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내가 이 사람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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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내가 이 사람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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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내가 이 사람 좋아하나?
2023.08.15.
“뭐라고요?”
그 말에 경악한 실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델리나가 손을 몇 번 흔들자 손안에 있던 목걸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동시에 델리나의 손에서는 꽃가루들이 흩뿌려졌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꽃가루를 바라보았다.
“목걸이가!”
정말로 목걸이가 사라지자 패닉에 빠진 듯 실비아가 외쳤다.
“목걸이, 목걸이는 어디 갔죠?”
“말했잖아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공연이라고요. 그래서 사라졌는데요.”
“그게 어떤 목걸이인데……! 지금 그걸 없애신 거예요?”
이제는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는지 실비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을 의식한 듯 곧 정신을 다잡고 실비아가 물었다.
“……물론 다시 나타나게 하실 수 있으신 거죠?”
“글쎄요. 애초에 이건 사라지게 하는 거라 도로 나타나게 하는 게 무척 어려워서…….”
간절해 보이는 실비아의 눈을 보며 델리나는 부러 뜸을 들인 채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영애께서 간곡히 부탁하신다면, 제가 한 번 힘써 볼게요.”
“부탁을요? 제가 영애한테?”
생각만으로도 어이가 없는지 헛숨을 내뱉던 실비아가 곧 제 처지를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영애. 목걸이를 다시 나타나게 해 주세요.”
부탁하면서도 실비아의 양손은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델리나가 빙긋 웃었다.
“영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러면 한번 시도해 볼까요?”
동시에 델리나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사람들이 모두 델리나의 손에 집중했지만 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델리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어머, 목걸이가 다른 곳에 생겨나 버렸네요.”
델리나의 시선을 따라 실비아가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 보석이가 앉아 있었다. 목에 목걸이를 건 채.
“끽끽!”
목걸이를 흔들며 웃던 보석이는 그대로 창문 바깥으로 질주했다. 실비아가 다급히 외쳤다.
“안 돼! 어머니가 보시면……! 기사들, 기사들 어디 있어! 당장 잡아!”
보아하니 후작 부인 몰래 차고 온 듯했다. 기사들을 보내고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실비아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고생깨나 할 거다.’
보석이에게는 대충 신호를 보냈으니 알아서 잘 골리다가 돌려줄 것이다. 달려 나가는 실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델리나가 고개를 돌려 주변 영애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제 공연 더 보고 싶으신 분들 있으실까요?”
“…….”
그 말에 약속이나 한 듯 영애들이 자기 장신구들을 꽉 붙잡고 델리나의 시선을 피했다. 델리나의 어깨가 으쓱였다.
“이런, 없으신가 보네요. 그러면 아쉽지만 이만 공연을 끝내도록 할게요.”
상황이 이리되고, 모임의 주최자인 실비아가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작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정말 대단하세요.”
손뼉을 치는 주인공은 바로 메이린이었다.
“정말 목걸이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네요? 귀여운 원숭이도 그렇고, 너무 잘 봤어요.”
정말로 델리나의 공연이 신기했던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메이린의 순수한 감탄에, 눈치를 보던 영애 영식들도 다 함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감사합니다, 황녀님.”
때아닌 박수 세례에 델리나도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오빠도 그렇지? 너무 신기하잖아.”
“……그러게.”
메이린과 달리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데미안 역시 델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델리나에게 걸음을 옮겼다.
“……?”
난데없이 다가온 데미안에게 델리나가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델리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연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예?”
“저랑 약혼해 주십시오.”
“예???”
데미안의 손바닥 위로는 한 쌍의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데미안의 청혼에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 * *
“아가씨. 혹시라도, 정말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황자와 단둘이 만날 일이 생긴다면 이것만은 명심해 주세요.”
루넨 제국에서 약혼장이 날아온 날 펠릭이 말했다.
“절대로 무엇을 마시거나 먹거나 하시지도 마시고요. 밀폐된 공간에서 만나지도 말아 주세요. 너무 가까이 접촉도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습니까?”
“알겠어. 알겠는데…… 그 정도까지야?”
루넨 황실과 울피림 대공가 사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퍽 진지한 펠릭의 얼굴에 델리나가 물었다.
“혹시 아가씨는 루넨 제국이 무엇으로 유명한 곳인지 아십니까?”
