자 델리나와 셀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은 드높은 황궁을 올려다보듯, 마차에서 내려서도 한참이나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은 처음이지?”
“……응, 그렇네.”
이어지는 델리나의 질문에 비로소 시선을 거두는 셀린이었다. 그러면서도 델리나는 놓치지 않았다. 황궁을 올려다보며 잠시 입매를 굳힌 셀린을.
“나 때문에 이렇게 황궁까지 안 따라와도 되는데. 괜찮은 거야?”
“아냐. 어차피 나도 황궁 도서관에 볼일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같이 오는 거지 뭐.”
델리나는 셀린에게 황궁에 같이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확히는 마차만 얻어 탄 셈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나는 황자님 만나러 가 볼게. 이따 보자, 델리나.”
“응, 잘 이야기하고, 이따 봐.”
셀린이 사라지자 델리나는 흔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반대편 쪽 도서관 복도를 향해 걸었다. 물론 가는 시늉만 했지만 말이다.
‘아무도 없지?’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델리나가 재빠르게 창문을 넘어 바깥 정원으로 뛰어들었다. 빠르게 수풀 안으로 기어들어 간 델리나는 바짝 몸을 웅크렸다.
‘내가 있으면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하겠지.’
데미안과 셀린. 둘 사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면 분명 둘만 있을 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것을 잘 아는 델리나는 드레스 단추를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혼났네.’
드레스를 벗으니 안에서 하녀복이 나타났다. 그것도 황궁의 하녀복이었다.
“역시 베티야. 엄청 잘 만들었는데.”
황궁 하녀복이 필요하다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옷을 만들어 준 베티였다. 덕분에 그 누구보다 완벽한 황궁 하녀 복장을 갖춘 델리나가 창을 열고 능력을 썼다.
<평범녀>
됐다.
키워드 능력이 발동됨과 동시에 델리나는 수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델리나의 근처에서 꽃을 심고 있던 정원사가 델리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원사는 델리나를 보고 말을 놓았다. 델리나가 자연스레 웃으며 말했다.
“수풀에 동전을 떨어트려서요. 그거 찾고 있었어요.”
“나 원 참, 얼마나 찾았으면 머리가 아주 엉망이야. 들어가기 전에 털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 그러다 하녀장님이 경을 치실라.”
“네, 알겠습니다!”
‘됐다.’
정원사가 델리나를 하녀로 인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의 델리나가 쓴 능력은 자신의 얼굴을 평범하게 인식시켜 주는 키워드였으니까.
얼굴 인상이 흐릿해지고 입은 옷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니, 하녀복을 입고 있는 델리나는 남들의 눈에 그저 지나가는 하녀 1 정도로만 보였다.
‘가 볼까, 그러면.’
델리나는 정원을 지나 다시 복도를 걸었다. 델리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목적지는 바로 황궁의 응접실이었다.
‘저기다.’
황궁에 몇 번 드나든 적이 있었기에 응접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게 닫힌 응접실의 문을 보며 델리나는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최대한 하녀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델리나가 안으로 들어서자 데미안과 셀린이 앉아 있었다. 둘의 시선이 쏠리자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자리는 편하신지 살피러 왔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이제 막 대화를 시작한 듯 앞에 놓인 다과들은 한 입도 먹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자 셀린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기 다과들 좀 치워 줄래? 어차피 안 먹을 거라서.”
“알겠습니다.”
델리나는 조심조심 두 사람에게 다가가 앞에 있는 차와 과자를 치웠다. 최대한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델리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루넨 제국의 황자님을 뵐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는 셀린 울피림이라고 합니다.”
“예, 저도 대공녀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데미안 루넨입니다.”
아직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너무도 빠르게 찾아왔나 싶어 델리나는 더더욱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계속 형식적인 이야기만 오갔다.
‘역시, 하녀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건가?’
“치웠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차나 과자를 천천히 치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수확을 얻지 못한 델리나가 다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왔다.
‘안 들리잖아.’
응접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델리나는 문에 귀를 바짝 대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황궁 응접실의 완벽한 방음이 원망스러웠다.
