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결혼하게 되면 꼭 와
(6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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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결혼하게 되면 꼭 와
2023.08.02.
칼릭스의 얼굴을 본 델리나가 천천히 단검을 쥔 손을 내렸다. 놀란 델리나와 달리 상대가 델리나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칼릭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뭐야, 언제 돌아왔어?”
“방금.”
“……그런데 왜 부엌에서 그러고 있는 건데?”
“배고파서.”
달빛에 부엌이 좀 더 환해지자 칼릭스 앞에 놓인 빈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델리나가 황당한 듯 접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걸 다 먹었어?”
칼릭스 옆에는 족히 케이크 한 판은 되어 보이는 접시와 쿠키 부스러기가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든 델리나는 제 디저트가 있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야식…….’
나중에 커서 열 접시 먹자며 약속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제는 열 접시도 모자라 스무 접시는 거뜬히 먹는 덩치로 자란 칼릭스였다. 델리나의 허망한 표정을 본 칼릭스가 재료들을 꺼내 들었다.
“뭐 하려고?”
“야식 만들어 줄게.”
델리나의 몫까지 다 먹었다는 자각은 있는지 칼릭스가 익숙한 듯 계란을 깨기 시작했다. 델리나가 칼릭스 곁으로 가 그 모습을 구경했다.
‘참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검을 무섭게 휘두르다던 이가 이렇게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한 건 사실이었다. 델리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칼릭스는 눈을 빛내며 디저트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서 또 디저트 만든 거야?”
“응.”
눈보라가 치는 설원에는 당연히 디저트 가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릭스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된다.
눈보라 치는 설원에서 무거운 밀가루 포대와 설탕 포대를 스스로 날랐다는 소리에 델리나는 칼릭스가 얼마나 디저트에 진심인가를 깨달았다. 디저트를 향한 열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칼릭스 또한 만날 때마다 몇 뼘씩 자라 있었다. 물론 근육도 함께.
‘기사들은 알까, 저 근육을 설원 한복판에서 포대 나르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칼릭스를 칭송하는 기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꽤 재밌을 것 같았다. 델리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칼릭스는 그저 성난 팔뚝으로 열심히 머랭을 쳤다.
“잘 나왔네.”
순식간에 칼릭스의 손에서 머랭 쿠키가 탄생했다. 달콤한 냄새에 홀린 듯 델리나가 다가가자 먹으라는 듯 칼릭스가 접시를 가까이 내밀었다.
“실력이 더 늘었는데?”
검술보다 디저트 만드는 실력이 더 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칼릭스의 요리 실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델리나는 머랭 쿠키를 집어 먹으며 인정했다. 그 말에 내심 뿌듯한 듯 칼릭스가 눈을 빛냈다.
“맞아. 그러면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야?”
“응.”
그제야 델리나가 묻자 머랭 쿠키를 먹던 칼릭스가 답했다.
“하긴 성년식 전까지만 훈련하고 온댔으니까, 거의 꽉 채워서 훈련받기는 했네. 그러면 너도 성년식 가지?”
벨리온과 마찬가지로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는 칼릭스였다. 그랬기에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넌 가?”
“난 가지.”
“…….”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사교계에 아예 발을 끊을 게 아닌 이상은, 얼굴을 한 번쯤 비치는 게 좋을걸.”
울피림 대공가가 대대로 폐쇄적인 성향이긴 했지만, 그래도 칼릭스는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면 또래 영식 영애들도 있을 테고……. 그리고 혹시 또 알아? 거기서 마음에 드는 영애를 만나서 결혼하게 될지. 아, 아니면 너도 나처럼 약혼장이 올지도 모르겠네.”
부정적인 소문들이야 여전했지만, 그래도 대공가이니만큼 약혼장을 보내는 가문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칼릭스는 제 약혼이니 결혼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다른 말에 놀란 얼굴을 했다.
“너 결혼해?”
“아니. 그냥 약혼장만 온 거고, 만나 보지도 않았어.”
극단적인 칼릭스의 말에 델리나가 키득거렸다.
“음, 그래도 결혼하게 되면 대공가는 떠나겠네.”
“…….”
“내 결혼식에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할게. 와서 축하해 줄 거지? 내가 특별히 너 좋아하는 디저트으우읍.”
칼릭스가 가장 큰 머랭 쿠키를 입 안에 넣는 바람에 델리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이애?”
“많이 먹어.”
얼결에 머랭 쿠키를 씹는 델리나의 앞에서, 칼릭스는 많이 먹으라 답할 뿐이었다. 그 말에 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쿠키를 우물거렸다.
* * *
“어우, 달아…….”
전날 제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자꾸 머랭 쿠키를 입에 넣는 칼릭스 때문에 델리나는 거대한 접시에 담긴 쿠키를 해치우고 말았다. 입 안이 아직도 단 것 같아서 델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분간은 디저트를 안 봐도 될 지경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에스텔이 델리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제 칼릭스랑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자꾸 차만 마시게 되네요.”
