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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눈 삔 영식들한테서 온 약혼장 (61/94)


61화 눈 삔 영식들한테서 온 약혼장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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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집무실 벽 색은 붉은색이 낫지!”

“아니라니까, 오빠 눈은 장식이야? 누가 봐도 푸른색이 더 나은데!”

플로렌 백작가는 오늘도 평화로울 뻔했다. 집무실에 남매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사용인들은 익숙하다는 얼굴로 지나칠 뿐이었다.

“됐어. 애초에 내가 쓰는 집무실인데, 내가 마음대로 할 거야.”

“어디 한번 해 봐. 붉은색 벽에 둘러싸여서 서류 보다가 눈 한번 피곤해져 봐. 그제서야 동생 말 좀 들을걸, 그러고 후회하겠지.”

수천수만 번의 싸움 끝에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흘겨보다가 곧 조용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곧 기드온이 책상 위로 몇 개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됐으니까, 온 김에 이거나 가져가.”

“이게 뭔데?”

“눈 삔 영식들한테서 온 편지.”

“뭐? 왜 눈이 삐어?”

기드온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델리나가 편지 하나를 뜯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델리나 영애. 언제나 녹음이 푸르르고 햇살이 가득한 날에…… 생략하고.”

온갖 미사여구가 적힌 앞장을 대충 훑은 델리나가 바로 본론을 찾아갔다.

“해서 저희 루이블 백작가와 플로렌 백작가와의 결합은 분명 좋은 가문의 결합으로 남게 될 것이며, 더욱이 저와 영애의 만남 또한…… 잠깐, 뭐야 이거. 약혼 이야기야?”

그제야 제게 온 편지들의 정체를 파악한 델리나가 입을 벌렸다.

“근데 왜 눈이 삔 건데?”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러면 눈이 삔 거지.”

“진짜 내가 오빠한테 결투 편지 보내기 전에 그 입 다물어.”

살벌하게 경고한 델리나가 제 앞에 놓인 편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물론 편지가 올 수 있었다.

성인이 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약혼장이 익숙할 법도 했지만 델리나는 아니었다.

‘하긴. 이전에는 이런 편지는커녕 어느 늙은 노인한테 강제로 팔려 갈 뻔했으니까.’

다락방에 갇혀 있을 때에는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것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델리나는 편지들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물었다.

“오빠도 이런 거 왔어?”

“나도 오긴 왔지.”

기드온이 그렇게 대답하며 편지 몇 통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델리나가 바로 한마디 했다.

“제국에 눈 치료가 필요한 영애들이 많네.”

“뭐래. 안목들이 높은 거지.”

“……진짜 반박할 게 너무 많은데 더 말 안 할래.”

말하기도 지친다는 듯 델리나가 질색했다.

“그런데, 왜 대공가로 안 보내고 백작가로 보냈지?”

“왜겠냐. 무서워서겠지.”

“아, 하긴.”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대공가의 악명에 델리나가 바로 납득했다. 사교 모임만 갔다 하면, 델리나에게 날아드는 질문의 절반은 대공가와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개중에는 “대공 전하는 정말 생고기를 씹어서 드시나요?” 같은 것도 있었다.

“그분, 너 성년식 때도 오실 거 아니야.”

“아마 그러겠지?”

황궁에서 열리는 귀족 영식 영애들의 성년식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대상인 기드온과 델리나도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그러면 거기도 오나? 울피림 대공자.”

“아, 거긴…… 모르겠네. 그래도 성인식 전에 온다고는 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 나도.”

재능이 출중한 이들답게, 그들의 활약상은 숱하게 들려왔다. 물론 그들의 소문을 들으면서 델리나는 수시로 또 붉은 글자가 뜨지는 않을까 경계해야만 했다. 다행히 지난 몇 년 동안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그동안 붉은 글자가 떴으면…….’

각종 무기가 날아드는 무법 지대를 가거나, 눈 덮인 설원을 뒹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상만 해도 오싹해서 델리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지금 초상화가 도착했는데 걸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사용인 한 명이 액자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어, 그래. 걸어.”

기드온의 말에 사용인이 벽에 붙어 있던 루튼의 초상화를 떼고서 그 자리에 기드온의 초상화를 걸었다,

“……초상화 만들었구나.”

“어. 집무실에 작게 하나씩은 걸어 둬야 한대서.”

‘할아버지…….’

델리나는 사용인의 손에 옮겨져 가는 루튼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암만 과거로 돌아왔다 해도, 사람의 죽음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루튼은 또 한 번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마지막을 델리나와 기드온이 지켜보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편안한 얼굴로 가셨지.’

