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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그 다섯 놈들이 나한테 집착해! (30/94)


30화 그 다섯 놈들이 나한테 집착해!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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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훈련장에 가십니까?”

벨리온이 가벼운 차림으로 있을 때는 어김 없이 실내 훈련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펠릭이었다. 벨리온의 시선이 펠릭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펠릭 밑으로 쌓여 있는 책으로 말이다.

“아, 이번에 새로 들여오는 책들입니다. 간만에 들여와서인지 권수가 제법 되네요.”

한눈에 봐도 제법 많은 양에 벨리온이 책을 쭉 훑어보았다. 벨리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예법책이었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책들입니다. 저번 사교 모임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지셨는지 앞으로도 예법 공부는 하셔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사교 모임이 왜.”

“보다 은밀하게 사람을 열받게 하고 싶으시답니다.”

“?”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모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펠릭 곁에는 예법책 외에도 전술책이나, 교양책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있었다. 그중 벨리온의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들이 있었다.

“저건 뭐지?”

벨리온의 손가락 끝이 분홍빛 표지를 가진 책을 가리켰다. 그러자 펠릭이 책을 손에 들었다.

“아, 이것도 아가씨가 부탁한 책입니다. 로맨스 소설이죠.”

“…….”

“어디 보자……. 이건 《공녀의 101가지 이혼법》이네요. 아, 확실히 명작이죠. 여주인공이 어떻게든 이혼 서류를 안 찢게 하려고 석판에 글을 새겨서 이혼 서류를 만드는 게 가장 압권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추억입니다.”

옛 추억에 빠져 책장을 넘기는 펠릭을 가만히 바라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잘 알지.”

“제 전전전 애인이 작가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유명 로맨스 소설이란 소설은 다 접해 봤습니다. 당시에 집필에 영감도 준다고 각종 이색 데이트란 데이트는 다 했었는데……. 오, 이것도 정말 유명한 건데요.”

다른 책을 훑던 펠릭이 또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벨리온도 그 책 제목을 읽었다.

《그 다섯 놈들이 나한테 집착해!》

범상치 않은 제목에 벨리온이 물었다.

“오 대 일로 싸우나?”

“아니죠. 이건 여러 남자들이 동시에 한 여자를 좋아하는 겁니다. 여기서는 다섯 명이 여주를 좋아하고요. 그리고 그 다섯 명이 여주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움을 벌이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다양한 남주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으니 독자분들의 만족도도 좋죠.”

무슨 장사꾼이 된 양 펠릭이 열렬히 책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펠릭의 열정 어린 설명에도 벨리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걸 왜 보는데.”

“그야 아가씨도 열두 살이지 않습니까. 이제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은 나이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책도 보게 되고요.”

“…….”

“실제로 아가씨 또래 영애들도 정말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역시 아가씨는 아가씨군요. 어떻게 이렇게 딱딱 명작 소설로만 선별을 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벨리온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책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제 상사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짓던 펠릭이 말을 이었다.

“참, 훈련장 가신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늘도 전부 다 오셨습니다.”

“전부?”

“예. 황태손 전하까지요.”

아슈드는 두말할 것도 없고, 모두 모이는 일이 굉장히 드문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일이 잦아졌다. 벨리온이 눈썹을 올리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펠릭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겠습니까. 아가씨 때문이겠죠.”

“…….”

“아가씨께서 대공가에 오신 순간부터 다른 분들이 오시는 빈도수가 훨씬 많아지셨는데요. 확실합니다.”

“광대 때문에?”

“그 나이에 이성에게 관심이 많아지는 건 영애들뿐만은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아가씨 앞으로 약혼장 날아올 곳이 이미 몇 군데 있겠는데요.”

확신하듯이 펠릭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 * *

“…….”

델리나는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공중에 떠 있었다. 반센트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함정 잘 피해 보겠다며.”

그러게나 말이다…….

호기롭게 훈련장에 도착해 반센트의 함정을 피해 다니겠다고 말한 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또 이렇게 한 번 더 공중에 매달린 신세가 된 델리나였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듯, 차마 풀어 달라고 말 못 하던 델리나가 잠깐 우물거리다 항변했다.

“분명 잘 피하고 있었는데, 저 원숭이 때문에……!”

델리나 위쪽에는 보란 듯이 그물 위에 앉아 끽끽대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웃고 있던 노아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내가 선물한 원숭이한테.”

“아니. 됐으니까 도로 데려가.”

