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과묵남
(23/94)
23화 과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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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과묵남
2023.06.23.
“…….”
델리나는 분노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슈드를 보는 짧은 몇 초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아슈드가 대공가에 왔고, 그런데 얼굴도 안 가린 상태이고, 그 정도로 지금 몹시 열이 받았고, 그러면…….’
도망!
그것은 위기를 감지한 인간의 생존 본능과도 같았다. 짧은 고민을 마치고 순식간에 몸을 튼 델리나가 복도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살벌한 아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못 서?”
“전하. 일단 진정하시고……!”
와아악!
진정이고 뭐고 델리나가 도망가는 시점에서 이미 눈이 뒤집힌 아슈드였다. 델리나는 더 빨리 달렸지만 곧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
델리나가 무언가를 밟은 순간, 장치 소리와 함께 델리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익숙한 그 느낌과 동시에 그물 안에 갇힌 델리나의 눈에 근처로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반센트!’
“설마 했는데, 이걸 또 걸리네.”
또 반센트가 설치한 장치에 걸려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델리나에게 그물 함정은 무척이나 안락하고 포근했다. 바로 밑에 있는 성난 아슈드를 피할 수 있다면.
“좋은 말 할 때 저거 풀어.”
“안 돼. 아직 실험이 안 끝나서.”
그래. 풀지 마. 풀지 마.
아슈드가 으르렁거림에도 반센트는 태연하게 제 실험 노트를 꺼내 들었다. 델리나는 속으로 반센트를 열렬히 응원했다. 이 순간만큼은 반센트의 실험 대상이 되는 것쯤 대환영이었다.
“그때 데뷔탕트 춤추는 걸 보고 연구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
“…….”
“10대 초반 남녀의 평균 힘에 대한 것과, 효과적으로 사람 하나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물리적 방법.”
정정하겠다. 환영이고 뭐고 아주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반센트의 말에 델리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아슈드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그럼. 그때 장면은 공짜로 보면 안 될 만큼이나 진귀했는데.”
기름에 이어 땔감까지 퍼 나르는 이가 나타났다. 노아가 나타난 것을 보고 델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빚 조금은 감면해 줄게.”
“…….”
“그런 진귀한 장면은 당연히 돈 주고 보는 게 맞으니까.”
빚이고 뭐고, 일단 내가 살아야 뭘 갚든지 할 거 아니니…….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멸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델리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복도의 소란을 눈치채고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칼릭스였다.
음, 그래. 구해 줄 건 기대도 안 한다.
디저트가 공중에 매달려 있으면 몰라도, 칼릭스에게 복도 한복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델리나는 그리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델리나는 아이들이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슈드는 어느새 모여든 이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델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됐고.”
“…….”
“너, 그때 나랑 춤췄던 거 다시 해.”
“……여기서요?”
“아니. 황궁에서.”
황궁에서?
자신을 두 번 죽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인가 싶었지만 아슈드의 눈빛은 진지했고 열의로 타올랐다.
“잘 돌릴 수 있어.”
“아뇨. 그게요…….”
“너도 날 들었는데 내가 너 하나 못 들까 봐?”
자신이 델리나를 들지 못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슈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델리나가 말했다.
“원래 저희 나이 정도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더 셀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요. 제 드레스가 그때 어마어마하게 무거웠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미치지 않은 이상 황궁에 가서 춤을 다시 출 수는 없었다. 델리나는 아슈드가 자신을 드는 데 실패한 이유를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이가 있었다.
“나는 너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디저트랑 눈치를 바꿔 먹었는지 덤덤히 말하는 칼릭스의 말에 아슈드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그러자 반센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이런 가정도 세울 수 있지.”
반센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제국의 황태손 전하께서 평균 또래 남자들보다 힘이 약한 걸지도.”
야,야…….
쐐기를 박는 듯한 반센트의 말에 절망한 델리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재밌다는 듯 웃고 있던 노아도 가만히 서 있던 칼릭스도 각자 한마디씩 보탰다.
“우리 길드에서 힘세지는 영양제 같은 것도 팔고 있는데.”
“많이 먹고 운동하면 힘세져.”
두 사람이 말을 마치자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온몸을 부들거리던 아슈드의 얼굴이 더 험악해지자 다급해진 델리나가 재빠르게 창을 켰다.