지난번과는 다르게 한결 편안한 얼굴로, 루튼은 델리나와 기드온의 얼굴을 한 번씩 쓰다듬고는 눈을 감았다. 그 점은 무척 다행이었다고, 델리나는 생각했다.

“화가한테 수고비 좀 더 얹어 주지 그랬어. 며칠을 오빠 얼굴만 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 이제 그냥 빨리 가라. 밑에 마차 안 기다려?”

델리나를 집무실에서 빨리 내보내고 싶은 듯 기드온이 창문 아래를 내다봤다. 그러다가 델리나에게 손짓했다.

“왜?”

“오늘 젠이랑 같이 왔다고 했나?”

“응. 근데 왜?”

혹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델리나가 급히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델리나의 시선을 눈치챈 듯, 정원에 서 있던 사내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를 향했다.

한눈에 봐도 일반 남성들보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는 델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를 따라 미소 지은 델리나도 손을 흔들었다.

“젠이 왜? 잘만 있구만.”

“쟤는 무슨 볼 때마다 한 뼘씩 커져 있어? 이젠 사람 크기도 아니네. 완전 곰이야. 곰.”

“곰이라니, 그래도 사람인데. 물론…… 남들보다 조금 더 크기는 하지만.”

“아무튼 밤에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해라. 사냥꾼들이 화살로 쏠 수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델리나보다도 작았던 젠은 언젠가부터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해마다 눈에 띄게 바뀌는 옷 치수에, 옷을 만들어 주는 하녀들이 항상 놀라워했었다.

“끽!”

“알았어. 갈게, 갈게.”

곧 젠의 어깨에 있던 보석이가 재촉하듯 소리치자, 델리나는 집무실을 나서 밑으로 내려갔다. 정문 앞에는 대공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젠. 오빠랑 집무실 벽 색깔로 열정적인 토론을 벌이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많이 기다렸어?”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델리나가 사과하자 젠이 웃으며 말했다. 젠을 올려다보던 델리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래, 많이 커지긴 했지. 힘도 어마어마해지고.’

대공가의 산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매번 젠은 각종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델리나 앞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젠은 점점 자랐고 그만큼 상처도 줄어들어 갔다.

“젠. 너 이제 그만 커.”

“응. 알았어.”

“그렇다고 진짜 응이라고 하면 어떡해.”

“응, 응.”

“하여간에…….”

여전히 뭐가 좋은지 웃고 있는 젠을 보면서 델리나가 피식 웃었다.

“얼른 가자.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가야지.”

몇 사람이 탈 수 있는 마차는 젠만 타도 꽉 차게 느껴졌다. 젠 맞은편에 앉은 델리나가 그의 스카프를 쳐다봤다.

“스카프는 계속 그거 쓸 거야? 내가 다른 걸로 바꿔 준다니까.”

“응. 난 이게 좋아.”

수십 차례 바뀐 옷과 달리 젠이 목에 두른 하늘색 스카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해졌는데도 젠은 그 스카프만을 고집했다.

“그래. 그래도 바꾸고 싶으면 언제든지 바꿔 달라고…….”

“끽끽!”

“너! 내가 마차 안에서는 얌전히 있으랬지!”

델리나의 말을 끊고 보석이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델리나가 보석이를 잡으려고 손을 막 움직이는데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젠이 입을 열었다.

“보석아. 가만히 있어야지.”

“……끽.”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난동을 부리다가도 젠의 한마디에 보석이는 고분고분 자리에 앉곤 했다.

“…….”

젠이 산에 오가기 시작한 이후로 보석이는 젠 앞에서 유달리 얌전해졌다. 젠이 산에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것을 보석이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리라, 델리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왜 그래, 델리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델리나 앞에서는 언제나 웃기만 하는 젠이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델리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얌전해진 보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오셨어요, 아가씨!”

“응.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밤에나 도착할 줄 알았더니.”

마차 소리를 들었는지 펠릭과 베티가 마중 나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델리나가 베티에게 품 안에 있던 편지들을 건네주었다.

“베티. 이것 좀 내 방에 놔 줄래?”

“알겠습니다.”

델리나의 손에 있던 여러 개의 편지를 본 펠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가씨. 혹시 그 편지들, 설마…….”

“아, 응. 내 앞으로 온 약혼장들.”

“역시, 그랬군요!”

펠릭이 감격한 얼굴로 격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 작던 아가씨가……! 대공가에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결혼할 나이가 되셔서 약혼장까지 다 오고…….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뭘 그 정도까지야, 아직 다 뜯어보지도 않았어.”

마치 내일 시집이라도 보내는 듯한 펠릭의 호들갑에 델리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누구한테 뭐가 왔다고?”

펠릭 뒤에서 벨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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