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항상 내 예측을 벗어나니까
(47/94)
47화 항상 내 예측을 벗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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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항상 내 예측을 벗어나니까
2023.07.17.
“하여간에, 저렇게 물러 빠져서야 원.”
후작가 정원 한구석에서 남자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헨델이었다.
“가계도 뭐, 그거 하나 올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혹시 결혼 생각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한평생 실험 같은 거에만 몰두해서 사교계 모임이나 영식들한테 관심을 안 둔 아이인데.”
헨델의 말에 로미에가 답했다. 곧 두 부부의 은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여간에 이런 일은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니까. 혹시 알아? 결혼한다고 하면서 반센트를 내칠지?”
“그건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엘피샤 후작가니까 반센트가 차지하는 게 훨씬 좋죠.”
그들은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수풀 밑으로 작게 숨겨져 있는 관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다란 관은, 벽을 타고 쭉 올라가 위쪽 창문가까지 걸쳐져 있었다.
“들어가도 돼?”
한편 델리나는 반센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러자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반센트가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안 갔었네.”
“후작님이 더 놀다 가라셔서. 너 여기 있을 거라고 했거든.”
이어 델리나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가 네 방이야?”
“아니, 실험실.”
“그래? 근데 그건?”
창문에 부자연스레 끼워져 있는 기다란 관을 보고 델리나가 묻는데 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애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후작가 후계자도 못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렇죠. 애초에 우리 애 말고 누가 후계자가 될 수 있겠어요. 우리 반센트는 천재인걸요.”
관에서 들려오는 헨델과 로미에의 목소리에 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정작 반센트는 덤덤했다.
“1층에서 위층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실험용으로 만들었던 건데. 어쩌다 보니 첫 실험 대상자야.”
“…….”
“잘 들리네.”
반센트가 종이 위로 무언가를 적었다. 실험 결과인 듯했다. 그 모습에 델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어.”
“……그래도 기분이 그렇게 좋을 건 아니잖아.”
“이런 말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알고 있었어.”
거짓말.
반센트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반센트 위에 뜬 붉은 글자는 조금 전보다 더 빨리 깜빡거리고 있었다.
형제들까지 있는 막내아들이었지만, 천재 소리를 들던 반센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 사이에서 겉돌았다고, 에스텔이 이야기해 주었다. 반센트는 글자를 적어 내려가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기분이니, 감정이라는 것도 호르몬의 일종에 불과해.”
“호르몬?”
“몸의 내분비기관에서 발생하는 거. 체액이나 혈액을 통해서 몸 구석구석에 운반되는…….”
“…….”
“너 모르지.”
“그러니까, 그…… 암튼 그런 게 호르몬이라는 거지?”
애써 델리나가 아는 체를 하자, 반센트는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하여튼, 쓸데없이 이런저런 감정에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그 말에 델리나가 반박했다.
“왜? 왜 그런 감정이 쓸모가 없어? 사랑이라거나, 그런 좋은 감정들도 많은데.”
“사랑 같은 것도 유효 기간이 2년도 안 될 뿐이야. 그런데도 다들 그런 바보 같은 짓들이나 하는 거지.”
잠시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델리나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 음.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것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거네?”
“응.”
“……그러면 2년 넘어서도 잘 만나고 있는 연인들은?”
“애초에 인간이 뇌에 힘을 쓰기 위해서는 영원토록 뜨거운 사랑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그것도 다 거짓이지.”
반센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쯤 되니 델리나도 오기가 생겼다.
“그럼 네 말대로 그 호르몬이라는 게 몸 안에서 감정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너조차도 그 감정이 오는 건 물리적으로 막기 힘들다는 거 아니야?”
“…….”
그 말에 처음으로 반센트의 말문이 막혔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상관없어. 그래 봐야 2년 안에 끝나니까.”
“…….”
“오히려 더더욱 증명할 수 있겠지. 그 사랑의 유효 기간이 2년 안쪽이라는 걸.”
그 말을 끝으로 방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윽고 델리나가 입을 달싹였다.
“……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
“…….”
“난 말이야. 솔직히 너보다 머리가 좋지는 않으니까 호르몬이니, 화학 물질이니,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단순히 그런 것 하나로 정의 내려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게다가 너희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델리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에서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두 분 찾고 있었는데.”
에스텔의 목소리에 델리나와 반센트의 시선이 창가 밑으로 향했다. 그러자 두 사람에게 걸어오고 있는 에스텔이 보였다.
“에스텔? 무슨 일로 우리를?”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금 전의 식사 건도 그렇고요.”
처음 느꼈던 에스텔의 활달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금 에스텔 목소리는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물론 반센트의 의사도 있고 해서 곧 반센트가 후작가의 가계도로 옮겨지기는 하겠지만요. 그래도 반센트랑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좀 하셨으면 좋겠어요.”
“어머, 우리가 뭘?”
황당하다는 듯 로미에가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니? 그게 다 반센트 교육을 위해서인데. 다 나중에 너 편하라고 하는 거야.”
