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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능력남 (31/94)


31화 능력남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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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델리나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하지만 제 귀는 멀쩡했다. 그제야 델리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세요?”

너무나도 어이없는 이야기에 델리나가 말까지 더듬었다. 당황한 것은 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섯 아이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사랑?”

젠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정의가 바뀌었나.”

제 뇌에 학습했던 것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을 들은 양 황당한 얼굴의 반센트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신체가 아니라 정신을 단련하는 건가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노아가 물었으며.

“…….”

칼릭스는 말이 없었지만 무슨 곰팡이가 핀 디저트라도 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나마 아슈드가 정상적으로 질문했지만 상대가 벨리온이 아니었다면 황족 모독죄로 잡아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들이.’

퍽 다채로운 아이들의 거부 반응에 델리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벨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됐고.”

‘그게 끝?’

아이들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서 벨리온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당해진 아이들이 벨리온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펠릭이 들어왔다.

“아, 역시. 아직까지 여기 계셨네요, 전하.”

“왜.”

“오늘 기사들 훈련 봐주기로 한 날 아닙니까. 저도 까먹고 있다가 모시러 왔습니다.”

벨리온이 일정을 떠올린 듯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펠릭과 아이들을 잠깐 바라보더니 곧 들고 있던 목검을 펠릭에게 던졌다.

“그럼 여기는 네가 해.”

“예? 제가요?”

펠릭이 몹시 하기 싫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저도 정말 무척이나 전하의 말씀을 따르고는 싶은데요. 참 아쉽습니다. 지금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많아서…….”

“이거 하고, 내일은 나오지 마.”

“여기는 걱정 마시고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아주 오랜만에 받는 휴가에 펠릭이 생기가 도는 얼굴로 무척이나 정중한 자세로 벨리온을 배웅했다. 델리나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분위기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가는 게 어디 있어!’

펠릭이 목검을 손에 쥔 채 아이들 사이에 피어난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니. 별일 없었어.”

“그래요?”

델리나의 말에도 펠릭은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닌데요. 뭔가 더 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분위기가…….”

“…….”

“하지만 제가 어떻게 예의 없이 전하와 있었던 일에 함부로 묻고 그러겠습니까.”

“응, 응. 그렇지? 그러면 빨리 훈련 시작하자.”

벨리온은 그렇다 쳐도 펠릭이 방금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 정말 10년은 놀릴 것이다. 마치 재미있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는 펠릭의 얼굴에, 델리나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애썼다. 비로소 펠릭이 화제를 바꿨다.

“그러면 오늘 훈련은 이걸로 할까요? 정해진 시간 안에 제가 쥐고 있는 목검을 떨어트리게 하면 성공한 것으로요.”

“그래. 그러자.”

뭐든 좋으니 빨리하면 그만인 델리나였지만, 펠릭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충실히 훈련에 참여 안 할 수 있으니까요. 실패하면 아주 작은 벌칙 하나를 받는 걸로 할게요.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는 걸로.”

야, 이…….

훈련을 핑계로 제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펠릭의 환한 얼굴에, 델리나가 황당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벨리온이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만 펠릭이라면 제게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다른 아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에게 왜 그러냐고 델리나가 물을 새도 없이, 펠릭의 목검이 빠르게 날아왔다.

“!”

“아, 역시. 목검은 간만이라서 힘 조절이 어렵네요.”

척 봐도 꽤 두꺼운 목검이 펠릭의 손짓 한 방에 부러지고 말았다. 델리나가 놀라서 주춤거리는 사이, 다른 목검을 손에 가지고 온 펠릭이 싱긋 웃었다.

“그러면 시작할까요?”

펠릭의 말에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가장 먼저 돌진한 이는 젠이었다. 하지만 젠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가 델리나 바로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뭔데, 뭔데!

단 한 번도 펠릭의 싸움 실력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델리나가 입을 쩍 벌렸다. 델리나의 반응을 본 노아가 입을 열었다.

“뭘 새삼 놀라. 몰랐어?”

“……뭘?”

그때 반센트가 중얼거렸다.

“울피림 대공가 기사단 최연소 대장, 그리고 최연소 은퇴.”

“……!”

