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 광대, 건드리지 마
(22/94)
22화 내 광대, 건드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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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내 광대, 건드리지 마
2023.06.22.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사용인들에게 상황을 다 전해 들었으면서도 니엘과 샬롯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곧 문이 열리며 벨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 전하……?”
벨리온을 본 두 사람의 안색이 달라졌다. 하지만 정작 벨리온은 그런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델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자.”
가자는 한마디에 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델리나가 벨리온의 뒤를 따라가려고 움직이는 순간, 니엘이 그녀를 막아섰다.
“델리나! 넌 또 어떻게 나온 거야?”
그러고는 델리나의 팔을 억세게 잡고서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델리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 악력에 델리나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크악!”
델리나의 팔을 움켜잡았던 니엘이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제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이는 한순간에 다가온 벨리온에 의한 것이었다. 강하게 손으로 벨리온이 니엘의 손목을 내려치자, 그대로 니엘은 비틀대며 쓰러졌다.
“내 광대다.”
“…….”
“손대지 마.”
“그게, 그게 갑자기 무슨…….”
제 손목을 잡고 끙끙대던 니엘이 벨리온의 말에 차마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살살 눈치를 봤다.
“그냥 빨리 가요. 전 괜찮아요.”
어김없이 이어지는 광대 소리에 경악한 델리나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벨리온의 존재감 때문에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이는 없는 듯했다.
“이미 인사할 사람들한테는 다 인사해 뒀어요. 더 이상, 우왁!”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델리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델리나를 덥석 안아 든 벨리온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러고 가려고요?”
“빨리 가자며.”
“어, 그렇긴 하지만요…….”
“광대면 더 빠르게 갈 수 있나.”
“빨리, 빨리 갈까요?”
또다시 튀어나오는 광대라는 말에 델리나가 벨리온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델리나는 벨리온의 품에 안겨 릴리와 기드온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그 뒤로는 수월했다. 루튼의 전언을 들은 것인지 사용인들은 델리나가 대공가의 마차를 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걱정과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델리나가 눈짓으로 연신 괜찮다는 의사를 보내고 있을 즈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할아버지한테 허락받으신 건가요?”
둘만 남게 되자 델리나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래. 광대 보호자로.”
보호자.
지금껏 보호자라는 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단어였다. 그 보호자라는 단어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핍박을 받고 얽매인 삶을 살았던가. 그것은 감히 표현할 수 없었고, 또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있잖아요……. 감사해요. 솔직히 저 데리러 오실 거라고는 상상 못 했거든요.”
“왜?”
“그야 전 솔직히 일반적인 방법으로 대공가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진짜 뛰어난 재능으로 후원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재능은커녕 또래 아이들 하나도 이길까 말까 하는 몸뚱이였다. 하지만 벨리온은 덤덤했다.
“넌 나와 약속을 했고 이겼지. 그걸로 된 건데.”
“그렇긴 한데요. 하지만…….”
“그리고, 광대의 재능은 대단해.”
진지하게 광대의 재능을 칭찬하는 벨리온의 말에 결국 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광대 보호자는 좀 그렇지 않나요? 델리나라는 이름도 있는데요.”
“좋은데. 광대 보호자.”
이상하지. 덤덤한 얼굴로 보호자라고 하는 당신의 말에 기분이 묘하게 좋은 것은.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 어 근데…… 제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안 해 주시면 조금 더 좋고요.”
지금은 그 어떤 열 가지 꾸며 낸 말보다 덤덤한 그의 한마디가 더 좋았다. 그래.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
“참.”
“?”
벨리온이 무언가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황궁에서 네 존재를 눈치챌 수 있어.”
“……설마 전하께서 저를 데리고 온 것 때문에요?”
“그래. 그래도 넌 갈 건가? 대공가에.”
갈 거냐고 묻는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근데요. 그건 백작가를 떠나기 전에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벨리온이 침묵하자 델리나가 웃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대공가에 갔을 때부터 그걸 생각 안 한 것도 아니고……. 이미 황족 한 명한테는 단단히 찍혀 버렸거든요.”
화려했던 아슈드와의 춤을 떠올리며 델리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황족 한 명한테 찍히나 두 명한테 찍히나 황족과 얽히는 건 똑같았다.
