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광대 공연의 필수 동물들
(27/94)
27화 광대 공연의 필수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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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광대 공연의 필수 동물들
2023.06.27.
사교 모임 전까지, 델리나는 유례없는 집중력을 발휘하며 베티와의 수업을 끝마쳤다. 베티는 단기간에 정말 잘 따라왔다며 칭찬했지만, 글쎄. 델리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영애라도 베티의 손기술 몇 번 본다면 충분히 잘 배우리라 생각했다.
사교 모임 전날, 드디어 델리나는 벨리온이 데려왔다는 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무려 지하 감옥의 거대한 창살 앞에서 말이다.
“…….”
“골라 봐.”
눈앞에 있는 동물들을 보며 델리나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벨리온이 말했다. 하지만 델리나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불곰이랑 사자랑 악어 중에 선택하라는 거죠?”
하물며 새끼도 아니었다. 다 자란 몸집이 어마어마한 동물들이 금방이라도 철창을 부수고 나올 듯 사납게 델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광대 공연을 보면 이런 것들이 있던데.”
“……네. 하지만 전 공연이 아니라 사교 모임에 가는 거잖아요.”
사교 모임이 악어 입에 머리를 넣고 누가 누가 더 많이 버티나, 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델리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켜 줄 수 있지.”
누구한테서 누굴?
지켜지기는커녕 당장에라도 잡아먹힐 것 같았다. 지금도 저를 잡아먹을 듯이 침을 질질 흘리는 저 짐승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델리나가 도와 달라는 듯 펠릭을 바라봤지만, 펠릭은 델리나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델리나는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벨리온에게 중요한 일을 결코 맡기지 않으리라고.
“아가씨? 그래도 나름 괜찮을 수도 있어요. 애들이 여러모로 눈에 띄니까…… 아가씨의 첫 사교 모임을 멋지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요.”
“그래. 그리고 내 마지막 사교 모임으로 만들어 주겠지.”
결국 펠릭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델리나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하지만 이제 다른 동물을 구할 시간이 없었다. 델리나가 끔찍한 현실에 두 눈을 꽉 감았다.
“이 녀석들이 싫으면 늑대들도 있는데.”
“전하. 정말 이런 소리까지는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델리나를 더 절망하게 만드는 벨리온의 말에 펠릭이 끼어들었다.
“아가씨. 괜찮습니다. 예, 뭐 사실 저도 전하께서 어떤 동물을 준비하셨는지 오늘 알긴 했지만요. 그래도 아직 동물 하나가 더 남아 있거든요?”
“응. 그래……. 그건 또 얼마나 큰데?”
“아뇨. 아주 작은 동물이에요.”
“진짜?”
델리나가 희망을 찾은 듯 눈을 빛내며 창살 너머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자 빈 곳인 줄 알았던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작게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살 앞까지 바짝 다가선 델리나가 무릎을 굽혀 그것과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구석에서 작은 동물이 나왔다. 털이 황금빛인, 새끼 원숭이였다.
“원숭이?”
“예. 새끼 원숭이인데, 어미 원숭이가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인 걸 데려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잘 먹었는지 그런 기색은 없어 보였다. 원숭이는 델리나를 빤히 보다가 앞으로 뽈뽈뽈 다가왔다.
“사실 다른 동물들도 디아몬 공작가 상단에서 가져온 것들인데요. 이 원숭이는 노아 님이 아가씨께 선물하는 겁니다.”
“뭐?”
노아가 선물했다는 말에 델리나가 본능적으로 원숭이에게서 물러섰다.
“예. 사교 모임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동물이 어디 있겠냐면서요.”
“……사교 모임에 원숭이가 그렇게 좋은 동물인지는 몰랐지만…….”
‘선물한 의도는 알겠군.’
원숭이를 선물하며 웃었을 노아의 모습을 떠올린 델리나가 분에 찬 듯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저기, 안녕?”
철창 사이로 델리나가 슬며시 원숭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미를 잃고 혼자 있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어딘가 제 모습이 겹치는 듯해서 델리나는 원숭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거 바나난데 먹을래?”
델리나가 들고 있는 바나나를 보고 원숭이가 쪼르르 다가와 어느새 델리나 바로 앞까지 왔다. 원숭이가 순순히 다가오자 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고, 펠릭도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더 와서……, 악!”
“끽!”
더 가까이 다가온 원숭이에게 뺨을 맞지만 않았다면 훈훈한 분위기는 좀 더 오래갔을 것이다.
“야, 야이…….”
델리나의 뺨을 때리고 바나나만 쏙 빼간 원숭이는 원래 있던 구석으로 가 델리나를 조롱하듯 웃었다.