“그래? 그렇다면 좋은 게 있지!”
그렇게 말한 에스텔이 수많은 약병을 뒤적이다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새로 개발한 건데, 일주일 전에 먹은 것까지 한 번에 소화시켜 주는 약이거든. 한번 먹어 볼래?”
“단 걸 많이 먹은 거지 체한 건 아니라서요. 괜찮을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러면 이건? 몇 방울만 혀에 떨어트리면 하루 정도 미각을 마비시키는 거거든. 단 거 많이 먹고 싶을 때 써도 좋은데.”
“……그렇게까지 먹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신이 난 듯 이리저리 약병들을 늘어놓는 에스텔을 보며 델리나가 익숙한 듯 대꾸했다.
“이번에도 신제품 출시했다면서요?”
“응. 맞아. 너도 봤어? 색깔이 바뀌는 약물?”
“네. 보지는 않았는데 듣기는 들었어요. 처음에는 물처럼 투명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색으로 변한다면서요?”
“맞아. 사실 이건 비밀인데 이건 내가 영애였던 시절에 이미 개발해 놓은 거야.”
“그랬어요?”
“어디 사교 모임에서 자리 피할 때 좋았거든. 모임 시작 전에 드레스에 부어 놓고 시간이 지나면? 드레스에 와인이 쏟았다는 핑계를 대고 자연스럽게 휴게실로 대피할 수 있지!”
참 에스텔다운 발상이었다.
“어때? 델리나 너도 하나 줄까? 피하고 싶은 사교 모임에서 유용하게 쓰일 텐데.”
“필요가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요. 구매할 테니까 대공가로 몇 개만 보내 주시겠어요?”
“에이, 우리 사이에 구매는 무슨. 그냥 가져가. 다른 것도 가져가도 좋고.”
에스텔이 밝게 웃으며 델리나에게 약병을 한 아름 건네주었고 델리나도 웃으며 그것들을 받았다. 후작가는 여러 번 방문했지만 아무리 봐도 발명품에 대한 에스텔의 열정은 남달랐다.
“맞다. 오늘도 총 봐 달라고 온 거야? 어디 이상이라도 생겼어?”
“네. 그것도 있는데요.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래? 뭔데?”
“저기……, 후작님도 예전에 약혼장 같은 거 받아 보셨지요?”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같은 여자인 에스텔에게 상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에스텔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약혼장? 당연히 왔었지. 아무래도 그때 나는 후작가 후계자였으니까, 데릴사위로 들어오려는 가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서인지 타 제국이나 왕국에서도 왔었어.”
에스텔이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델리나는 그 수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대륙 내에서도 유명한 엘피샤 후작 가문의 영애였기에.
“생각해 보니까 당시 제국에서 이름난 가문들은 다 보냈었네. 아니다. 안 보낸 곳도 있구나.”
“어딘데요?”
“울피림 대공가랑 디아몬 공작가.”
“아, 거긴…… 애초에 후작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에스텔이 약혼 편지보다 약병을 포장할 종이를 더 좋아하리라는 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델리나도 벌써 결혼을 생각할 나이인가? 하긴 이제 성년식도 치르는데.”
“네. 저도 얼마 전에 약혼장 받고서 좀 놀랐어요. 제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고요.”
“하긴. 델리나 너도 정말 많이 컸지. 그런데 어쩌지? 아무래도 나도 그런 거에 관심을 별로 안 두다 보니까 잘 아는 게 없어서.”
에스텔이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 보고 그래 봐.”
“…….”
“그래도 벨리온이 흐뭇해하겠는데? 네가 벌써 이런 나이가 되었다고.”
“전하가요?”
“그럼. 벨리온이 널 얼마나 딸같이 예뻐하는데.”
“딸은요. 애초에 전하랑 저는 후원자 사이인데요.”
에스텔의 말에 델리나가 거세게 부정했다.
“물론 전하께서 저를 위해 주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딸은…… 또 다른 일이니까요.”
셀린.
지난 몇 년간을 대공가에 머무르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제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공가에 셀린이 나타날 그때가.
“참, 맞다. 혹시 총에 다른 색을 입혀도 괜찮을까요? 이게 오래 쓰다 보니까 칠이 벗겨지는 것 같아서요.”
델리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응. 상관없을걸? 그냥 색만 입히는 거니까. 아니면 총 전용으로 색을 입히는 약이 있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이것도 한번 연구해 봐야겠는데.”
반센트가 무기류 쪽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면, 약물 쪽으로는 단연 에스텔이 우위였다. 하지만 에스텔도 총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기에, 이따금 델리나의 총 상태를 봐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안 봐 줘도 될 것 같긴 하네.”
“네?”
“아무래도 원래 만든 사람을 따라가지는 못할 테니까.”
에스텔의 의미심장한 말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혹시…….”
“맞아. 오늘 아침에 도착했거든. 슬슬 애가 깨어날 때가 되긴 했는데.”
에스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델리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