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죽는 게 나아
(53/94)
53화 죽는 게 나아
(53/94)
53화 죽는 게 나아
2023.07.23.
마차 안에는 말발굽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슈드는 제 손에 있는 단검을 가만히 쥐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날이 어둑해졌고 이어서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 마차를 덮쳤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는 아슈드의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
제법 시간이 지나자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낮추었다. 곧 마차가 섰고 아슈드가 내릴 문을 쳐다봤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음성이 들려오고 마차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아슈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눈앞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
아슈드가 내린 곳은 대공가 정문이 아니었다. 수풀이 무성하고 그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곧 말에서 내린 이들이 칼을 빼어 들고서 아슈드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하.”
누가 이런 일을 명했는지 물을 것도 없었다. 저를 에워싸는 이들을 보며 아슈드는 체념한 듯 단검을 든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내 시체는 완벽히 처리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가져가야 하는 건가?”
아슈드가 물었지만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칼을 꺼내어 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슈드가 중얼거렸다.
“그래, 여기는 대공가 영지 안이고, 날 이곳에서 죽인다면…….”
울피림 대공이 황태손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울 수 있었다. 대공가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아슈드는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는 도망칠 수 없을 듯한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
“내가 반항이라도 할까 봐 이렇게 막다른 곳까지 데려온 것 같은데…….”
아슈드가 단검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칼이 있었음에도 전혀 맞설 의지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럴 마음 없어. 그냥…… 죽여.”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슈드의 눈에는 생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자 서로 눈짓을 하던 이들이 하나둘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검을 들어 아슈드를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철벽남>
“……!”
아슈드에게 다가갔던 이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 나더니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곧 남자들 뒤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안 늦었다아아아!”
수풀을 가로지르며 델리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한 번 더 수풀이 요란스럽게 움직이더니 늑대 무리가 튀어 올랐다.
“고마워, 너희 덕분에 빨리 찾았어!”
숨을 헥헥 내쉬면서 델리나가 연신 늑대 무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갑자기 나타난 델리나와 늑대들을 보고 당황한 무리가 빠르게 늑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너…… 어떻게 여기에…….”
아슈드가 델리나를 보며 놀란 듯 입을 달싹이자, 델리나가 재빠르게 아슈드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오긴요. 하도 글자가 붉게 깜빡이니까…… 아니, 광대 기술로 알아냈지요!”
“…….”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빨리 도망쳐야 하니까.”
아슈드와 델리나를 보호하듯 늑대들이 이빨을 드러낸 채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델리나와 함께 온 것은 늑대들만이 아니었다.
“이야, 정말 아가씨 광대 기술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안 그래, 베티?”
“그렇습니다.”
곧 수풀 사이에서 펠릭과 베티가 나타났다. 각자 무기를 든 두 사람도 늑대들과 대치하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대충 상황 보니까 일단 황태손 전하께서는 여기 없으신 게 가장 좋을 것 같고요. 자, 아가씨. 얼른 전하 모시고 먼저 가세요.”
“그럼 두 사람은?”
“저희는 여기 무리랑 아주 진한 면담을 해야 해서요. 먼저 가시면 곧 처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델리나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괜찮다는 듯 베티가 덧붙였다.
“이 수풀만 지나면 기사들과 마차가 있습니다. 그걸 타고 가시면 됩니다.”
“응. 알겠어. 둘 다 조심해야 해. 알겠지?”
아슈드를 데려가면서도,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듯 델리나가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걱정 말라는 듯 펠릭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무리를 쳐다보며 베티에게 말했다.
“들었지, 조심하라는 아가씨 말?”
“예.”
“그래. 물론 지금의 널 보면 조심해야 할 쪽은 저쪽인 것 같기는 하지만.”
간만에 드는 무기에 흥분한 듯 베티의 손에 힘줄이 솟아 있었다. 그것을 보며 피식 웃던 펠릭이 당부했다.
“심문해야 하니까, 한 명은 살려 두는 거 잊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누구부터 덤빌래?”
그렇게 한바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델리나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슈드를 데리고 움직이던 델리나는, 곧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더 빨리 달리셔야…… 전하!”
조금 전까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밝은 달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델리나는 아슈드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왜, 왜 이게……. 설마 아까 전에…….”
빠르게 능력으로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슈드가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흥분하지 마. 그래도 급소를 맞은 건 아니니까.”
