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혹시 이상형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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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혹시 이상형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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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혹시 이상형 있어?
2023.08.01.
“아가씨께 약혼장이 왔답니다.”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 대신 펠릭이 답했다. 그러자 벨리온의 시선이 베티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로 쏠렸다.
“저기 있는 것들 전부 다?”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혹시 또 모릅니다. 더 올 수 있을지도요.”
신이 나 이야기하는 펠릭과 달리 벨리온은 말없이 편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델리나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아직 어쩔지는 생각 못 해 봤어요. 그래도 답장은 보내 줘야 하니까 편지를 갖고 온 거고요.”
“에이, 아가씨. 이런 것들도 다 좋은 경험이 될 텐데요. 마음에 드시는 분이 있으면 한번 만나 보셔도…… 악!”
그 순간 펠릭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끙끙대기 시작한 펠릭을 모른 체하며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만날 거면 여기서 만나.”
“대공가에서요?”
“그래.”
“……어떤 의미로는 마음을 확인하기 참 좋겠는데요.”
대공가까지 와서 저를 만날 정도의 사람이라면, 못해도 저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는 알 것 같았다. 델리나가 어색하게 웃었고 제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던 펠릭은 베티에 의해 조용히 뒤로 질질 끌려 나갔다.
“참, 이번 성년식 때 같이 가시나요?”
“넌 가나?”
“그럼요. 그러면 저 없이 가려고 하셨어요?”
당연하다는 듯 델리나가 말했지만 벨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별일 없는 이상 저는 가야죠. 에일리랑 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고요.”
이번에야말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는 에일리였다. 에일리가 이번만큼은 너도 꼭 와야 한다며 성화를 부렸기에, 델리나도 참석할 생각이었다.
“너무 무리해서 가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 성년식에는 영애 영식들만 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대공가와 황실의 관계가 여전한 것을 아는 델리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곧 벨리온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가.”
그러고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성년식은 영식들도 오지.”
“그렇죠.”
“같이 춤도 추고.”
“그렇죠……?”
참 당연한 소리를 하는 벨리온을, 델리나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춤출 때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도록 호신술을 배워 둬야겠군.”
“……춤출 때 그게 왜 필요한데요?”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춤출 때요? 그것도 황궁 한복판에?”
“암살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암살을 하는 법이지.”
“아, 예…….”
이러다 케이크를 먹을 때 쓸 수 있는 호신술이나 하품할 때 유용한 호신술도 알려 줄 것 같았다. 델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벨리온은 진지했다.
* *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델리나의 손에 있던 목검이 크게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훈련장 한구석에 떨어진 목검을 본 델리나가 지친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힘들어하는 델리나와 달리 베티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목검을 내려놓았다. 델리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베티를 향해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진짜, 항상 느끼지만…… 대단해, 베티.”
“아가씨도 실력이 많이 느셨습니다.”
훈련받기로 결심한 이후, 델리나는 벨리온뿐만 아니라 펠릭이나 베티에게도 다양한 훈련들을 받아 왔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장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베티에게조차 상대가 안 되는 델리나였다.
“이 정도면 다가오는 영식 세 명 정도는 가뿐히 제압할 수 있으실 겁니다.”
도대체 왜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제압할 수 있는 영식의 수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델리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티가 조용히 무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편지는 책상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아, 고마워.”
‘약혼장…….’
잠시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델리나가 불쑥 물었다.
“베티는 혹시 이상형 있어?”
“…….”
“아, 없으면 말 안 해도 돼.”
“있습니다.”
“그래?”
그 말에 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잘 웃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구나. 잘 웃는 사람……. 역시 다들 이상형이 있는 걸까?”
“약혼장 때문에 그러십니까?”
갑작스레 제게 이상형을 묻는 이유를 파악하듯 베티가 물었다. 델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확실히 이런 것들이 날아오니까 이래저래 좀 신기해서.”
사랑.
애당초 결혼은커녕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힘들었던 지난 삶에서, 이상형이니 좋아하는 영식이니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다. 델리나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나?’
