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는 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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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너는 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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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너는 내 친구야
2023.07.15.
“네?”
난데없이 샌드위치 먹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델리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벨리온이 말을 이었다.
“없으면 심심해서 뿐만은 아니야.”
“…….”
“다른 이유도 있고.”
그 말에 놀란 델리나가 샌드위치를 먹던 것도 잊고서 벨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말씀을 잘 못 하셔서, 그렇게 이야기가 나왔던 거라고요?”
“응.”
“단순히 저를 데리고 있는 이유가 심심해서 뿐만은 아니고요?”
“그렇지.”
허어…….
벨리온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러면요?”
“없으면 이제는 허전하지. 그리고…… 아예 타 제국으로 가는 건 더 짜증 나고.”
“…….”
“그러니까 계속 나한테 후원받아. 어디 가지 말고.”
벨리온의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올린 델리나가 물었다.
“그 말은, 제가 후원받는 사람 중에서는 전하랑 가장 가깝다는 소리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면 칼릭스가 서운해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울피림 대공가의 후계자인데.”
“…….”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벨리온이 말을 이었다.
“후원받는 자 중에 가장 가까운 건 칼릭스고, 너는 내 가장 가까운 광대고.”
“……그 광대 호칭은 끝까지 붙어 있군요.”
그래도 광대에서 가장 가까운 광대가 된 게 어디인가 싶었다. 델리나가 이어 말했다.
“저도 감사해요.”
“…….”
“아까 루넨 제국으로 끌려갈 수 있었는데 망설임 없이 나서서 막아 주셨잖아요.”
데카르는 응접실에 홀로 앉아 있었지만, 정말로 혼자는 아니었다. 분명 데카르 근처에는 언제든지 칼을 빼어 들고 나타날 수 있는 수십 명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괜히 그 전쟁에서 유명한 게 아니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말 무서운 자였다. 그리고 벨리온 정도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카르 주변에 조용히 있던 자들의 기척을.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든 벨리온을, 델리나는 무척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축제 구경도 감사하고요. 예전에도 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생각이 나기도 하고, 좋네요.”
가물가물한 기억 속, 그때는 오빠는 물론 엄마, 아빠까지 온 가족이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고는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다음에 함께 축제를 구경하는 사람이 무려 울피림 대공이라는 것을.
‘하긴. 울피림 대공이 샌드위치를 사면서 축제를 구경하고 있다고는 지금 여기 사람들도 상상 못 하겠지.’
사람이 많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벨리온이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저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었다. 그래, 그것으로 델리나는 충분했다.
“그리고 아까 상인이 그랬잖아요. 전하와 제가 아빠와 딸이라니, 재밌죠. 애초에 제가 딸이 되려면 전하께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저를 낳았어야 했는데…….”
‘아.’
순간 델리나의 입이 닫혔다. 말 그대로, 정말 벨리온에게는 딸이 있었기에.
‘그래, 있잖아. 전하의 딸이…….’
늘 머리에 두고 있어야 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벨리온의 딸, 셀린. 입을 다문 델리나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둘러보다가 슬슬 돌아갈까요?”
어느새 샌드위치를 다 먹은 델리나가 벨리온을 이끌고 돌아가려던 때였다.
<예비 흑막>
“……!”
난데없이 창이 열리며 붉은색 글자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게 갑자기, 왜……?’
델리나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앞에 있는 ‘예비’라는 글자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창을 열어 그것을 확인하던 델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설마!’
“젠!”
“뭐?”
“젠, 젠 지금 어디에 있어요?”
창에 뜬 글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젠이었다. 델리나 또한 다급해졌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다른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붉은 글자가 보였던 때보다 더욱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델리나의 다급한 얼굴에 벨리온이 뒤로 돌아 손짓하자 몇 명의 그림자가 나무 아래로 나타났다. 델리나가 놀라기도 전에 그림자들에게 벨리온이 물었다.
“위치는.”
“조금 전 서쪽 방향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림자들의 보고 후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곧장 델리나를 안아 올린 벨리온이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시야가 높아진 델리나도 목을 빼 다급하게 젠을 찾았다.
‘제발, 제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도 불길했다. 곧 젠이 가까운 데 있음을 알리듯 창의 붉은 글자가 더욱 빠르게 깜빡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델리나의 시야에 젠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저기예요!”
