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모임 끝나고 어디 놀러 가나?
(28/94)
28화 모임 끝나고 어디 놀러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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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모임 끝나고 어디 놀러 가나?
2023.06.28.
“오늘 모임 끝나고 우리 집에서 놀다 갈래? 자고 가도 되고.”
아직 주최자인 실비아가 오지 않았기에 영애들은 자유롭게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델리나 맞은편에 앉은 에일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늘은 일찍 가기로 해서.”
“그러면 허락만 받으면 되잖아. 지금 사용인들 보내면 너희 집 들르는 건 금방이고.”
물론 백작가라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델리나가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백작가에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델리나는 제 새 보호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임 끝나고 어디 놀러 가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한 질문이 좀 의외의 것이긴 했지만, 왠지 늦게 오지 말라는 소리인 것 같았다. 델리나 역시 굳이 다른 곳으로 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델리나는 마음을 굳히고 에일리에게 말했다.
“나 지금 백작가에 없어.”
“뭐? 그러면?”
“잠깐 사정 있어서 조금 먼 친척 집에 있거든. 당분간은 거기서 살 거야.”
“그럼 나 놀러 갈래!”
“……안 돼. 집주인분이 누구 놀러 오는 걸 싫어해서.”
울피림 대공가에 에일리라니.
참 묘한 조합에 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리고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너 로맨스 소설 같은 거 많이 보잖아.”
로맨스 소설이라는 말에 에일리가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너도 보려고?”
“음……. 좀 관심이 생겨서.”
분명 제가 가진 능력의 키워드는 로맨스 소설에서 볼 법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우선 그것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키워드 의미가 소설이랑 완전히 다 똑같은 건 아닌 것 같지만…….’
화려했던 키워드 능력들을 떠올리던 델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그…… 대형견남이라고, 그거 설마 진짜 개가 되는 걸 말하는 건 아니지?”
“뭐?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인 거지??”
드디어 능력이 이상한 게 맞다고 확신한 델리나의 얼굴이 감격으로 젖어 들었다. 에일리가 덧붙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지. 설마 대형견남이라고 진짜 개가 되겠어?”
“…….”
“그래도 네가 그런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진짜 소설에 관심이 생긴 것 같은데, 일단 조금만 알려 줘 보자면…….”
잠시 고민하듯 에일리가 두 손을 모았다.
“계약 결혼에 관련한 이야기가 많아.”
“계약 결혼?”
“응. 우선은 계약 결혼을 해. 그리고 나중에 이혼하자고 하는 거지. 그러면서 이혼 서류를 보여 줘. 그러면 이제 그 계약 남편이 계약서를 찢거나 없애는 거야.”
“……그거 계약 위반 아니야?”
“에이, 그게 묘미지. 어? 딱 여주 앞에서 이혼 서류를 갈기갈기 찢는 남주! 얼마나 멋져!”
사랑만 있으면 법은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곧 델리나는 키워드에 무법남 같은 것은 없었는지 열심히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사라지는 것도 있어. 그러면 상대방 쪽에서 책임지라며 찾아오는 거지. 그러다가 또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
“…….”
“아, 시한부 여주도 있어. 근데 죽지는 않아. 어차피 여주는 안 죽거든. 아무튼 거기서 여주가 시한부라고 도망치면 남주가 열심히 찾는 거지.”
“아, 그…… 됐고, 그냥 초심자가 꼭 읽어야 하는 로맨스 소설이나 추천해 줘. 읽어 보게.”
이대로 가면 날밤을 새울 것 같아서 델리나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러면 《공녀의 101번째 이혼법》이랑 《그 다섯 놈들이 나한테 집착해!》 이것도 꼭 봐 봐. 또 뭐가 있더라? 아! 좀 오래된 거긴 한데 《아카데미 서열 1위 공자의 마누라가 되었다》 이것도 괜찮고 또…….”
때마침 그때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에일리의 책 추천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실비아가 나타나자 다른 영애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한가운데에 앉은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디 좋은 모임이 되었으면 해요.”
델리나 또래인데도 모임을 주도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영애들은 실비아가 주최한 모임을 칭찬해 주기 바빴다.
“초대해 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해요, 실비아 영애.”
“맞아요. 역시 로즈립 후작가라 그런지 정원이 몹시 아름답군요.”
“다과는 또 어떻고요. 제가 알기로 이 쿠키는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든데 여기서 먹게 되네요.”