‘뭐, 뭐 없나? 좀 이 상황에 좋을 만한 게……!’
“내가 무슨 힘이……!”
크게 외치던 아슈드의 입이 빠르게 닫혔다. 아슈드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고, 똑같이 입술이 닫힌 다른 아이들도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겨우 고요해지자 델리나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묵남>
‘진짜 끝내주게 과묵해지기는 하는군.’
우선 분위기가 더 흉흉해지지는 않았기에 델리나는 아이들이 이제 좀 진정할까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안 나오자 아이들이 가만히 제 입을 만졌다. 그중 유일하게 델리나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반센트였다.
“…….”
반센트의 시선이 위로 향하자 덩달아 모두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향했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모두 이게 델리나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아이들은 서로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델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짜, 짠. 내 광대 기술 어때?”
“…….”
델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물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가까워지자 델리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 기술 풀어 줄 테니까 나 가만 냅둬야 돼? (짜잔, 풀렸지?) 응? 얘들아?”
왜 서로 으르렁대다가 이럴 때만 끝내주게 협력이 잘되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델리나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아이들은 몸을 움직였고 그물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어, 거기서 다들 뭐 하시고 계세요?”
‘펠릭!’
지금 이 순간 펠릭의 목소리가 눈물 나도록 반가웠다. 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게다가 펠릭 곁에는, 벨리온도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왔다.
“소란스럽길래 뭔가 했더니 사이좋게 놀이를 하고 계시는 중이었군요?”
“아니야!”
마냥 해맑은 펠릭의 말에 델리나가 재빠르게 부정하며 연신 눈으로 구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아이들의 시선은 델리나를 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벨리온 바로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젠?’
델리나도 젠을 알아봤다. 감옥에 있을 때와 달리, 젠의 얼굴과 몸은 많이 나아 있었고, 심지어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젠!”
델리나가 그를 불렀다. 두 발로 걷는 게 어색한지 연신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젠이 델리나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젠은 순식간에 네발을 써서, 델리나에게 달려왔다. 땅으로 내려오다가 멈춘 상태인 델리나는 여전히 공중에 있었다.
“많이 좋아졌네? 내가 준 스카프도 하고 있고.”
아직까지는 두 발과 네발을 섞어 쓰는 듯했지만 들짐승 같던 모습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젠을 보던 아이들 중 하나가 벨리온에게 물었다.
“뭡니까, 이건?”
“오늘 시험 볼 거.”
시험이라는 말에 델리나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맞다. 원래 젠을 데려온 것도…….’
분명 젠의 어떤 재능을 봤기 때문일 터였다. 젠은 그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델리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뛰어올랐다.
“!”
그물이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는데도 단숨에 델리나의 그물까지 올라온 젠이 그대로 그물의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이빨로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놀란 델리나가 말리듯 말했다.
“저기, 젠? 넌 몰라도 난 여기서 떨어지면 엉덩이가 깨질 수 있거든? 저기, 내 말 들리니? 젠?”
한편 젠이 높이 뛰는 것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반센트가 벨리온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저희가 시험 봐야 하나요?”
귀찮아질 것 같은데, 하고 반센트가 이어 중얼거리자 다른 아이들이 침묵으로 동의했다. 벨리온이 젠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내가 하지.”
벨리온이 시험을 보겠다는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사이 어느새 이빨로 매듭을 다 푼 젠이 끈을 툭 하니 놓자, 서서히 그물이 풀어지더니 델리나가 밑으로 떨어졌다.
“……!”
엉덩이가 깨질 걸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은 델리나였지만, 다행히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밑에서 벨리온이 델리나를 받아 준 덕분이었다.
“그, 그물.”
그사이 가뿐히 땅으로 내려온 젠이 입을 달싹였다. 그러자 펠릭이 신기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할 줄 알았군요? 몰랐습니다.”
“그럼. 내가 감옥에서 단어 알려 주고 그랬는데 효과가 있나 봐.”
벨리온의 품에 안긴 채 델리나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젠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도 가르쳐 줬어.”
“오, 그랬습니까?”
“응. 자, 젠.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델리나가 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잠시 멀뚱히 있던 젠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