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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붉은 글자 (46/94)


46화 붉은 글자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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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붉은 글자는 그냥 있는 게 아니야.’

젠의 사건으로 델리나는 확신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나타나는 붉은 글자는, 이들이 분명 흑막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젠이 그랬었지. 경매장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렇게 확연한 반응을 보이고.’

찰나였지만 분명 델리나의 눈에는 보였다. 붉은 글씨로 쓰인, ‘흑막’이라는 글자를 말이다. 그리고 젠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젠은 그렇게 흑막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몇 년 후 제국을 망가트릴…… 흑막 중 하나가.

<다섯 명이 흑막이 되지 않게 막고, 헬리움 제국의 평화를 가져오십시오.>

델리나는 예전에 창에 떴던 문장을 떠올렸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흑막이 되지 않도록 막아라. 즉, 그렇다는 것은…….

‘분명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델리나는 빠르게 움직였다. 탄신 연회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엘피샤 후작가였다.

“후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델리나가 후작가에 가자 사용인들이 그녀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한번 들르라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후작가에 편지를 보내자 답장은 빠르게 왔다. 이에 델리나도 지체 없이 후작가로 향할 수 있었다.

“이미 후작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용인들이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델리나를 안내했다. 델리나는 그들을 따라 기나긴 후작가의 복도를 걸었다. 후작가는 여느 귀족들의 저택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연기?’

어느 방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저거 연기, 괜찮은 거야?”

“……예. 아마도요.”

놀란 델리나와 달리 사용인들의 반응은 침착했다. 아니, 익숙하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때 연기가 피어오른 방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으음, 또 뭐가 문제지?”

“……주인님. 또 집무 시간에 실험을 하셨습니까?”

“아, 미안, 미안! 진짜 갑자기 생각난 실험 내용이 있어서 이것만 하고 가려고 했거든? 근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에스텔이었다. 머리에 까만 그을음을 잔뜩 묻힌 채 에스텔이 사용인들에게 웃음을 터트리며 사과했다.

“또 머리를 태우셨네요.”

“응? 아, 좀 탔어.”

어느새 달려온 하녀들은 에스텔의 머리 상태를 보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제 주인을 향한 복잡미묘한 시선은 여전했다.

“…….”

델리나는 에스텔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가 생각보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안심했지만 델리나는 그 상황에 자연스레 인사를 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아, 왔네?”

하녀들에게서 수건을 받아 들던 에스텔은 그제야 델리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델리나도 한 걸음 나와 에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을 뵙습니다.”

“아냐, 아냐. 뭘 그렇게 딱딱하게 해. 됐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

“그래도 되나요?”

“그럼. 반센트 친구면 나랑도 그냥 언니 동생 하는 거지.”

씩 웃어 보인 에스텔이 델리나를 향해 시선을 낮추고서 눈을 빛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게 좀 많은데 말이야.”

“예?”

“광대 기술이라고 했나? 반센트한테 듣기로는 가문 비법이라고 하던데, 정확히 어떤 원리로 그런 기술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러면 플로렌 가문 사람만 쓸 수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건 없고? 아니면 공연 때 반센트에게 썼던 거 나한테도 써 줄 수 있어? 그때 엄청 재미있어 보였거든.”

“네, 가문 기술이라 저밖에 못 쓰고……. 이게 한 번 쓰면 다음에 쓸 때까지 좀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후작님한테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에스텔의 열정적인 탐구 정신에, 델리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둘러댔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아무래도 가문의 비밀은 중요하니까. 그래도 아쉽네. 난 사람 상대로 실험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사, 사람 실험이요?”

“응. 영애일 때부터 하도 별의별 걸 다 만든다고 아버지께 혼도 나긴 했는데, 그래도 나름 유용할 때가 많다니까? 혹시 이번에 축제 때 본 적 있어?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병. 그것도 내가 개발한 건데.”

‘아, 그런 느낌의 사람 실험이구나…….’

예전에 비공식적으로 사람 실험도 한다는 반센트의 말에 지레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에스텔은 마냥 해맑았다.

“그런 것 때문에 임상 실험은 가끔 해. 그런데 항상 지원자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야.”

“그래요?”

“응. 돈을 다른 곳보다 5배씩 줘서 그런가?”

그런 거라면 나도 하겠다.