영애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실비아는 그것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델리나는 그저 눈앞에 놓인 차를 음미할 뿐이었지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제인이었다.
“……!”
제인은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눈으로 델리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델리나의 시선은 다른 것을 향해 있었다. 바로 제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
‘저거, 내가 데뷔탕트 때 입었던…….’
디자인을 조금 고치긴 했지만, 드레스를 입었던 당사자인 델리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입었던 드레스를 고쳐서 제인이 입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인 옆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제 생일 선물이 될 예정이었던 강아지였다. 드레스에 이어 강아지까지, 제 것을 하나하나 빼앗아 가지는 제인의 모습에 델리나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곧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제인이 곁에 있는 영애들과 무어라 수군거렸다. 그 주제가 좋지 않을 게 뻔해서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찻잔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뭐야, 왜 갑자기 손을 그렇게 떨어?”
“세 번 참는 중.”
“?”
델리나와 제인이 남모를 대치를 하는 동안에도 다른 영애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주제는 데뷔탕트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데뷔탕트이긴 했어요. 다양한 분들도 많이 오셨고요.”
“네, 네. 맞아요. 정말 이번 데뷔탕트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특히 이번에 울피림 대공가에서 온 분도 보셨나요?”
‘음?’
대공가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자 델리나가 귀를 쫑긋댔다.
“분명 대공 전하의 먼 친척분이라고 하셨죠? 전하께서 가면을 쓰시긴 했지만, 그래도 두 분이 닮은 것 같더라고요.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봐요.”
‘닮긴 닮았지. 특히 가만히 있으면 더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벨리온의 맨얼굴을 알고 있는 델리나는 소리 없이 동의했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꺼냈다. 어지간해서는 사교계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벨리온이었기에, 더더욱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 가면은 왜 쓰시는 걸까요?”
“저는 큰 흉터 자국이 있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칼에 베였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요? 제가 듣기로는 눈을 마주하면 기절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하던데요.”
“살기를 감추려고 쓴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어쩐지 장르가 점점 공포로 바뀌어 갔지만 델리나는 그저 쿠키만 먹었다. 그러자 에일리가 델리나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뭐가.”
“그 가면의 비밀 말이야. 역시 그거 아닐까? 전하한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만이 숨겨진 눈을 볼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어느 날 어떤 비극으로 인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한 전하가 그 이후로 남들 앞에서 가면을…….”
“쿠키나 먹어. 맛있네.”
장르를 또 한 번 바꾸는 제 친구를 심드렁하게 보며 델리나는 그 입에 쿠키를 넣어 주었다.
“디아몬 공작가는 또 어떻고요? 이번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잖아요. 데뷔탕트를 한 영식이 공작님의 먼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벌써 공작님께서 그 영식을 후계자로 낙점하셨다고.”
“엘피샤 후작가도 그래요. 그분은 후작님의 사촌 동생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엘피샤의 이름으로 데뷔탕트를 했다는 건…….”
대공가뿐만 아니라 간간이 다른 가문들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사실 지금 영애들이 말하고 있는 가문들은 가주 모두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후계자 문제가 심심찮게 불거졌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들이 갑자기 데뷔탕트에 아이들을 데려왔으니, 당연히 모두의 관심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실비아가 말했다.
“그분들이라면 제가 곧 만날 예정이에요.”
“어머, 정말요?”
“저희 가문과 디아몬 공작가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거든요. 조만간 다 함께 만나 식사도 하기로 했거든요. 또 엘피샤 후작가와도 조만간 만나기로 했고요.”
실비아의 말에 모든 영애가 관심을 보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귀족 중에서도 단연 지체가 높은 디아몬 공작가와 엘피샤 후작가였다.
그런 이들을 만난다는 말에 영애들이 부럽다는 듯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델리나만이 그 둘을 만난다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 잠깐 내 토끼 좀 보고 올게. 얘가 여기 풀이 맛있어서 그런지 도통 보이지를 않네.”
한동안 대화가 오간 후,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그사이 에일리는 제 토끼를 찾으러 정원 안쪽으로 향했고, 다른 영애들도 저마다 흩어져서 동물들을 보거나 수다를 떨었다. 델리나는 원숭이가 사고라도 칠까 봐 꽉 안고 있었다.
“끽.”
“가만히 있어. 가만히.”
“끽!”
야, 이…….
델리나의 품이 답답한 듯 연신 발버둥을 치는 원숭이와 녀석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델리나였다. 그렇게 둘이 온몸을 다해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즈음, 델리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제인과 다른 영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