“그건 알지. 다양한 식물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잖아. 아예 루넨 제국에서만 자라나는 식물들도 있고.”
“예. 문제는 너무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나머지 저희가 모르는 미지의 식물들도 많다는 점입니다. 해서 정체 모를 약들도 루넨 제국에는 무척 많습니다.”
펠릭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그러니까, 거기서 아가씨한테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약 같은 걸 먹거나 맡게 해서, 어? 내가 이 사람 좋아하나? 이렇게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단둘이 계시는 상황이 생기면 제 말을 기억해 주세요, 아가씨.”
“아, 응. 그럴게.”
“물론 전 아가씨의 높은 안목을 믿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전하나 저의 얼굴을 많이 보셨으니까요. 그런 황자한테 두근거리실 분은 아니시죠. 그래도 제 말 명심해 주세요, 아가씨.”
“응, 응. 전하 뒤에 이상한 게 슬쩍 껴 있는 것 같긴 한데, 명심할게. 아예 같이 있지도 않을게.”
그렇게 펠릭과 굳게 약속한 델리나였지만,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데미안을 보니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충격과 공포의 프러포즈 사건 탓에, 도저히 모임 장소에 더 있을 수가 없었기에.
‘일단 탁 트인 실외니까 괜찮겠지.’
델리나는 후작가 정원의 어느 한구석에 데미안과 자리를 잡았다. 데미안을 끌고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충격에 사로잡힌 듯 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델리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목걸이가 아니라 데미안을 사라지게 했어야 했나 싶었다. 여전히 조금 전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델리나가 황당한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말했지 않습니까. 첫눈에 반했다고.”
“이제 그런 공손한 어투 말고…….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좀 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첫눈에 반했다는 사람치고 마치 책을 읽듯 평이한 어조였다. 델리나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사람을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 것도 데카르와 꼭 닮았다.
“일전에 대공가로 보내신 편지는 받았어요. 저와 결혼하고 싶으시다고요.”
“…….”
“하지만 황자님과 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요. 황자님이 저를 보신 적도 없고요. 정말 스스로의 의지로 편지를 보내신 것 맞나요? 소문만 듣고 저한테 반해서?”
그 말에 데미안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델리나의 시선을 피했다.
“……폐하께 영애의 이야기를 들었지. 헬리움 제국에 무척 데려오고 싶은 영애가 있다고.”
‘데려오는 게 아니라 납치겠지.’
이 정도면 수치스러움에 못 견뎌 헬리움 제국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말을 들으며 델리나는 더더욱 확신했다. 난데없는 외모 칭찬이나 공개 프러포즈 또한, 데미안의 의지가 아님을.
“그분이 시키신 거죠? 저를 데려오라고.”
“…….”
“아예 결혼을 시켜서 루넨 제국에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거고요.”
일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데미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나한테는 형제들이 엄청나게 많았었지. 그런데 지금은 없고.”
“예?”
난데없는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델리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전부 다 죽였거든.”
“…….”
“그 사람이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황족의 피를 가진 이들을 모조리 죽였어. 어리고 나이 들고 할 것 없이 전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데미안의 얼굴은 담담했다. 하지만 델리나는 눈치챘다. 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전부 죽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나랑 메이린이었어.”
채 식지 않은 핏방울을 칼에서 뚝뚝 흘리며, 데카르는 구석에 웅크려 떨고 있던 데미안과 메이린에게 다가갔다고 했다. 둘을 본 데카르는, 미소 지었다고 했다.
[너희, 나이가 열두 살이라고 했었나?]
[…….]
[딱이네, 딱이야.]
그것은 데카르가 헬리움 제국에서의 탄신제를 마치고 돌아왔을, 그때였다고 했다. 그리고 데미안과 메이린은 황족의 핏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들이 되었다.
“그럼 그 사람이 황자님을 살려 둔 건…….”
“나도 처음에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얼마 후에 알게 됐지. 영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한테 약혼을 청하기 위해서인 거야. 단순히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두 사람을 살려 둔 거고.’
하기야 재미로 사람들 납치하고 죽이는 판국에, 살리는 정도야 그에게는 일도 아닐 테다. 하지만 그 정도로 데카르가 제게 집착하고 있다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움찔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