‘맞다. 바깥에 창문 하나가 있었지. 2층이기는 해도 어떻게 잘 올라가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면 또 중간에 실수인 척하고 안에 들어가 볼까?’
응접실 대화를 듣기 위해 델리나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릴 때였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웬 남자가 델리나를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너,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네?”
남자의 반응에 놀란 델리나가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남자는 델리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오늘 황태손 전하께서 일찍 잠자리에 드신다는 걸 전달 못 받은 거야? 그런데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자, 얼른얼른 움직여!”
“그게 무슨…… 제가 왜 황태손 전하를……?”
계속되는 남자의 재촉에 당황하던 델리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제 왼쪽 가슴 위에 작게 수놓아진, 황금 태양 자수를 말이다.
‘베티이이이!’
하녀복 위로 수놓인 태양 자수에 델리나가 속으로 베티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황궁 하녀복을 부탁했더니, 잘 만들어도 너무 잘 만들어 버린 베티였다. 그것도 무려 황족 담당 하녀복을.
“얼른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여! 요즘 황태손 전하께서 많이 피곤해하시는 건 알고 있지? 그러니까 실수 안 하도록 더 조심하고!”
“잠시, 잠시만요. 그러니까, 저는…….”
여전히 굳게 닫힌 응접실의 문과 저를 재촉하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델리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남자를 제치고 도망가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범녀 사용의 능력 제한 때문이었다.
능력 제한 하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할 시 능력이 풀린다.
이대로 도망갔다가는 능력이 풀려서 사방팔방에 맨얼굴을 드러내게 될 터였다. 결국 델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 어서 따라와.”
그렇게 억지로 이끌리다시피 하며, 델리나는 남자를 털레털레 따라갔다.
* * *
아슈드의 방이 있는 복도는 사용인 하나 없이 고요했다. 오직 저 멀리서 나타난 아슈드의 발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전부 끝났습니다, 전하.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그 외에 특별한 사항은?”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사항은……. 아, 루넨 황자님에 대한 건은 있습니다.”
“그게 뭔데?”
보좌관의 말에 아슈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데미안에 관한 건은 빠짐없이 보고하라 해 놓은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다.
“최근에 그분이 루넨의 황녀님과 함께 로즈립 후작가 모임에 갔는데, 그곳에서 공개 구혼을 했다고 합니다.”
“뭐?”
“상대는 플로렌 영애라고 했습니다.”
“뭐???”
공개 구혼, 그것도 상대가 델리나라는 말에 아슈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마에 힘줄이 잔뜩 돋아난 상태였지만 애써 감정을 다스리듯 아슈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이후엔 어떻게 됐는데. 설마, 받아 준 건?”
“아뇨. 그러고서 플로렌 영애가 바로 황자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데리고 나가다니 그건 또 무슨…….”
이해할 수 없는 결말에 아슈드가 답답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아슈드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 우뚝 서서 빠르게 물었다.
“그 새…… 황자는 지금 뭐 하고 있지?”
“약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대는 울피림 대공녀입니다.”
셀린에 대한 이야기는 아슈드도 이미 들은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아슈드에게는 셀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마 다른 영애는? 그 외에는 없었고? 혹시 플로렌 영애를 만나거나?”
“아뇨, 제가 알기로는 울피림 대공녀 한 분만 만나고 계십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아슈드의 반응에 보좌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착실하게 아는 것을 다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썹을 치켜올린 아슈드가 곧 입을 열었다.
“그 후작가 모임에 디아몬 공자나 엘피샤 영식은 없었나?”
“듣기로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꼴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지…….”
“예?”
“됐어. 이만 쉴 테니까 가 봐.”
“아, 알겠습니다.”
제 주인의 중얼거림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도, 곧장 방문을 열어 주는 보좌관이었다.
“그러면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전하?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방 안을 본 아슈드는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보좌관이 의아한 얼굴로 방 안을 쳐다봤다. 동시에 아슈드는 방에 있는, 고개를 아주 깊숙이 숙인 채 서 있는 하녀 하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