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나 아직 포기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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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나 아직 포기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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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나 아직 포기 안 했다?
2023.07.14.
들어오면서 상황을 다 파악한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탄신 연회 자리를 비우시기 힘들어 제가 황족 대표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레이스가 데카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레이스의 행동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데카르의 눈썹도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헬리움 제국의 황녀로서 감히 루넨 제국의 황제께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나 아직 황제 아닌데.”
“아직 즉위식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해서, 간청드립니다.”
지금의 그레이스는 델리나가 정원에서 보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그레이스의 기개에 델리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애를 데려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물론 제 아버지와 폐하께서 하신 약속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비를 베푸시어 즉위 선물을 다른 것으로 가져가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데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헬리움 제국에서는 사람을 함부로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
“이는 루넨 제국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데카르가 무어라 반박할지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 그러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데카르가 고개를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 참. 도대체 왜 타 제국 법까지 알고 있는 거야?”
“…….”
“이래서 황녀는 재미없다니까.”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댄 데카르가 벨리온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얘 어디가 좋아서 이러는 건데?”
데카르의 질문에 델리나도 궁금한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가만히 있던 벨리온의 입이 열렸다.
“없으면 심심하니까.”
벨리온의 당당한 말에 방 안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깬 것은 데카르였다.
“나 참. 그럴 줄 알았지.”
“…….”
“뭐, 그래도 솔직해서 좋네.”
왁!
곧 델리나의 몸이 공중으로 다시 붕 떠올랐다가 도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에 품에 안긴 쪽은 벨리온이었다.
“데려가.”
“…….”
“김 다 샜어.”
델리나를 벨리온에게 넘긴 데카르가 델리나를 보며 말했다.
“광대, 아니 델리나 영애라고 했던가?”
“…….”
“물론 지금 안 데려가기는 하는데 나 아직 포기 안 했다? 내 제안은 그대로야. 언제든지 루넨 제국으로 튀고 싶으면 와. 받아 줄 테니까.”
그의 말에 델리나를 안은 벨리온의 팔 힘이 더 강해졌다. 숨이 막힌 듯 델리나가 벨리온의 팔을 다급하게 두드리자, 그제야 벨리온의 팔 힘이 약해졌다. 그사이, 웃음소리와 함께 데카르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 *
“…….”
“…….”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물론 델리나 혼자 마차를 타서는 아니었다. 맞은편에는 벨리온도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델리나는 그저 진이 다 빠졌다는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많은 일이 있었어…….’
때아닌 납치 소동이 끝이 아니었다. 연회장 한복판에서 가발이며 가면이 다 벗겨졌기에 꼼짝없이 얼굴이 드러난 델리나는 그 이후로 에일리와 기드온의 질문을 다 받아 주어야 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에일리에게도 대공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과 광대에 관한 것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델리나가 후원을 받는 이유가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기드온의 얼굴도 제법 볼만했다.
두 사람에 대한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얼굴을 다 보였으니 소문이 쫙 퍼질 것이었다. 델리나 플로렌 영애가 대공가에서 후원을 받고 있고, 광대 노릇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 델리나는 당분간 사교 모임이고 뭐고 가지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뭐, 그것도 그거지만…….’
델리나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벨리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창가 쪽을 응시하고 있던 벨리온이 델리나의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닌데요.”
‘뭐, 없으면 심심하니까?’
델리나가 필요한 이유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던 벨리온을 떠올리자, 델리나의 입이 삐쭉 올라갔다.
‘애초에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후원을 하고 후원을 받고.
그래, 정말 딱 그만큼의 관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벨리온의 발언에도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델리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
델리나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마차가 멈추면서 창문으로 펠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델리나가 궁금한 표정으로 펠릭에게 물었다.
“어디에 도착한 건데?”
워낙 정신없이 황궁에서 나와서 마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였다. 그러자 펠릭이 웃으면서 먼 곳을 가리켰다.
“광장 축제입니다.”
“축제?”
“이번에 공연 때문에 제대로 연회도 못 즐기시지 않으셨습니까. 해서 전하께서 광장 축제에 가자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가?’
벨리온이 제안했다는 말에 놀란 델리나가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벨리온은 펠릭이 가져온 가면과 제 가면을 바꿔 쓰고 있었다.