“충분히 반센트는 잘해 주고 있어요. 오히려 아이답지 않게 너무 성숙해서, 저는 그게 가끔 걱정되기도 하고요.”
“성숙한 게 뭐가 어때서. 네가 아이를 못 키워 봐서 하는 소리인데, 그게 얼마나 좋은 건 줄 아니?”
로미에의 말에, 이어 헨델이 덧붙였다.
“너도 나중 되면 알게 될 거다. 반센트를 후계자로 데려다 세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솔직히 우리 아들만큼 그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가 또 어디 있다고?”
“머리가 천재인 게 다는 아니잖아요. 그러시면 두 분은 반센트가 평범한 아이였다면 후계자로 추천하지도 않았을 건가요?”
“당연하지! 애초에 그 애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뭐 하러 그렇게 많은 걸 희생해 가면서 키워 놨겠어! 그랬다면 그냥……. 어억!”
헨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나무 밑쪽에 있던 두 사람이 공중에 붕 떴다. 헨델과 로미에가 그물에 갇혀 대롱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위쪽으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참,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그물에 걸린 헨델과 로미에도, 에스텔도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함정 장치 끈을 잡고 있는 델리나가 있었다.
“……설마 지금 이런 짓을 한 게, 영애?”
“네. 제삼자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이런 짓을 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 차마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요. 머리라도 식히실 겸 높은 곳으로 좀 올려 보내 드렸어요.”
델리나의 말에 로미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어쩜 이렇게 예의가 없는지……! 이래서 내가 친구 같은 건 사귀지도 말라고 한 거였는데.”
“그러세요? 저는 두 분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천재적인 아드님이 만든 천재적인 작품을 지금 체험하고 계시거든요. 그러시면 당연히 좋아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걸 지금, 지금……!”
“아드님이 겉보기에는 그냥 뭐든지 척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뒤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요! 실험도 항상 열심히 하고!”
헨델과 로미에가 말문이 막힌 듯 어깨를 바르르 떨자 그제야 불안한 얼굴로 델리나가 뒤쪽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반센트가 멍하니 서 있었다.
“미안. 그래도 네 부모님인데, 이야기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무 밑에 함정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 함정에만 몇 번을 당했는데, 그 정도는 알지.”
조금 전 극도로 어두워진 반센트의 얼굴에 어떻게든 그들의 대화를 막고자 다급히 잡은 것이 함정 작동 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였다. 그 순간이었다.
“푸흡.”
“?”
“아하하하하하!”
반센트가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저런 방식으로 할 줄은. 나도 생각 못 했던 건데.”
“……어, 나도 지금 생각 못 한 장면을 좀 본 것 같아. 이것도 무슨 호르몬의 영향인지 뭔지 그런 거니?”
아무래도 심각하게 호르몬이 고장 난 것 같은데.
저토록 소리 내어 웃는 반센트를 본 적이 없었기에 델리나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을 그친 반센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대화를 막는다고 함정 발동이라니, 진짜 너다운 대응이기는 하네.”
이내 걸음을 옮긴 반센트가 창문을 넘어 밑을 바라보았다. 반센트를 본 헨델과 로미에가 살았다는 듯 말했다.
“반센트. 거기 있었니? 그러면 어서 이것 좀 내려 주렴. 도대체가, 내가 이래서 친구 같은 건…….”
“당신들이 내 후계 자리를 핑계로 후작가를 노리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뭐?”
“그리고, 알지? 이미 후작가 가계도로 내가 옮겨지는 건 확정됐고, 그렇게 되는 순간 당신들과 나는 부모 자식 사이도 아니라는 걸. 그리고 후작이 된 내가 당신들을 내쳐도 할 말이 없다는 걸.”
“그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반센트?”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이고, 누나와 함께 실험을 하는 소중한 공간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목적으로 올 거면, 오지도 말고.”
반센트가 에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센트와 눈이 마주친 에스텔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오지도 말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우리는 네 부모잖아. 반센트, 반센트?”
두 사람이 간절히 외쳤지만 반센트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그를 가장 가까운 데서 지켜보고 있던 델리나가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그러고 있어?”
“아니, 방금 거에 좀 놀라서……. 이게 바로 놀람 호르몬이라는 건가?”
“그렇게 쓰는 말이 아닌데.”
“……그래. 나 멍청하다.”
‘하여간에 변함이 없어, 변함이.’
델리나가 잠깐 꿍얼대는 사이, 반센트가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덕분에 정신 좀 차렸어. 동시에 실험할 것도 하나 늘어난 것 같고.”
이 상황에서도 실험이라니, 반센트답다면 다운 말이었다. 물론 델리나는 익숙하다는 듯 물었다.
“또 무슨 실험이길래.”
“일단은 2년짜리.”
“뭐?”
“그 뒤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밌을 거야. 넌 항상 내 예측을 벗어나니까.”
“……?”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반센트는 그런 델리나를 보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