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날의 아름다웠던 춤
(34/94)
34화 그날의 아름다웠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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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그날의 아름다웠던 춤
2023.07.04.
“이리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후작저의 안으로 들어와서도, 자리에 앉아서도, 누구 하나 델리나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델리나는 찻잔을 든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베티의 가르침이고 뭐고, 이건 너무도 명백한 적의였기에 그 원인을 파헤쳐 보는 중이었다.
‘전에 왔을 때 후작가 욕이라도 했었나?’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예전 사교 모임을 떠올리며 델리나는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아니면 그 원숭이 놈이 실비아 영애 방에다가 음식물 찌꺼기라도 버린 건…….’
매번 제 속을 썩이는 놈이니 그쪽이 더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델리나가 오만 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 다른 영애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실비아의 시선이 뜨거웠다.
“쿠키가 맛있으신가요, 영애?”
실비아의 시선을 피하며 델리나가 쿠키를 집었을 때였다. 실비아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다.
“……네. 맛이 좋네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저희 가문에서는 항상 최고급품만 쓰니까요.”
자랑스레 말하던 실비아가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손짓했다.
“다른 쿠키는 어떠세요? 제가 특별히 영애께는 추천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추천이라면……?”
“로나. 쿠키를 이리로.”
실비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하녀 한 명이 다가와 델리나의 접시에 쿠키를 내려놓았다. 쿠키를 본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새로 개발한 쿠키인데, 맛 평가 좀 해 주시겠어요?”
실비아가 델리나에게 내오게 한 쿠키는 색깔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거무죽죽하게 녹이 든 듯한 색은 마치 오염된 늪 한가운데를 떠올리게 했고, 덜 구웠나 싶을 정도로 질척거렸다. 냄새 또한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델리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보기에는 이래도, 영애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특별히 준비해 봤어요.”
“……저한테 말인가요?”
“네. 그게 실은 다이어트 쿠키거든요.”
다이어트 쿠키.
실비아는 구태여 다이어트라는 말을 강조했다. 자연스레 델리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델리나는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데뷔탕트의 날, 만약 그 춤을 실비아가 봤고 누가 췄는지를 알았다면…….
“이번에 데뷔탕트에 오셨었죠?”
“…….”
“보니까 춤을 출 때 썩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확실히 이 쿠키가 필요해 보이더라고요.”
역시.
노골적으로 제 몸을 훑어보는 적의를 보니 확실해졌다. 분명 실비아는 아슈드가 자신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비꼬고 있었다. 동시에 델리나는 실비아가 제게 왜 적의를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 저보다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영애였지.’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은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아슈드와 춤을 춘 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실비아가 노골적으로 델리나에게 쿠키를 주니 다른 영애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실비아의 주변에 있는 영애들은 키득거리며 델리나의 쿠키를 보고 있었다.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맛이 무척 없다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덤덤하게 답하는 델리나의 반응에 실비아가 놀란 얼굴로 델리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델리나의 괜찮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형편없는 쿠키를 보고서도, 실비아의 적의 어린 시선을 보면서도 델리나의 감정은 그리 요동하지 않았다.
‘아무렴. 그 다섯 명이랑 심장 벌렁이면서 어울리느니 이런 데가 낫지…….’
대공가에서의 눈물겨운 경험에 비하면 이런 쿠키 정도는 귀여운 장난에 불과했다. 곧 완전히 생각을 정리한 델리나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저만을 위한 쿠키라니 그것참 맛있겠네요. 잘 먹을게요.”
“……네?”
예상외의 반응에 실비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데뷔탕트 말인데 저는 정말 좋았어요. 오죽하면 상대방 쪽에서 저와 다시 춤을 추자고 하겠어요?”
“뭐, 뭐라고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델리나가 환히 웃었다. 반면 실비아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델리나는 실비아의 반응을 뒤로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차와 쿠키에 집중했다.
‘진짜 하자고 하긴 했지. 거의 죽일 듯이 하자고 해서 문제지만…….’