마찬가지로 젠을 발견한 벨리온이 단숨에 그곳으로 다가갔다. 젠 옆에는 베티가 있었고, 그 앞으로 사내 몇 명의 무리가 떡하니 서 있었다.
“젠!”
벨리온의 품에서 빠져나온 델리나가 급하게 젠에게 다가갔다. 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젠은 잔뜩 경계하는 자세로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분노와 적대 어린 시선은 앞에 있는 남자들에게로 향한 채였다.
“이건 또 뭐야?”
델리나를 발견한 남자들이 이죽거렸다.
“상품 주제에 꼴에 친구라도 생겼나 보지? 그리고 젠? 그게 이름이야?”
“아주 이름까지 생기고, 참 좋아 보여?”
상품.
아무렇지도 않게 젠을 상품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델리나는 사내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경매장 사람들……!’
지금이야 상처가 다 아물었지만 저택에 막 왔을 때 젠의 상태는 참혹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경매장 사람들을 다시 만난 젠의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위태로울 만큼.
“무슨 일이지.”
어느새 다가온 벨리온이 베티에게 조용히 물었다.
“대화 내용을 파악해보니 경매장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젠 님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다가왔고요. 지금은 이렇게 대치하는 중입니다.”
델리나와 벨리온이 입은 평복 차림을 보고서 사내들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도리어 자신들을 덤덤하게 보는 베티와 벨리온의 시선에 기분이 나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젠. 괜찮아?”
하지만 델리나는 그런 사람들보다 젠이 더 신경 쓰였다. 곁에 있는 델리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젠이 불안정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실실대기 시작했다.
“어쭈. 그래도 우리 보니까 그때 기억이 나나 봐?”
“애초에 너한테 그런 옷이며 스카프가 가당키나 해? 아니면 우리 간만에 경매장에서 했던 것처럼 놀아 볼까?”
사내들이 한 걸음 다가서자 젠이 더욱 날을 세우며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려운 듯 젠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사내들을 막아선 것은 바로 델리나였다.
“놀아 주기는 뭘 놀아 줘!”
“뭐야?”
“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그러니까 당신들 마음대로 못 해!”
“꼬맹이가 건방지게 무슨…….”
하지만 사내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하고도 묵직한 칼의 감각 때문이었다.
“……!”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내들의 등 뒤로 다가가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들은 검으로 그들을 위협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사내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은 벨리온의 명에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델리나의는 다급한 목소리로 젠을 불렀다.
“젠. 나 좀 봐 봐. 응?”
당시 목줄을 찼던 것을 떠올린 듯 젠이 손가락으로 목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점점 더 거칠어졌다.
“…….”
“젠!”
델리나의 강한 어조에 정신을 차린 듯 젠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델……. 델리나…….”
“그래. 나 알아보겠어?”
목을 긁던 손짓은 멈췄지만 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델리나는 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보여 줬다.
“자, 봐. 이건 목줄 같은 게 아니라 스카프잖아. 내가 너한테 선물해 줬던 스카프.”
“…….”
“이제 두 번 다시 경매장 같은 데는 안 보내. 내가 스카프 선물한 그날부터 넌 자유였는걸.”
젠의 노예 계약서 따위는 찢어 버린 지 오래였다. 델리나가 젠에게 일어서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넌 노예가 아니야. 내 친구지.”
“…….”
“혹시라도 누가 너를 경매장에 돌려보내려고 하면, 그때는 내가 온 힘을 다해 지켜 줄 테니까. 음, 물론…… 내가 너보다 한참 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막아 볼게.”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는 델리나를 보던 젠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베티가 조용히 벨리온에게 물었다.
“저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놀고 싶다니 데려가서 놀아 줘.”
“알겠습니다.”
베티가 천천히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베티가 다가오자 사내들이 그녀의 살벌한 얼굴에 움찔 몸을 떨었다.
“자, 젠. 저런 거 보지 말고 얼른 가자. 뭐 먹을래?”
“응, 응.”
그새 환하게 웃은 채 델리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고개를 끄덕이는 젠이었다. 델리나는 젠의 머리 위쪽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붉은 글자에, 델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