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21/94)
21화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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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2023.06.21.
처음에는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플로렌 저택에 있는 벨리온이라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림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벨리온이 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울피림 대공의 등장에 사용인들이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델리나는 그 소란 속에서도 저를 올려다보는 벨리온을 마주 봤다.
“광대.”
“…….”
“가야지.”
광대라는 그 한마디가 왜 이리 사람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심한 얼굴로 저를 부르는 벨리온의 음성에,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저 데리러 오신 거예요?”
델리나의 말에 벨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델리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까 뛰어내려.”
“여기서요?”
“광대는 그런 건 못 하나?”
여전히 저를 광대로 대하는 것마저 반가울 지경이었다. 델리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뛰어내릴 수는 있는데, 아마 그게 제 마지막 공연이 될 거예요.”
“그건 싫은데.”
“그렇죠? 그러니까…….”
“그럼 뛰어.”
“네?”
저가 잘못 들었나 싶어 델리나가 묻는 그 순간, 벨리온이 두 팔을 벌렸다. 그제야 델리나도 벨리온의 의중을 파악했다.
“……받아 줄 테니까 뛰어내리라고요?”
“응.”
진심인 듯한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받아 준다 한들 사실 델리나는 정말로 뛰어내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야! 너 또 우리 무시해? 너 진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
응. 뛰어내리자.
제이크의 목소리에 델리나는 결심했다. 곧바로 창턱을 밟은 델리나가 사뭇 비장하게 벨리온을 한 번 보고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가씨!”
그 모습을 본 사용인 중 한 명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마저도 찰나였다. 곧 벨리온의 품 안에 안착한 델리나는 그제야 질끈 감은 눈을 떴다. 눈앞에 벨리온의 얼굴이 있었다.
“잘 뛰는데. 광대라서 그런가.”
“네. 공중 광대 쇼인데요. 백 년에 한 번밖에 못 봐요. 사실상 마지막 공연이죠.”
어느새 자연스레 벨리온의 품에 안겨 있는 델리나의 모습에 사용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중 하나가 용기 내어 물었다.
“대, 대공 전하.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리고 아가씨는 왜……?”
“플로렌 백작을 보러 왔는데.”
벨리온의 말에 질문한 이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다시 물었다.
“무슨 용무인지 제가 감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광대 데리러 가려고.”
“……광대요?”
광대라는 말에 주변 분위기가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델리나가 다급히 벨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할아버지 어디 계시는지 알아요. 안내할게요.”
델리나의 말에 벨리온은 지체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벨리온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벨리온과 델리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아, 아가씨?”
“난 괜찮으니까 다들 일들 봐. 진짜 괜찮아.”
그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의 공포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다들 품에 안긴 델리나를 인질이라 생각한 듯 벨리온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릴리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델리나가 괜찮다는 미소를 보냈지만 이미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여기, 여기예요.”
사용인들의 심신 건강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벨리온을 방으로 안내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머지않아 방이 보이기 시작했고, 벨리온의 품에서 빠져나온 델리나가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델리나?”
문을 열면 보이는 침대에는 노인이 걸터앉아 연신 마른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바로 델리나의 할아버지이자 플로렌 백작가의 백작. 루튼이었다.
“세상에 델리나……. 델리나 맞니?”
방 안으로 들어오는 델리나의 모습에 루튼이 손을 떨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응? 언제 저택에는 돌아온 거고?”
“죄송해요, 할아버지. 정말 꼭 가야 하는 곳이 있었거든요.”
루튼의 손을 마주 잡은 델리나가 뒤에 있는 벨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요.”
“응? 누구길래……?”
델리나의 말에 루튼도 덩달아 벨리온을 바라보았다. 상대를 확인한 루튼이 작게 입을 벌리다 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나를 아는군.”
“늙은 육체로 침대에 있다 한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하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하고 델리나는 생각했다.
“한데 왜 대공 전하께서 제 손녀와……?”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예?”
서론 한 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벨리온의 말에 기겁한 델리나가 나섰다.
“그러니까요. 할아버지. 제가 대공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어요.”
“후원이라니……. 델리나 네가?”
대공가니, 후원이니, 난데없는 상황에 루튼이 당황한 듯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네. 대공가의 후원 이야기는 할아버지도 잘 아시죠? 거기서 재능을 인정받아서 대공 전하께 후원을 받기로 했어요.”
“그래. 듣기는 들었지만……. 무슨 재능으로?”
그 말을 덥석 받은 것은 벨리온이었다.
“광대로.”
“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광대처럼 웃음을 줄 수 있는 재능이죠!”
어떻게든 순화시키기 위해 델리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튼은 멍한 얼굴로 벨리온과 델리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허락해 주시면 저 대공가에 머물고 싶어요.”
“……대공가에?”
“순전히 제 의지로 가는 거예요, 할아버지. 저 정말 대공가에 가고 싶어요.”
절대 협박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하듯, 델리나는 강렬한 눈으로 루튼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감고 고민하던 루튼이 입을 열었다.
“그래. 델리나. 그러면 잠시 전하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으니 먼저 나가 있겠니?”
“아……, 네.”
왠지 걱정되어서 델리나가 벨리온을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벨리온은 별말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델리나가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진짜 심장 약한데.’
혹 벨리온이 또 이상한 말을 할까 봐 불안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델리나였다. 하지만 델리나는 방을 나서자마자 다른 이를 마주해야 했다.
“아가씨!”
“릴…… 케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릴리가 빗자루를 쥐고 몸을 덜덜 떨고 있다가 델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 좀 숨이 막혀…….”
“어디 뭐 협박당하시기라도 한 거예요? 백작님은요?”
“두 분이서 이야기 중이야.”
“네? 두분이서요?”
벨리온이 루튼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릴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자 델리나가 릴리를 달랬다.
“이상한 거 아니야. 협박도 아니고, 그리고 아마 나, 대공가에 갈지도 몰라.”
“아가씨가요?”
“응. 사용인들한테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 혹시 가게 되면 릴리가 나 대신에 말 좀 잘해 줘. 걱정 마. 릴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험한 건 아니니까.”
이번에는 델리나가 릴리를 안았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릴리잖아. 그런데 봐 봐. 내가 지금 릴리한테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내가 정말 원해서 가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대공가에 가는 거야 말한다 쳐도 후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공가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으니까.
“야!”
그때 또 소란을 피울 만한 인물이 나타났다. 기드온이었다.
“너, 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오빠.”
벨리온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정신없이 달려온 기드온이 눈을 크게 뜬 채 델리나를 쳐다봤다. 릴리의 품에서 나온 델리나가 기드온에게 다가갔다.
“오빠한테는 이미 말했으니까 짧게만 설명하자면, 나 대공가로 가게 될지도 몰라.”
“뭐?”
“뭐 협박이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오빠 손목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어.”
“……그걸 왜 내 손목으로 하는 건데?”
어이없다는 듯 받아치면서도 기드온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가는 거야?”
“응. 갈 거야. 아주 헤어지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고.”
이어 델리나는 기드온에게 조금 몸을 붙이고 낮게 소곤거렸다.
“그리고 오빠. 그 두 사람, 너무 믿지는 마.”
두 사람이라고 에둘러 표현했으나 그것이 니엘과 샬롯을 의미한다는 걸 눈치챈 기드온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평소와는 다르게 델리나를 강압적으로 대한 것이나, 다락방에 가둔 것이 기드온에게도 퍽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델리나의 말에 기드온 또한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그리고 역시…… 왔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둘이 안 나타날 수 없을 것이었다. 델리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니엘과 샬롯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