어린아이 시절에 몇몇 영식들에게 호감을 가져 본 적은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이제 막 약혼장을 받은 것뿐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델리나의 마음을 눈치챈 듯 베티가 말했다.
“게다가 막상 마음에 드시는 분은 이상형과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상형이 될지도 모르고요.”
어딘지 한결 부드러워진 베티의 얼굴을 델리나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베티가 물었다.
“훈련장은 더 쓰실 예정이십니까?”
“아, 응. 여기서 좀 더 쉬다가 갈게. 먼저 가도 돼.”
“예, 들어가 보겠습니다.”
돌아서서 훈련장을 나서는 베티를, 델리나는 한참이나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정도 표정을 지을 정도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베티 주변에 잘 웃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델리나의 머릿속으로 순간 너무도 강렬한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장난 어린 미소를 짓는 한 남자가.
“설마 펠……. 에이, 설마. 그럴 리 없어.”
저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내뱉을 뻔한 델리나가 빠르게 부정했다. 그러다가 델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이상형이니 뭐니 하는 것 보다 남아 있는 다른 문제들이 더 신경 쓰였다.
‘확실히 성장하기는 했지. 검술이라든가.’
델리나가 단검 하나를 던지자, 단검은 정확히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능력도 많이 연습했고.’
델리나는 창을 열어 제 앞에 즐비한 키워드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간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각종 키워드들의 능력을 실험하고 연구한 델리나였다.
하지만 이를 연구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능력이 계속 있다는 것은, 흑막과 관련한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렇지. 아직 전쟁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르는 거고, 아직 황제 자리에 아슈드가 오른 것도 아닌 데다가, 다른 아이들 또한 작위를 승계받지도 않았고…….’
이런저런 일을 고민하던 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고파.”
일단 뭐라도 좀 먹어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한참을 움직였더니 허기가 졌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밖은 캄캄했다.
“야식이나 먹을까?”
훈련만 했다 하면 배고파하는 델리나 덕분에, 부엌에는 늘 그녀를 위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델리나는 빠르게 훈련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오늘은 뭐가 있을까. 타르트? 아니지. 그건 어저께 먹었으니까 오늘은 케이크려나?’
사용인들마저 모습을 감춘 밤의 복도는 적막감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델리나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늘의 야식 메뉴가 무엇인지 맞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케이크면 딸기가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복숭아라거나……. 응?’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델리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델리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주 작은 기척이었지만, 부엌에 누군가가 있었다.
“…….”
곧 델리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시간에 사용인들은 부엌에 있을 리 없었다. 또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어두운 가운데 있지 않을 것이었다.
‘암살자?’
대공가에 암살자 한둘 오는 것쯤이야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택 안까지 침투한 것은 무척 드문 일이기에 델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암살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갈 수가 없었다.
‘기회는 딱 한 번이야. 문을 열고서 바로 급소를 찌른 다음에 제압을…….’
단검을 꽉 잡은 델리나가 잠시 숨을 고르고 빠르게 부엌문을 열었다.
“!”
누군가 있다는 델리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어둠 속에 서 있는 거대한 인영을 발견한 델리나는 지체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델리나가 단검을 위로 올리며 그를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
빠르게 몸을 돌린 인영이 손에 든 무기로 델리나의 단검을 막았다. 그런데 그가 든 무기가 공격용 칼이 아닌 것 같아서 델리나가 남자의 무기를 바라보았다.
‘버터나이프?’
암살자의 손에는 몹시 앙증맞은 크기의 버터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심지어 그에게서 무척 달콤한 향이 났다.
‘……부엌에 뭐 먹으러 들어오는 암살자도 있나?’
당황한 델리나의 사고 회로가 꼬이던 찰나였다. 구름에 가리어져 있던 달빛이 부엌 안을 환히 밝히기 시작했고…….
“!”
서서히 드러나는 암살자의 붉은 눈동자에, 델리나가 외쳤다.
“칼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