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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죽이든 하란 말이다 (52/94)


52화 죽이든 하란 말이다
2023.07.22.



 
“다른 즉위 선물은 마음에 드셨는지요.”

헬리움 황궁 가장 중앙에 위치한 황제의 응접실 안에서, 하이르와 데카르가 나란히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이르의 말에 데카르가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못하죠.”

헬리움 황궁에서 손꼽히는 보물을 즉위 선물로 받았음에도 데카르는 좋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명백했다.

그 어떤 화려한 보물보다도 더 관심이 가는 영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시면 처음의 그 영애를 데려갔어도 되었을 텐데요.”

데카르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이르가 말하자, 데카르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야 싶은데 그랬다가는 제 목이 먼저 대공한테 달아날 것 같아서.”

공식 연회 석상인데도 그런 반응이라니.

데카르 또한 벨리온이 황제에게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벨리온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칼을 뽑아 들었다. 여차하면 싸움도 불사할 듯이.

‘진짜 살기하고는.’

말로는 심심해서 안 된다느니 하면서도, 정말 제가 그 영애를 데려가면 바로 칼을 휘두를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벨리온을 떠올리며 데카르가 큭큭 웃자, 그를 지켜보던 하이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무튼 돌아가시기 전에…… 예전에 편지로 보낸 건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어떠십니까?”

“…….”

“루넨 제국이 힘을 보태 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텐데.”

울피림 대공가를 치는 것.

직접적으로 그 말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구체적인 이야기는 편지를 통해 전해 들은 바였다. 데카르가 말없이 하이르의 말을 들었다.

“만약 일이 제대로 성공한다면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시던 그 영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기는 하는군요.”

그 말에 데카르가 처음으로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무엇이 말입니까?”

“대공가를 치겠다는 황실 측의 의사가 확실한 것인지……. 연회장에서 의문이 든 일이 있어서요.”

데카르의 말에 하이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데카르가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까 공연을 도왔던 영식들이 대공가와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던데요.”

“……맞습니다. 대공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영식들이죠.”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만은 않은 듯 하이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데카르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예,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요. 그런데 참 재밌더군요. 황태손이 영애 영식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이 퍽 친해 보이던데요. 함께 무엇을 하는 사이인 양.”

그 말에 하이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그게 무슨…….”

“동맹을 맺으려면 아무래도 서로 간의 신뢰가 중요한 법인데, 아무래도 황태손 쪽이 마음에 걸려서요.”

“…….”

“확실합니까? 황태손이 정말 단순히 감시 목적으로 대공가에 가는 것이?”

데카르의 날카로운 말에 순간 하이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하이르는 데카르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입을 다물었다. 곧 그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

“감히 그 아이가 내 말에, 아니,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아, 그렇죠? 하기야 황태손이 제 할아버지를 농락하듯이 몰래 대공가의 후원이라도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죠.”

데카르의 웃음 섞인 말에 하이르의 안색이 변했다. 하이르의 얼굴을 본 데카르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 먼저 일어났다.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서.”

“…….”

“그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차차 이야기를 하지요.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나고 데카르가 응접실에서 나오자 응접실 문 앞에서 데카르를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자연스레 데카르의 뒤를 따랐다.

“출발 준비는?”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자고.”

“예, 그럼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데카르의 말에 러비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참, 그리고 이번 즉위 선물로 받은 것은…….”

“아, 그거? 알아서 잘 가져와.”

헬리움 제국의 귀한 보물인데도 데카르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러비가 은밀히 입을 열었다.

“그 영애분이 마음에 드셨다면 그냥 데려오시지 그러십니까?”

“…….”

“지금이라도 대공가 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글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고민되네.”

“폐하를 잘 알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번 마음에 든 것은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제 주인이었다. 하지만 데카르는 러비의 말에도 태연히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어차피 영애가 계속 대공가에 있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또 만날 거야. 그 영애랑은.”