“그럼에도 여전히 실력은 대공가, 아니 제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펠릭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휴, 그때나 그랬지 지금은 현역 때보다 못하죠. 비만 오면 온몸이 쑤시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보란 듯 제 허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다가도, 펠릭의 손은 매섭게 아이들을 향해 뻗어 갔다. 펠릭의 이력을 몰랐던 델리나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빠르게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오, 아가씨. 잘 피하시네요. 하지만요. 여기서는 좀 더 왼쪽으로 몸을 트시는 편이 좋습니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족족 쳐 내는 펠릭의 모습에, 델리나는 초조한 얼굴로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모래시계는 이미 반쯤 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안 돼. 뭔가 수를 쓰지 않으면…….’

“너희. 이기고 싶지?”

델리나가 어느새 펠릭에게 당해 한구석에 널브러진 아이들을 보며 비장하게 물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다. 그사이 델리나는 빠르게 창을 생성했다.

“그 광대 기술인가 뭔가 쓰려고?”

“응.”

델리나가 뭘 하려고 하는지 빠르게 눈치챈 반센트가 물었다. 수많은 키워드를 살펴보던 델리나가 그중 하나를 골라 눌렀다.

‘제발, 제발 좀 멀쩡한 거길……!’

<능력남>

아이들 위에서 빛나는 키워드를 보고서, 델리나는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 불쑥 펠릭이 끼어들었다.

“뭐 또 재미있는 거라도 하셨나요, 아가씨?”

순식간에 다가온 펠릭을 채 피하지 못한 델리나가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이었다.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펠릭과 델리나 사이를 막았다.

“……!”

그 무언가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펠릭의 검을 막기는 했지만, 지금의 몸놀림과 힘은 아까와 달랐다. 펠릭도 그를 알아차린 듯 아이들을 막아 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거 괜찮은데.”

제 몸이 달라진 것을 눈치챈 노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아이들도 제가 쥔 무기를 휘두르거나, 몸을 움직여 보며 달라진 몸을 확인했다.

몸이 가진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

능력남 키워드 효과에 놀란 델리나가 멍한 얼굴로 싸우는 아이들의 몸놀림을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쥐고 있는 물건을 다루는 숙련도도 자연스레 올려 주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멀쩡한 게 나왔어……!’

델리나는 드디어 멀쩡한 능력 하나를 찾았다는 것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때 한 번 더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물체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펠릭의 목검이었다.

“어이쿠, 이런.”

목검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래시계가 마지막 모래 알갱이를 흘려보냈다. 아슬아슬한 성공에, 호흡을 가다듬던 아이들과 델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뭐죠, 갑자기? 다들 너무나 잘하던데. 이것도 아가씨의 광대 기술인 거예요?”

“응. 뭐, 그렇지.”

델리나가 멋쩍게 웃자 펠릭도 입꼬리를 올렸다.

“아, 역시. 아가씨 근처에만 있으면 재밌는 일이 끊이지를 않는다니까요.”

“…….”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성공입니다.”

‘……다행이다, 진짜…….’

성공이라는 말에 긴장이 풀린 듯 델리나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붙어 볼까?”

넘치는 힘을 발산이라도 하듯 웃으며 노아가 제안하자, 다른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그러자 잘되었다는 듯 아슈드가 칼릭스를 노려보았다.

“내가 여기서 이기면 쟤 넘겨.”

“해 봐.”

또 싸워?

“잠깐……!”

놀란 델리나가 말릴 새도 없이 자세를 잡은 아이들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

그 누구보다 눈을 빛내며 서로에게 달려들던 아이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델리나가 놀란 얼굴로 달려갔고, 펠릭도 아이들을 살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괜찮습니다. 기절만 하신 거네요. 이것도 아가씨 기술인가요?”

“기절?”

‘아, 설마…….’

갑작스레 몇 배나 되는 힘과 능력을 쓴 탓에 몸이 급하게 피로해진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쩐지 멀쩡한 능력 하나 나오나 했다…….’

능력 부작용으로 기절한 아이들을 델리나가 아연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여전히 능력은 여간해서는 쓰기가 쉽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급히 답장해야 할 편지가 와서…….”

그때 편지를 들고 온 베티가 문을 열고 들어서다, 쓰러진 아이들과 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델리나를 발견했다.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아니야. 그런 거.”

델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기 시작한 베티를 향해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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