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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저도 데려가 주세요 (64/94)


64화 저도 데려가 주세요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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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었네?”

먼저 반응하는 사람은 에스텔이었다. 그녀의 말에 덩달아 델리나도 위를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반센트가 서 있었다.

“반센트!”

델리나가 반가운 얼굴로 환히 웃었다. 에스텔의 말처럼 자다 일어났는지 반센트가 잔뜩 졸린 눈을 하고 델리나를 내려다봤다.

“뭐야, 반센트. 어디 나가는 거야? 무슨 일로 집에서 그렇게 옷까지 차려입었어? 머리도 손질하고?”

“고친다는 게 이거지.”

에스텔의 해맑은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 반센트가 냉큼 총을 집어 들었다. 작게 하품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빠르게 총을 살피고 있었다.

“오래 써서 좀 낡은 부분이 있네. 부품만 갈아 끼우면 되겠어.”

“그래?”

“지금 고치지 뭐.”

반센트가 총을 가지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에스텔이 얼른 가 보라는 듯 손짓했고, 델리나는 에스텔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반센트 뒤를 따라갔다.

“자고 있었어?”

“마차에서 꼬박 밤새우고 아침에 도착했으니까.”

“너 또 실험하고 싶은 거 있어서 그거 생각하다가 못 잔 거지?”

“응.”

‘하여간에…….’

그 누구보다 실험과 발명에 열정적인 반센트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도착한 반센트가 문을 열었다. 거대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각종 실험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갈수록 실험실 규모가 커지는 것 같은데.”

“집에서 실험할 시간이 많이 생겼으니까. 아카데미도 다 정리했고.”

“아. 나도 후작님한테 들었어. 듣기로는 그곳 아카데미 교수님들이 어떻게든 너 잡는다고 난리였다며?”

반센트가 교수 과정을 밟기 위해 아카데미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무시했던 교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센트를 아카데미에 두기 위해 그 누구보다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다.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인데다 모자라 그곳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섭렵했다고 했으니, 사실상 아카데미의 모든 자료가 반센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셈이었다.

“하도 달라붙길래, 실험하고 있던 거 몇 개 던져 주고 왔지.”

“그 정도로 교수님들이 물러나?”

“작위 물려받는다고 가는 건데, 누가 말려.”

하긴.

애초에 엘피샤 후작가의 후계자인 반센트를 대놓고 말릴 수는 없을 터였다. 답답한 교수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려 주듯, 책상 위에는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설마 이거 전부 아카데미 교수님들이 보낸 거야?”

“그렇긴 한데, 그건 전부 약혼장.”

“진짜?”

“대놓고 못 말리니까, 자기 딸들이랑 엮어 보려는 심산이겠지.”

척 보기에도 상당한 양의 편지에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몇 개 온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반센트가 받은 편지로는 탑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나랑은 다르게 대단하긴 하다. 벌써 이 정도라니.”

그 말에 총을 해제하던 반센트의 손길이 뚝 멈췄다. 순간 흐르는 침묵에 델리나가 편지에서 눈을 떼고 반센트를 쳐다봤다. 반센트는 델리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왜?”

“너도 약혼장 왔어?”

“응. 몇 개 왔더라고.”

“어디서.”

“후작가에서도 왔고, 백작가에서도 왔고……. 전부 얼굴만 몇 번 본 영식들이라서 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거기서만 왔어?”

“응.”

“그래.”

그 말에 반센트가 다시 총 수리에 집중했다. 잠깐 반센트가 총을 수리하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 델리나는 공중에 떠 있는 작은 과녁들을 발견했다.

“뭐야, 저건? 새로 만든 거야?”

“공중 과녁. 근데 기능이 더 있어.”

반센트가 손잡이 같은 것을 당기자, 공중에 매달려 있던 크고 작은 과녁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센트가 델리나에게 다가와 수리된 총을 손에 쥐여 주었다.

“실전에서는 목표물이 움직일 거잖아.”

“……그건, 그렇지.”

과녁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델리나가 총을 제대로 쥐었다. 가장 큰 과녁부터 겨냥한 델리나는 거침이 없었다.

공중에 매달려 있던 과녁은 정확히 정중앙에 구멍이 뚫린 채 덜렁거렸다. 제법이라는 듯 반센트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지만, 정작 과녁을 명중시킨 델리나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뭐야, 이거? 소리가 엄청 안 나는데?”

귀를 찌르는 듯한 총소리에 귀마개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반센트가 수리해 준 총은 기존보다 훨씬 소리가 줄어 있었다.

“맞아. 소리도 안 나게 장치 하나 달아 뒀지.”

“…….”

“기존보다 무게가 더 무거워지긴 했는데, 조용하게 누구 하나 죽이기는 좋지.”