하지만 구태여 그 뒷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무려 아슈드가 다시 춤을 추자고 제안한 것, 그것만으로도 실비아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충분할 테니까.
‘뭐, 독은 없겠지.’
보란 듯 다이어트 쿠키를 한 입 먹은 델리나가 그것을 우물우물 씹다가 삼켰다. 물론 맛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하지만 쿠키를 먹는 델리나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차를 마시는 손길이 조금 다급해졌을 뿐이었다.
‘차라리 독을 먹는 쪽이 더 나았겠는데.’
그렇게 델리나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잽싸게 다른 쿠키를 먹는 사이, 주변 영애들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실비아는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분노에 찬 얼굴로 델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좀 있으면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죠? 얼마 안 남았던데.”
“맞아요. 사실 저도 이번에 처음 가서 기대가 되더라고요.”
한 영애가 급히 화제를 전환하자, 다른 영애들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폐하의 탄신일에는 사실 각국의 귀빈들이 오가는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얼마나 그 규모가 클지, 저로서는 상상이 안 가네요.”
“맞아요. 데뷔탕트에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저도 들었어요.”
‘아, 탄신일.’
영애들의 대화를 가만히 주워듣고 있던 델리나도 혹 그날 무슨 일이 터졌었는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애초에 과거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한 제가 황궁에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탄신일이라고 해도 제대로 아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규모가 어마어마하겠지. 황제의 탄신일이니만큼 이름 있는 귀족들은 빠짐없이 참석할 테고……. 전하께서도 참석하시려나? 황가와 문제가 생기면 안 될 텐데.’
자리에 있는 모든 영애에게는 기대되는 탄신일일지 몰라도 델리나에게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델리나는 과연 벨리온이 그 자리에 참석할지 안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영애도 그 자리에 오나요?”
실비아가 다시 델리나에게 물었다.
“예?”
“황제 폐하의 탄신일에, 영애의 가문도 참석하냐고 물었어요.”
이쯤 되면 당장 와서 멱살을 잡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델리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실비아의 모습에, 퍽 귀찮은 눈빛을 하던 델리나가 답했다.
“글쎄요. 플로렌 백작가라면 참석하겠지만요, 저는 아직 모르겠네요.”
분명 그런 곳에 빠질 리 없는 니엘과 샬롯이었다. 하지만 대공가에 있는 델리나의 참석 여부는 벨리온이 가느냐 안 가느냐에 달려 있었다. 더군다나 델리나는 하이르가 저를 노리고 있는 곳에 제 발로 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애는 지금 가문을 떠나 잠시 다른 곳에 맡겨졌다고 했나요?”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문에서 방출되다니, 썩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때다 싶었는지 실비아는 눈을 치켜뜨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또다시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실비아와 델리나였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치셨나요?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좋아요.”
“아뇨. 위해 주시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고 같은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어머, 그래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성년도 아닌 영애를 다른 곳에 보낸다는 것은 조금 그렇네요. 백작가 쪽에서 실수를 한 건 아닐까요?”
급기야 가문에 대해 언급하는 실비아의 위험 어린 발언에, 분위기는 더더욱 고조되었다. 몇몇 영애들은 마른침을 삼켰고, 평온을 유지하던 델리나의 미간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아가씨. 대화 중에 실례지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후작가의 사용인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급하게 다가온 사용인이 실비아에게 바짝 붙어 섰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게, 지금 저택으로 손님분들이 더 오셨습니다.”
“뭐?”
사용인의 말에 실비아의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이미 초대장을 보낸 손님들은 다 왔는데? 그런데도 왜 못 돌려보내고 있는 거야?”
“네. 그것 또한 저희가 알고는 있는데, 그…… 이건 아가씨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실비아의 추궁에 사용인이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 사용인의 뒤로 손님 몇 명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다가오는 인물들을 바라보던 델리나는 혹 제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눈은 멀쩡했고,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이들의 얼굴도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였다.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몹시도 익숙한, 그리고 대공가 훈련장에서나 봐야 할 법한 다섯 명의 인물들에, 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