“저거 정말 귀한 원숭이라고. 사람이랑 지능이 거의 비슷한 황금 원숭이야. 그래서 쉽게 잡을 수도 없는 동물이지.”

귀하고 안 귀하건 간에, 지금 델리나는 제발 저 원숭이가 안 보였으면 했다. 조금 전까지 제 밥을 뺏어 먹는 것도 모자라 지금 또 저렇게 바나나까지 까먹고 있으니 말이다.

“황금 원숭이라면 예전에 멸종했다고 알려졌던 원숭이잖아.”

“그렇지.”

“사람이랑 지능이 비슷하면 쟤보다 지능이 높겠는데.”

“그럴지도 모르고.”

이것들이.

지금 바로 멸종시키고 싶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델리나가 눈을 부라리는데 옆에 있던 젠이 물끄러미 델리나를 올려다보다 물었다.

“재밌어?”

베티의 사랑의 주먹과 교육으로 어느새 잘 걷고 짧은 질문도 할 수 있는 젠이었다. 델리나는 젠의 말에 거세게 부정했다.

“아니. 재미없어.”

“내려?”

“잠깐, 잠깐. 저기 밧줄 있지? 저걸로 살살 내려야 돼. 응? 살살 뜻 알지?”

혹여 또 공중에서 밧줄을 풀까 봐 델리나가 다급히 젠 옆에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그러자 젠이 곧장 밧줄을 이용해 델리나를 공중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응. 좋아. 아주 좋아. 그렇게 살살, 살살 내리면…….”

혹시라도 엉덩방아를 찧을까 봐 주의하며 델리나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시 올려, 올려!”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슈드와 칼릭스의 모습에 델리나가 기겁하며 손을 빠르게 위로 흔들었다.

악!

하지만 손짓을 잘못 해석한 젠이 빠르게 내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서 보다 더 빠르게 밧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은 델리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곧 제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눈치챘다.

“…….”

“……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황족이라는 자리가 원래 이렇게 한가한 건가 싶었다. 유달리 자주 등장하는 아슈드에, 델리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슈드는 그런 델리나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말했다.

“너.”

“…….”

“이거 끝나면 할 거 없지.”

“아뇨. 있는데요.”

방심했다가는 바로 납치당해 황궁 연회장 한복판에 세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할 일을 찾기 위해 델리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 있던 칼릭스를 가리켰다.

“칼릭스랑 같이 저녁 먹기로 해서요!”

난데없이 지목당한 칼릭스가 어이가 없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칼릭스를 향해 델리나가 다급히 손가락을 쫙 벌린 채 입을 달싹였다.

열 접시, 디저트 열 접시.

디저트 열 접시 먹기를 보여 주겠다는 델리나의 은밀하고도 빠른 손짓에 칼릭스가 대번에 태도를 바꿨다.

“맞는데.”

“…….”

“얘랑 약속한 거.”

황궁 연회장에서 그 수치스러운 걸 또 하느냐, 아니면 배가 터지느냐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델리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녀가 소화제를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아슈드가 받아쳤다.

“저녁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으니까, 얘 넘겨.”

“싫어.”

아슈드의 말을 칼릭스가 대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벌해졌다. 노아와 반센트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어디 걸래? 난 울피림 쪽에 10골드.”

“나돈데.”

“에이, 뭐야. 그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눈앞에서 싸운다고 태연히 돈을 거는 두 사람과, 싸움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신이 나서 네발로 기기 시작한 젠을 보고서 아찔해진 델리나가 이마를 짚었다. 델리나는 이 엉망진창인 분위기를 잠식시켜 줄 유일한 한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델리나의 바람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전하!”

몹시도 반가운 벨리온의 얼굴을 본 델리나가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델리나의 모습에 무슨 일인가 싶어 벨리온이 자리에 가만히 섰고 델리나가 생존 본능을 발휘해 벨리온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싸우는 건가?”

서로를 날 선 눈으로 보는 아슈드와 칼릭스를 보고서, 벨리온이 물었다. 그러자 노아가 싱글벙글 웃었다.

“네. 광대 덕분에요.”

저게.

분했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델리나가 침묵으로 동의하자 벨리온이 앞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델리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다섯…….”

작게 중얼거린 벨리온이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

낮고 묵직한 벨리온의 목소리에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아슈드와 칼릭스가 벨리온에게 집중했고, 노아와 반센트, 젠도 벨리온을 쳐다봤다.

갑자기 진중해진 분위기에, 델리나조차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벨리온이 제 바로 밑에 있던 델리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광대를 사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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