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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이상형도 없으세요? (33/94)


33화 이상형도 없으세요?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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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가씨. 조금 전보다 나아지셨습니다.”

또 한 번의 사교 모임을 위해 오늘 델리나가 배우고 있는 것은 걸음걸이와 자세였다. 베티의 목소리에 맞춰 방 안을 조심스레 걷던 델리나가 말했다.

“잠깐 쉬면 안 돼?”

“그러지요.”

베티의 허락이 떨어지자 델리나가 그대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사이 방 안에 있던 책을 몇 권 가져온 베티가 가만히 책 무게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책 무게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책을 머리 위로 올릴 예정이라서요.”

책은 델리나의 머리 위에 놓기에는 상당히 크고 두꺼워 보였다. 하지만 베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것들을 몇 번이나 높이 들었다가 내렸다.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무게가 적당한 책을 가져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걸로 했다가는 내 목이 꺾일 것 같기는 해.”

이때다 싶었는지 델리나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가져올게.”

“직접 가져오실 겁니까?”

“응. 한번 걸음걸이 연습도 할 겸. 방 안보다는 바깥에서 하는 게 더 좋잖아.”

계속 방 안에만 있자니 지루했는데 기분을 좀 환기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델리나는 밖으로 나가 복도를 사뿐히 걸었다.

‘허리는 곧게, 내딛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걸음에 집중한 나머지 델리나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상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가 델리나를 보고서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러다가 앞을 못 보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

“아, 응.”

펠릭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델리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한가득 서류를 짊어지고 있던 펠릭이 델리나를 보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중이세요?”

“도서관에 좀 가려고.”

“도서관이요?”

도서관으로 간다는 말에 펠릭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참! 아가씨가 부탁하신 책들을 한 권도 빠짐없이 들여놨는데, 혹시 보셨을까요?”

“책? 내가 무슨 책을…….”

아.

그제야 펠릭에게 로맨스 소설을 사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떠올랐다. 펠릭은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 보시고 더 원하는 책이 있으시면 사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좋아하시는 남주 이상형이 있으시면 제가 찾아볼게요.”

펠릭의 웃는 얼굴에서 에일리가 겹쳐 보이는 건 정말 델리나의 착각일까. 펠릭의 말에 델리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내가 한번 읽어 볼게.”

“아, 딱히 남주 취향은 없으세요?”

“응. 뭐,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애초에 로맨스 소설이라고는 읽어 본 적도 없었기에, 딱히 취향이라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델리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가만, 설마 전하가 그때…….’

그때 벨리온은 광대를 사랑하냐는 말을 자연스레 내뱉었다. 그 어이없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됐는데, 왠지 그것이 펠릭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있잖아. 혹시 전에 전하랑…….”

“네?”

“……아냐, 아니야.”

벨리온과 로맨스 소설 이야기를 했냐고 물어보자니 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기차게 물어볼 것 같아서 델리나는 말하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더더욱 즐거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펠릭이 다시 물었다.

“남주 취향도 없으시면 이상형도 없으세요?”

“이상형?”

“네. 막 처음 봤을 때 강렬했거나, 잊히지 않는다거나, 그런 느낌이 든 사람이요.”

‘강렬한 사람…….’

그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델리나가 답했다.

“음, 글쎄, 강렬한 사람이면…… 전하?”

첫 만남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꼽자면, 단연 벨리온이었다. 사실 다른 아이들과의 만남 또한 강렬하긴 했지만 그중 최고는 역시 벨리온이었다.

“정말요?”

그 말에 재미있다는 듯 펠릭이 웃었다.

“아가씨 이상형이 전하 같은 분이라니. 이거, 전하께서 아시면 좋아하시겠는데요.”

“에이, 설마. 그냥 그러려니 하실 것 같은데.”

분명 그 특유의 멍한 얼굴로 별 반응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펠릭은 왠지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왜요. 전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좋아하긴. 그냥 전하와 나는 후원 관계일 뿐이고…….”

몇 년 후 돌아올 딸보다야 제가 위일 수는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델리나는 그저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책은 잘 읽을게. 고마워.”

“엇, 전하.”

델리나가 펠릭과의 대화를 끝내려는 찰나,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델리나가 고개를 돌리자 벨리온이 서 있었다.

“또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때마침 전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글쎄, 아가씨가요. 전하 같은 분이 이상형이랍니다.”

말릴 새도 없이 고하는 펠릭이었다. 그러자 델리나가 당황하면서도, 벨리온의 반응이 궁금했는지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벨리온의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내뱉는 말은 그렇지 못했다.

“결혼하기는 힘들겠군.”

‘이야.’

저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음에 델리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 대공가의 흉흉한 소문만 빼놓고 본다면 벨리온은 정말 완벽한 신랑감 그 자체였기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서…….’

울피림 대공이 되는 조건에 얼굴색 안 변하기 같은 것이 있나 심히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 그때 델리나를 바라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광대.”

“네?”

“황실에서 알아챘다, 네 존재를.”

“……!”

훈훈했던 공기가 확 바뀌었다. 펠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까?”

“아니. 에드윈이 알려 줬지.”

벨리온의 손에는 에드윈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당황한 델리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대공가를 향한 황제의 경계심은 생각보다도 더 강한 모양이었다.

“디아몬 공작가의 존재도 알아 버렸고.”

“그러면 사실상 후원받는 분들의 존재는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델리나에 이어 노아까지. 숨기고 있던 아이들의 존재가 거의 다 드러났다. 펠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는데요.”

“…….”

“아가씨의 황궁 방문이 불가피해 보이니까요.”

하이르가 델리나에게 관심을 가지리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벨리온은 딱히 부정하지 않고 침묵했다.

‘황궁으로? 내가?’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무려 황제였다. 델리나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돼.”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요. 황궁에서 호출이 왔는데.”

벨리온이야 쉽게 말한다지만 황제의 부름에 답하지 않으면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그쪽에서도 제게 아무 이유 없이 이상한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거예요.”

“…….”

“괜찮아요. 저도 예상 안 한 것도 아니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황궁과 대공가가 부딪히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델리나는 부러 밝게 말하며 벨리온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벨리온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 * *

이렇게 빨리 또 로즈립 후작가를 방문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교 모임에 초대를 받아 오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내리시면 됩니다, 아가씨.”

하물며 이번 사교 모임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사교 모임도 걱정스러운데 다른 걱정거리에 델리나는 후작가로 오는 내내에도 마음이 복잡했다.

‘아니야, 일단은 집중, 집중.’

이미 벌어진 일인데다 각오도 했다. 델리나는 우선 제가 있는 곳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베티와 했던 연습의 성과를 보여 주듯, 델리나는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기존에 왔었던 모임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수가 꽤 되는 마차들이 후작가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영애들의 모습에서 델리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드레스 색깔이…….’

분명 편지에 쓰여 있던 드레스 코드는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영애들은 저마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델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머,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세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때마침 영애들을 마중 나오기라도 한 듯, 저택의 문이 열리며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녀의 드레스 색깔 또한 푸른색이었다.

“어쩜.”

푸른 드레스의 영애들 사이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델리나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델리나를 보던 실비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영애? 제가 분명 편지로 드레스 색을 알려 드렸을 텐데요.”

실비아의 말에 다른 영애들이 델리나를 쳐다봤다. 동시에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있던 델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 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붉은색 드레스는 너무하지 않나요?”

실비아의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델리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델리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로즈립 후작가로의 사교 모임이, 결코 제게 호의적인 것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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