“마침 이번 축제 주제가 가면 축제니까요. 이러면 두 분 다 축제를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펠릭이 델리나에게도 가면을 내밀었다. 델리나가 가면을 쓰면서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와아…….’
광장의 입구에는 가면을 쓴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화려한 광장의 모습에 절로 델리나의 눈이 빛났다.
“전하께서는 이걸 쓰시지요.”
펠릭이 벨리온에게 약병을 건네주며 말했다. 병뚜껑을 연 벨리온이 단숨에 그것을 머리에 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벨리온의 머리카락 색이 바뀌었다. 놀란 델리나가 물었다.
“이게 뭐야?”
“축제의 가장 인기 상품.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약이죠. 나중에 머리를 감으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가면을 썼다고 해도 전하의 검은 머리카락은 좀 눈에 띌 수 있으니까요.”
“아, 그래서…….”
“엘피샤 후작가에서 발명하고 디아몬 공작가에서 팔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엄청나게 매출이 뛰었다던데요.”
두 가문의 합작품은 어느새 벨리온의 머리 색을 보라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저와 같은 색이 된 벨리온의 머리카락을 보며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카락을 만졌다.
“오늘 좀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요. 그런 건 이제 싹 잊으시고 전하와 재미나게 놀다 오세요, 아가씨. 원숭이는 자고 있으니까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데카르와의 일은 아예 생각지도 말라는 듯, 펠릭이 벨리온과 델리나를 광장 입구로 내보냈다. 마침 다른 마차에서 내린 젠이 화려한 거리를 보고 눈을 빛냈다.
“반짝반짝해!”
젠이 델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가도 돼?”
“응. 가는 건 좋은데 사람 많으니까 천천히……. 젠!”
델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나서 뛰어가는 젠이었다. 가면도 안 쓴 탓에 유독 눈에 뛰었다. 그때 뒤에 있던 베티가 나섰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응, 부탁 좀 할게.”
칼릭스는 울피림 대공가의 대표로 연회장에 남아 있다고 펠릭이 전해 주었다. 그러자 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좋겠지. 이렇게 사람이 우글우글한 곳보다 연회장의 디저트 쪽이 그놈한테는 이득일 테니.’
광장 안은 다양한 사람들도 넘쳐 났다. 거리에는 각종 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크고 작은 공연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인파 속으로 들어간 델리나는 눈을 빛내며 축제를 구경했다.
“배는 안 고픈가?”
“배요?”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곁에서 걷고 있던 벨리온이 물었다. 그 말에 델리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공연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더니 허기가 지는 듯했다.
“그러면 저건 어때요?”
델리나가 가리킨 것은 어느 샌드위치 매대였다. 벨리온은 군말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고 그를 따라간 델리나는 제 앞에 놓인 다양한 샌드위치들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아빠랑 딸이 오붓하게 축제 나왔나 보네?”
손님을 맞이하던 상인이 나란히 서 있는 벨리온과 델리나를 보고서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놀란 델리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빠 아닌데요.”
“뭐? 그러면?”
아빠가 아니라는 소리에 놀란 상인이 벨리온을 유괴범을 보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델리나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후원자요.”
“잉? 후원자?”
“네. 저택에서 생활하게 해 주고 교육해 주는, 그런 관계요.”
“아, 그러니까 한 집에서 먹이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교육까지 해 주는데 후원자라 이 말이지? 아빠가 아니라?”
그제야 껄껄 웃으면서 상인이 델리나에게 샌드위치를 건네주었다. 동시에 그가 작게 벨리온을 향해 말했다.
“혹시 딸내미랑 싸웠수?”
“…….”
“그러면 빨리 푸는 게 좋을 거요. 나도 딸을 키워 봐서 잘 아는데 저 정도면 뭔가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거든.”
상인의 말에도 벨리온은 말없이 샌드위치값을 지불했다. 샌드위치를 받아 든 델리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앉아서 먹어도 되나요?”
“그래.”
두 사람은 어느 한적한 벤치에 찾아 나란히 앉았다. 저 멀리 여전히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곳과 다르게, 벤치 근처는 한산하니 고요했다.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물대는 델리나를 내려다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난, 원래 말을 잘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