“저기, 혹시 황태손 전하 정도는 이길 수 있나요?”
“이겨.”
“아뇨. 그…… 물리적으로 말고요.”
아슈드와의 끔찍한 미래를 떠올린 델리나가 사뭇 심각하게 벨리온에게 의논하려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펠릭!”
곧 마차도 멈춰 섰다. 델리나를 본 펠릭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돌아오셨군요! 역시, 그렇다면……!”
“응. 맞아. 할아버지가 허락해 주셨어.”
“그거 정말 잘됐습니다. 이제 아가씨가 대공가에 없으면 재미, 아니 활기가 없어지는걸요.”
중간에 뭔가 이상한 말이 하나 있는 것 같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펠릭은 싱글벙글이었다.
“저도 좋습니다. 이제 아가씨가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나설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요! 이제 아가씨가 주먹질을 하면서 울피림 대공가 이름을 팔아도 상관없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무튼 고마워.”
골목에서 주먹질하면서 대공가 이름 팔기라. 썩 유쾌하지가 않아서 델리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황궁 일 마무리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백작가에 따라가는 거였는데, 아쉽네요.”
“아쉽긴. 별일 없었어.”
다락방에서 뛰어내리고, 백작가 내부가 뒤집어진 데다가, 벨리온이 니엘의 손을 내려친 것 등등의…… 일들이 있었지만 그저 델리나는 미소로 일관했다. 지금은 이렇게 함께 모인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어?”
곧 펠릭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델리나가 외마디를 뱉었다. 펠릭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 뒤로 보이는 칼릭스의 모습에 델리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펠릭이 싱글벙글 웃었다.
“칼릭스 님도 같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래?”
자발적으로 같이 기다렸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가 싶었다. 델리나는 고맙다는 듯 살짝 손을 흔들었고, 칼릭스는 그런 델리나를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요. 아까 오빠랑 무슨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마차에 오르기 전 달려온 기드온이 벨리온에게 무언가 소곤거리는 것을 본 델리나였다. 그러자 벨리온도 답했다.
“디저트처럼 단 거랑 짠 거를 번갈아 먹이면 더 많이 먹일 수 있다던데.”
“…….”
야, 이…….
그제야 기드온에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한 델리나였다. 이야기를 듣던 펠릭이 신기한 듯 물었다.
“오빠분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아가씨. 많이 드셔야 합니까?”
“아니, 아니.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고…….”
델리나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디저트 이야기에 어느새 눈을 빛내는 한 인물이 있었기에.
“……아, 아홉 접시 정도?”
결국 아홉 접시라 말한 델리나였다. 그 말에 벨리온도 펠릭도 의외라는 얼굴로 델리나를 바라보았고, 델리나는 그저 눈물만 삼켰다.
* * *
그렇게 요란스러운 데뷔탕트가 끝이 났다. 대공가에 돌아온 델리나도, 제법 평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기드온의 말에 흥미를 보인 벨리온이 식탁에서 델리나에게 아홉 접시를 내어 주지만 않았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델리나에게 제공되는 음식량이 제법 많아졌다.
벨리온이 백작저를 다녀갔으니 당연히 소란스러워질 것이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잠잠했다.
델리나가 펠릭에게 전해 듣기로는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디아몬 공작가의 입김이 닿았다고 했다.
물론 백작저에 왔었다는 소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벨리온이 사적으로 볼일이 있어 백작저에 갔다고만 알려졌을 뿐 델리나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알아내려고 파헤치면 어쩔 도리가 없겠죠. 황궁 측에서 그 일을 조사할지도 모르고요.”
울피림 대공가에 워낙 날을 세우고 있는 황실이기에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델리나는 펠릭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사실 뭐 그쪽도 그쪽이지만 또 다른 쪽도 문제지…….’
델리나는 데뷔탕트 연회를 떠올렸다. 아슈드와 춤을 추다가 기드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도망쳤던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슈드와 만나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란 것.
‘아니지. 시험 때는 신분을 안 들키려고 나한테 얼굴도 안 보여 줬었잖아? 그러면 대공가에서는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면 화가 좀 가라앉을지도 모르고…….’
델리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여기 있군.”
바로 눈앞에 아슈드가 떡하니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것도 얼굴에 한가득 분노를 담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