“딱히 암살은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이거 진짜 좋긴 좋은데?”

델리나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사이 반센트는 과녁을 멈춰 세웠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실력이 늘었는데.”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에도 반센트의 실험 정신은 여전했다. 가끔 후작가에 올 때마다 델리나를 불러 사격을 시켜 보곤 했으니까. 덕분에 델리나도 필사적으로 연습을 해야만 했다.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지?”

“응. 처음치고는 결과가 괜찮네.”

드물게 나오는 반센트의 칭찬에 델리나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반센트의 실험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대포.”

“대포?”

“아카데미에서 본 책에 있길래 책을 참고삼아 만들어 봤지.”

뭔가 총이 굉장히 거대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델리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저 거대한 입구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순간 이 실험실이 남아나지 못하리라는 걸.

“설마 여기서 쏘려는 건 아니지?”

“물론 대포알도 있긴 한데, 이건 안에 다른 게 있거든.”

“뭔데?”

“궁금하면 거기 서 있어 봐.”

그렇게 말한 반센트는 대포 근처로 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불안한 예감에 델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기, 생명에 지장 없는 건 맞지?”

“아마도.”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면…… 와악!”

델리나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포 입구에서 그물이 펼쳐지더니 델리나의 몸을 감쌌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델리나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물에 갇혀 바닥을 뒹굴었다.

“잘 잡히네.”

“뭐야, 이건?”

“대포알 대신 그물. 이걸로 멧돼지뿐만 아니라 사람도 잡을 수 있어.”

“……너도 너지만 아카데미도 대단하구나. 이런 자료도 있고.”

아카데미와 대포와 반센트에게 감탄하며 델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것도 무기겠네?”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의 그렇지.”

“하긴 크기를 보니까……. 그런데 여기에 혹시 사람도 들어갈 수 있어?”

“궁금해?”

“아니. 이제 안 궁금해. 이제 실험 끝! 끝이야!”

정말이지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반센트의 실험 정신에 델리나는 빠르게 그물 속에서 기어 나와 반센트와 멀어졌다. 그런 델리나를 보며 반센트가 피식 웃었다.

* * *

황궁에 가는 날은 대공가의 사용인들도 덩달아 분주해지는 날이었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 근처로 델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끽!”

“아냐. 오늘은 같이 못 가. 대신 젠이랑 같이 얌전히 있어, 알겠지?”

델리나의 외출에 자연스레 어깨에 올라탄 보석이었지만 델리나는 보석이를 들어 곁에 있던 젠에게 넘겨주었다.

“근데 진짜 같이 안 가려고?”

“응. 난 저택에서 기다릴게.”

“그래, 굳이 강제로 가자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럼 대신에 저기 좀 부탁할게.”

델리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펠릭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정말 저 없이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

“정말 놀러 가고자 하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롯이 전하의 보좌관으로서 전하 곁을 보필하기 위함이죠. 영식들과 춤추는 아가씨를 보실 전하의 얼굴을 기대하거나, 성년식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 가는 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인 예시에 델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펠릭의 기나긴 변명에도 벨리온은 단호했다.

“일도 많은데 어딜 가.”

“다녀와서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차하면 밤새우면서 일할 수도 있고요. 예? 전하!”

“가자, 광대.”

그러나 벨리온은 펠릭을 무시하고 델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난리 속에서 칼릭스도 모습을 드러냈다. 성년식에 간다고 한껏 차려입었음에도 여전히 얼굴만은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궁에 새로운 파티셰가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 소식 들었어?”

“!”

“분명 가서 먹어 보면 너도 좋아할걸. 그러니까 얼른 가자. 디저트 설명도 해 줄 테니까.”

새로운 디저트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칼릭스가 눈을 빛내면서 델리나를 붙잡았다.

“그럼 마차 같이 타.”

“그럴까?”

정문으로 서 있는 마차는 벨리온과 칼릭스의 것, 두 대였다. 칼릭스와 함께 그의 마차로 걸어가는데 벨리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광대.”

“네?”

“왜 거기로 가지?”

“칼릭스가 같이 마차 타고 싶어 해서요. 괜찮죠?”

항상 어디를 가든 벨리온과 함께 마차를 탔던 델리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칼릭스의 마차를 타겠다는 소리에 벨리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릭스랑은 한 번도 같이 타 본 적이 없고, 이따가 입장도 같이할 거라서 이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러던지.”

“네. 그러면 이따가 봬요!”

해맑게 인사한 델리나가 칼릭스의 마차로 쏙 들어갔다. 델리나를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던 칼릭스와 벨리온의 시선이 묘하게 얽혀 들었다. 이내 칼릭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벌써부터 이리 재밌는데…… 저런 걸 못 보고…….”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구경하고 있던 펠릭이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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