“그래도 계속 움직였다가는 출혈이 더 심해질 거예요.”
뭔가로 압박하거나 꿰매야 했다. 델리나가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아슈드가 기운이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됐으니까 나 두고 그냥 가.”
“네?”
“이대로 살아 봤자 내가 무슨 쓸모가 있는데.”
“…….”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나아.”
그렇게 말하는 아슈드의 눈은 아까와 같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아슈드를 놓지 않았다. 서서히 눈을 감는 아슈드에게 화가 난 듯 외쳤다.
“야! 정신 안 차릴래?”
“……뭐, 뭐?”
“왜! 어차피 죽을 거 반말 좀 해 봤다! 기껏 숨 가쁘게 구하러 왔더니, 사람 기운 빠지게 이런 소리가 하고 있고!”
델리나의 발언에 어이가 없는지 아슈드가 눈을 깜빡였다. 델리나가 온몸에 힘을 주며 아슈드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였다.
“황족으로 인정도 안 해? 그건 너네 할아버지가 이상한 거지! 그분은 거울도 안 보신대니? 누가 봐도 너랑 똑같이 생겼구만!”
“…….”
“너 잘못한 거 없어! 자기 손주가 대공 전하한테 검 배운다는 거에 겁먹고 이러는 게 더 잘못이지.”
황궁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와 보이지 않는 호위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슈드를 죽이라 명령한 이가 누구인지 정도는. 그러자 델리나의 팔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반말 듣기 싫으면 잠자코 잘 회복해서…….”
델리나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마차 주변에 흩어져 있는 대공가 기사들의 시신 때문이었다.
“……!”
아슈드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마차 근처에 있는 검은 인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복면을 쓴 남자가 칼을 빼어 들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본 델리나가 이를 갈았다.
‘진짜 손주 하나 죽이겠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복면을 쓴 이는 아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슈드가 제게 다가오는 남자와 곁에 서 있는 델리나를 바라보다가 빠르게 속삭였다.
“너, 광대 기술 나한테 한 번 더 써. 예전에 대공가 훈련장에서 사용했던, 몇 배 강해지는 기술.”
“하, 하지만, 내 기술은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쓰는데.”
“알아. 그러면 자정이 지나면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델리나가 급히 창을 열어 확인했다. 아슈드의 말대로 능력은 쓸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델리나는 그것을 바로 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 돼. 너도 알잖아. 이건 강해지는 대신에 몇 배로 체력을 쓰게 된다고. 하물며 지금 상태로는…….”
“됐으니까 빨리! 너도 여기서 죽을 셈이야?”
“…….”
“나 못 믿어? 한 사람 정도는 단숨에 해치울 수 있어.”
그사이 델리나와 아슈드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듯 남자가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슈드가 급히 델리나를 옆으로 밀쳐 내며 외쳤다.
“얼른!”
“!”
<능력남>
동시에 아슈드의 단검과 사내의 검이 맞부딪혔다. 아슈드의 예상외의 실력에 남자가 잠시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를 놓치지 않은 아슈드의 검이 빠르게 사내의 가슴팍을 그었다.
“!”
삽시간에 피가 튀는 살육전이 펼쳐졌다. 델리나가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아슈드의 공격에 비틀거리던 남자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덤벼들었다. 남자는 아슈드가 부상당한 곳을 노렸다.
“큭!”
부상당한 곳만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하니, 미간을 찌푸리던 아슈드가 비틀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이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단숨에 달려들더니 칼로 아슈드를 찌르기 위해 높이 들었다.
“안 돼!”
델리나의 외침과 함께 거센 불길이 날아와 남자를 덮쳤다. 불에 닿은 남자가 괴로워하며 몸을 비트는 그 순간이었다.
“!”
단검을 고쳐 잡은 아슈드가 단숨에 남자의 가슴을 찔렀다. 남자가 거세게 몸을 비틀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숨을 고른 아슈드가 몸을 돌렸다.
“너…….”
검을 내려놓은 아슈드의 시선이 델리나의 손에 있는 것에 닿았다.
“혹시 몰라서 챙겨왔는데 그러길 잘했네.”
델리나가 제 손에 있던 총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듯 아슈드가 피식 웃었다.
“누가 광대 아니랄까 봐 무기도 꼭 저 같은 걸로…….”
말을 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아슈드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