“…….”

“음. 그래도 대공가에 선물 하나 정도는 보낼까? 그러면 좀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데카르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창밖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데카르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창밖 풍경 너머, 대공가를 향해 씩 웃었다.

* * *

“네놈이, 네놈이 정녕!”

데카르가 내던진 한마디의 결과는 참혹했다. 황제의 방으로 불려 온 아슈드는 하이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분개하는 하이르 곁에는 그레이스가 그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서 있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놈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나 알고서……!”

그레이스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아슈드를 칠 듯 하이르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정작 아슈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공가 감시를 하랬지 언제 대공에게 가르침을 받으라고 했더냐!”

“…….”

“황족의 이름을 달고서, 감히, 감히……!”

언성이 점점 격해지자 그레이스가 막으며 나섰다.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제가 아슈드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

“뭐?”

“울피림 대공은 제국 내에서도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먼저 말했어요. 대공에게 검을 배워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요. 전부 다 제가 시작한 일인걸요. 아슈드는 잘못 없어요.”

그레이스의 말에 거칠었던 하이르의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노 어린 시선만큼은 아슈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건가, 황족이면서 어찌……. 아니, 어쩌면 황족이 아닐 수도 있으니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 건가.”

하이르의 말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던 아슈드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아슈드는 분명 오빠의 아들인데.”

“모르지. 밖에서 싸돌다가 데려온 건데 제 친아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제국의 황태자였던 테오도르가 황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테오도르가 어느 날 포대기에 싼 아이를 데리고서 황궁에 왔다가 다시 사라진 것도, 그랬다.

“……!”

말을 마친 하이르가 근처로 있던 단검 하나를 들자 그레이스가 놀라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생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이르는 단검을 아슈드 앞으로 던졌다.

“네놈이 단순히 검만 배우고 싶은 마음에 대공가에 간 것이라면, 증명해 봐.”

그 말에 그레이스도, 단검을 받아 들던 아슈드의 눈도 커졌다.

“대공가로 당장 떠나서 그 칼로 대공에게 상처를 내든 대공을 죽이든 하란 말이다. 성공하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고.”

“아, 아버지.”

“밖에 아무도 없나!”

경악한 그레이스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하이르가 밖에 있는 기사들을 불렀다. 하이르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이놈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알겠습니다.”

하이르의 명에 잠시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슈드를 데리고 나갔다. 놀란 그레이스가 아슈드 뒤를 따라가려는데 하이르가 막았다.

“그레이스. 넌 빠른 시일 내로 결혼하거라.”

“네?”

“혼처는 내가 직접 알아봐 주지. 넌 그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돼.”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 저는 결혼보다는 아슈드의 보호자로 남고 싶다고요.”

“아니, 그놈은 이제 황태손도 뭣도 아니야.”

그레이스의 말을 딱 끊으며 하이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그놈에게 신경 쓰지 마라. 결혼도 해. 나는 네가 낳은 자식 중에서 후계자를 정할 생각이니까.”

“…….”

그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만약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된다면…… 아슈드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잠시 방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하이르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방금 말했지. 더 이상 그놈은 황태손도 뭣도 아니라고.”

“…….”

“마지막 순간에 적절히 쓰이는 게 그놈에게도 황태손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영광이겠지.”

“마지막이라뇨. 그게 무슨…….”

그 말에 잠시 중얼거리던 그레이스의 안색이 서서히 새하얘졌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아슈드가 사라진 문 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아슈드를 쫓아 달려가는 것보다 하이르의 말이 더 빨랐다.

“다시 들어와라!”

하이르의 명에 기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이르가 손짓하며 명했다.

“황녀를 데려가도록. 방에 가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철저히 감시하고.”

“그럴 수가…… 아버지, 설마……!”

충격에 빠진 그레이스가 비통하게 외쳤으나 곧 그녀 또한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절망 어린 목소리가, 잠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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