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귀한 고객님을 몰라뵙고
(48/94)
48화 귀한 고객님을 몰라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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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귀한 고객님을 몰라뵙고
2023.07.18.
비로소 반센트의 글자 또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델리나는 이제 확신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창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남은 횟수. 세 번.>
남은 횟수와 아직 만나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독 빠르게 흔들리는 노아의 이름에, 델리나는 그다음 벌어질 일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델리나는 깨달았다. 이 같은 일이 아이들에게 한 번씩 일어날 것이고, 또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그것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로 오셨다고요?”
깜빡이는 노아의 이름을 보고서 델리나는 빠르게 움직였다. 워낙에 급한 일이다 보니 약속은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노아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있었다.
‘채무 문제로라면 모두에게 열려 있겠지.’
바로 돈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돈을 못 갚으셔서 기한을 늘리실 것이라면 이곳 말고 길드로 찾아가는 게 빠를 겁니다.”
“그래?”
“예. 그런데…… 빌리신 분이 본인 맞으십니까? 아니면 부모님이신가요?”
“아니. 내가 빌린 거야.”
정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채무니, 돈 같은 이야기가 익숙하다는 듯 물었다. 그 어린 나이에 돈을 빌렸냐는 듯한 동정 어린 시선으로. 길드로 찾아갈 필요가 없는 델리나가 이어 말했다.
“내가 채무 금액이 좀…… 많거든. 그래서 공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얼마신데 그러십니까?”
“제국 하나야.”
“예, 제국 하나…… 예?”
대답을 무심히 넘기려던 기사가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다른 기사들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다. 급기야 수군대기도 했다.
“정말입니까?”
“……응.”
저 또한 이것이 거짓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기사 중 하나가 재빠르게 저택 안으로 사라졌고, 오래지 않아 도로 숨을 거세게 내쉬며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귀한 고객님을 몰라뵙고!”
“……?”
“뭣들 하고 있어! 어서 문 열지 않고!”
다급한 기사의 말에 굳건히 닫혀 있던 공작가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델리나를 소중히 모시며 안내했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밑에 돌멩이 조심하십시오!”
“바람이 부니 이쪽으로!”
‘여기는 채무자를 이렇게 귀하게 대해 주나……?’
여차하면 안아서 모시고 갈 듯 극진한 태도로, 그들이 델리나를 빠르게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복도와 황금색 문들을 지나 비로소 가장 크고 화려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광대 고객님이 왔네.”
“……공작님을 뵙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드윈이 웃으며 델리나를 반겼다.
“갑자기 왔다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혹시 벨리온이랑 싸워서 가출? 그런 거라면 우리 공작가에서 받아 줄 수 있고.”
“가출 그런 게 아니라요. 노아를 만나고 싶어서요.”
그 말에 에드윈이 씩 웃었다.
“하긴. 채권자랑 채무자는 늘 할 말이 많은 법이지.”
“네. 물론 당시 노아가 저를 루넨 제국에 안 보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잘 알죠. 그러니까…… 진짜 빚으로 제국 하나를 받지는 않겠지요?”
“글쎄? 그건 채권자 마음이라서.”
……진짜 망명할까.
그 누구도 아닌 디아몬 공작가에 이런 어마어마한 빚을 지라니. 델리나는 심각하게 제국을 진짜 떠나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를 재밌다는 듯 보고 있던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아는 없는데.”
“그러면요?”
“친아버지 만나러 갔거든. 오늘이 그의 기일이라.”
에드윈의 말에 델리나가 눈을 크게 뜨자 에드윈이 고개를 기울였다.
“알고 싶어?”
“어, 그…… 제가 알아도 되는 건가요?”
“그럼. 어차피 딱히 비밀도 아닌 데다가 우리 귀하신 고객님한테 이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생각하듯 에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아무래도 우리 가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좀 있겠는데.”
“…….”
“디아몬 가문에는 정기적으로 모임이 있지. 뭐, 쉽게 말하자면 돈 이야기하는 목적이 주된 이유고.”
정말 너무나도 상상이 잘 되는 모임의 모습에 델리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나도 어린 시절부터 참여했는데 말이야. 꼭 거기서 정말 모임이랑 안 맞는 질문을 하는, 내 사촌 형이 있었어.”
“도대체 무슨 질문을 했길래…….”
“사람이 꼭 돈이 많아야만 행복한 걸까?”
디아몬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나지 않을까 싶은 질문에, 델리나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물론 그 누구도 상대 안 해 줬지. 유일하게 대화해 준 건 나뿐이었고. 물론 심심할 때 어울려 준 정도였지만.”
“공작님은 뭐라고 답하셨는데요?”