구체적으로 얼마인진 몰라도 후작가라면 상당한 금액일 테다. 순간 델리나도 혹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지금 반센트는 어디에 있나요?”

‘이럴 때가 아니지.’

그제야 제가 후작가에 온 목적을 깨달은 델리나가 에스텔에게 빠르게 물었다.

“반센트는 지금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이야기 중인데.”

“부모님이요?”

“응. 간만에 오셨거든. 그래서 대화 중이야. 아마 곧 있으면 끝날 것 같기는 한데 바로 식당으로 갈 것 같고……. 아, 너도 같이 먹을래?”

“……저도요?”

예상치 못한 에스텔의 권유에 델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 *

후작가의 식당은 평범했다. 혹 무슨 기구를 사용해 밥을 던져서 먹진 않을까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에스텔 근처에 앉은 델리나가 연신 후작가 식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공간이 심심하긴 하지? 원래는 좀 더 이런저런 실험 용품들로 배치하고 싶었는데, 사용인들이 그건 죽어도 안 된다며 말리더라고. 그래서 좀 아쉬워. 진짜 재미있게 밥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잘하셨습니다, 사용인 여러분들…….

그렇게 델리나가 마음속으로 후작가의 사용인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이, 식탁으로 여러 음식들이 옮겨졌다. 척 보기에도 맛있을 것 같은 음식들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던 델리나가 에스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저 먼저 먹어도 되는 거예요?”

“그럼. 괜찮아. 어차피 다들 곧 오기로 했으니까, 배고프면 먼저 먹어도 돼.”

다행스럽게도 온다는 이들이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며, 반센트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너…….”

갑작스러운 델리나의 방문에 반센트가 식탁에 앉아 있는 델리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반센트 뒤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쩜, 우리 온다고 이렇게나 많이 준비한 거니?”

“자, 반센트. 얼른 앉아서 못다 한 이야기도 좀 마무리할까?”

반센트와 비슷한 인상을 가진 남자와 여자. 델리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베논 백작가의 헨델, 로미에.

바로 반센트의 친부모님인 사람들이었다.

“어머 근데 에스텔. 거기는……?”

“아, 델리나 플로렌 영애라고, 반센트 친구인데 오늘 놀러 왔어요.”

자연스레 에스텔이 델리나를 소개하자 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델리나 플로렌이라고 합니다.”

“아, 설마……. 그 연회에서? 공연?”

“……네. 맞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 공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쫙 퍼진 모양이었다. 이에 놀란 듯 헨델과 로미에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음, 그래. 잘 있다 가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관심은 델리나에게서 떠나갔고, 그들은 앞에 있는 반센트를 보기 바빴다. 그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듯, 두 사람은 반센트에게 웃으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 반센트. 후작가 후계자 수업은 열심히 잘 받고 있는 거겠지?”

“…….”

“어머 당신은. 우리 반센트 같은 천재가 그런 걸 못 할 리가 있겠어요?”

반센트가 침묵하자 헨델과 로미에가 깔깔대며 웃었다. 로미에가 에스텔에게 물었다.

“그래서 에스텔. 우리 이야기는 생각해 봤니?”

“반센트를 후작가 가계도에 올리는 것 말씀이시죠?”

“그래. 그러면 네 입장에서도 얼마나 좋니. 어차피 너도 결혼은 안 한다고 했고. 그렇다면 네 후계자로 우리 반센트가 딱이지.”
“네. 물론 저도 반센트가 좋지만요. 반센트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예 가계도까지 옮겨 버리면 서류상 부모가 두 분이 아니라 제가 되는 셈인데…….”

“어머, 그거야 우리도 좋고 반센트도 좋은 일이지. 그렇지, 반센트?”

두 사람이 물어도 반센트는 그저 느리게 포크로 접시를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 같은 거 사귀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후작가 후계자가 되는 게 더 낫지.”

“그럼. 다 이게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인 건, 알고 있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후계자가 되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 친구 같은 것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델리나가 밥맛이 떨어진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델리나와 마찬가지로 반센트 또한 포크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올라갈게.”

“벌써 다 먹었어? 거의 안 먹은 것 같은데…….”

“배불러서.”

에스텔을 바라보며 말한 반센트는 헨델과 로미에에게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델리나는 볼 수 있었다.

<예비 흑막>

그렇게 떠난 반센트의 머리 위로, 붉은 글자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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