원숭이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부여잡은 델리나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원숭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솟았다.
“너 당장 안 와? 뺨을, 내 뺨을……!”
“끽, 끽, 끽!”
분노로 찬 델리나가 창살 사이로 손을 넣고 이리저리 휘젓자, 원숭이가 킥킥 웃으며 바나나를 먹었다.
곁에 있던 벨리온은 이를 구경하듯 바라보았고, 뒤에 있던 펠릭은 웃음을 참은 채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그사이에도 델리나의 분노에 찬 외침이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 * *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드디어 사교 모임 당일이었다.
로즈립 후작가까지 가는 길은 딱히 별다른 일이 없었다. 델리나는 후작가에 도착했다는 사용인의 말에 마차에서 나와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마차들도 속속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린 영애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응. 다녀올게.”
가문의 문양이 없는, 평범한 마차에서 내리는 델리나에게 시선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동물들을 데려온 영애들은 저마다 눈을 빛내며 사교 모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
“…….”
델리나도 다른 영애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을 데리고 가고 있었지만 그녀와 원숭이는 서로를 향해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지난날의 앙금이 남아 있는 델리나는 원숭이를 노려보고 있었고, 원숭이는 델리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너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있어.”
“끽.”
사교 모임에 참석은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데려오긴 했지만,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델리나가 시작부터 좋지 못한 얼굴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델리나!”
다름 아닌 에일리였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늦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여전하네.
모습이 어려졌어도, 오랜만에 봤음에도, 제 친구는 한결같았다. 변함없는 에일리의 모습에 델리나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 뭐야? 너 원숭이야?”
델리나의 어깨 위에 있는 원숭이를 본 에일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원숭이도 에일리에게 관심을 보이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아지는 어쩌고?”
“그게 좀 사정이 생겨서. 그리고 다가가지 마. 얘가 워낙에 폭력적이어서…….”
“그래도 귀엽네!”
저놈이?
어느새 에일리의 품에 안긴 원숭이는 에일리에게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델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얘 이름은 뭐야?”
“이름? 이름…….”
그제야 원숭이에게 이름 하나 안 지어 준 걸 알아차린 델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음, 털색이 황금색이니까…….’
“누렁이?”
“끽!”
델리나의 누렁이 소리에 원숭이 꼬리가 델리나의 팔을 강타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무어라 소리치지도 못하고 델리나가 한 번 더 원숭이를 노려보았고, 질세라 원숭이도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직 못 정했어. 데려온 지 얼마 안 된 애라서 고민 좀 하느라. 그런데 너, 토끼는?”
“벌써 정원에서 놀고 있지. 확실히 로즈립 후작가야. 진짜 정원 하나도 어마어마하다니까?”
확실히 로즈립 후작가의 저택 규모는 제국 내에서 손꼽힐 만했다. 두 사람은 잠시 실비아가 기르는 동물들을 바라보다가 곧 모임이 진행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너 도대체 언제 데뷔탕트 한 거야? 할 거였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럼 같이 들어갔을 텐데.”
“……좀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갔거든.”
“하긴. 어차피 그날 아파서 나도 빨리 가 버렸고……. 아, 진짜. 이번에 데뷔탕트에서 재밌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나만 못 보고.”
“재밌는 일?”
“너는 봤을 거 아니야? 이번에 황태손 전하랑 단독으로 춤췄던, 분홍 머리 영애.”
“아, 아아. 그랬지. 응.”
에일리의 말에 델리나가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에일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쉴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지금 그것 때문에 데뷔탕트를 앞둔 영식들이 그렇게 열심히 춤 연습을 하고 있대.”
“……그런 이야기가 있어?”
“어. 특히 파트너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그렇게들 열심히 한다더라고.”
본의 아니게 제국의 춤바람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에 델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번 일에 상당히 분노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슈드.
데뷔탕트에서의 일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 때문에 황궁 어딘가에서 분노의 포효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델리나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델리나가 어떤 심정인지 모르는 에일리는 아쉬움을 듬뿍 담은 어조로 말했다.
“나도 데뷔탕트에서 춤추고 싶었는데! 황태손 전하 얼굴도 보고.”
“……너 전하한테 관심 있어?”
“흠, 전하한테 관심 있기보다는……. 잘생긴 얼굴에 관심이 있지. 너 알잖아. 나 눈 높은 거.”
“아……. 눈이 높아서, 눈이 높아서 그렇게…….”
기드온이랑 서로 좋다고…….
에일리의 말에 델리나의 눈이 순간 갈 곳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친오빠한테 잘생겼다고 말하는 에일리의 모습을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응. 그래……. 좋은 남자 만나길 바랄게.”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이 있는 정원이 나타났다. 다른 영애들의 모습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