“적어도 돈이 많다고 우울해하는 사람은 난 본 적이 없다고.”
순간 저도 모르게 정답이라고 외칠 뻔한 델리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도 그 형은 돈보다도 훨씬 값진 게 있다고 생각했어. 돈을 주고도 못 살, 그런 값진 거.”
“…….”
“그리고 그게 형이랑 나눈 마지막 대화였지.”
“그러면, 혹시 그 형이…….”
“결국 그 형은 어느 평민하고 결혼한다고 했다가 집안의 반대를 당하고 나가 버렸어. 내가 형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몇 년 후였고.”
그날의 일을 떠올리듯 에드윈의 말이 느려졌다.
“형은 이미 병으로 죽었고, 그 여자는 도박 빚에 시달려 도망갔다고 하더군. 둘 사이엔 아이가 있었는데 여자는 아이마저 버렸지.”
“…….”
“다 쓰러져 가던 집에서, 그때 발견한 거야. 굶어 죽어 가면서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어린애 한 명을.”
* * *
“…….”
무덤가는 고요했다. 잠시 무덤 앞에 가만히 서 있던 노아가 이윽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제 가십니까?”
“응.”
노아가 몸을 움직이자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 또한 몸을 움직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매년 무덤에 들러 가만히 서 있는 주인을 지키고, 또 그러다가 주인이 말없이 걸음을 옮기면 그를 따라가는 것이.
“마차는 언덕 밑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가셔서 바로 타시면 됩니다.”
이렇게 마차를 안내하는 것조차 기사는 익숙했다. 그리고 마차 옆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 또한 그랬다.
“노아!”
언덕에서 내려오는 노아를 보고서, 여인이 다급히 달려왔다. 기사들이 막아서자 여인이 기사들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었다.
“많이 컸네. 응. 그렇지? 오랜만이야.”
여인이 말을 건넸지만 노아는 침묵했다. 그때 한 기사가 다가와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여인에게 건넸다.
“이만 가십시오.”
여인이 기사가 건네주는 돈주머니를 잽싸게 낚아챘다. 연신 노아를 불러 대던 모습은 간데없고, 이제는 눈을 빛내며 돈주머니 속 돈을 세는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이쪽으로.”
돈을 세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여인을 지나치며 기사들이 노아를 다시 안내하려던 참이었다. 돈을 세던 여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부족해, 이걸로는 부족해…….”
한 손에 한가득 금화를 들고서도, 여인이 연신 부족하다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여인이 한 번 더 노아를 바라보았다.
“있지, 노아야.”
“…….”
“돈, 조금만 더 주면 안 될까?”
돈주머니를 꼭 쥐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는 듯 여인이 비척대며 다가왔다. 여인의 손이 노아가 입고 있던 옷을 꽉 붙들었다.
기사들이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노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아. 엄마가 다 잘못했지. 다 잘못했고말고. 그렇게 어린 널 텅 빈 집에 홀로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얼마나 외로웠을까…….”
연신 중얼거리던 여인이 노아가 입고 있는 옷을 훑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참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엄마 덕분인 거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공작가에서 살 수 있는 거지.”
“…….”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돈, 돈 조금만 더 줘.”
이미 금화를 한가득 들고 있으면서도 여인은 계속 부족하다는 듯 노아를 채근했다. 그 말에 노아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덕분 같은 소리.”
“…….”
“내가 돈 안 주면 이렇게 필사적으로 매년 오지도 않겠지. 안 그래?”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엄마는 널 보려고 오는 건데.”
“그래? 그러면 이 돈주머니도 필요 없겠네?”
그 말에 노아가 여인의 손에 있던 주머니를 도로 낚아챘다. 그러자 한순간에 눈빛이 돌변한 여인이 손을 휘저었다.
“내, 내 돈주머니! 돈주머니!”
“…….”
“어서 내놔!”
그 순간이었다. 사납게 돌변한 여인이 노아의 몸을 밀친 것은. 그리고 그 힘에 밀려 노아의 몸이 그대로 호수에 떨어졌다.
“공자님!”
기사들이 놀라 달려오기 시작했고, 물속에 빠진 노아는 그대로 호수 바닥을 박차고 올라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노아가 본 것은, 물에 빠진 자신에게서 아예 등을 돌린 채 바닥에 떨어진 돈들을 긁어모으는 여인의 뒷모습이었다.
“……하.”
그 모습을 보던 노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을 때였다. 그의 옆쪽으로, 또 하나의 물보라가 일었다.
“아, 맞다. 나 수영 못 하는데……! 어풉!”
그리고 요란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노아의 귓가를 타고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