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엄마 아빠도 없으면서!
(20/94)
20화 엄마 아빠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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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엄마 아빠도 없으면서!
2023.06.20.
“……누가 데려가?”
“춤추시고 난 다음 아가씨가 사라지셔서 찾아봤습니다만, 그…… 플로렌 백작가 측에서 데려간 것 같습니다.”
펠릭의 보고를 듣는 벨리온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황궁에서 귀족 영애를 납치해 가다니,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델리나를 끌고 간 이들이 플로렌 백작가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플로렌 백작가라면 그 광대 영애가 원래 속한 곳이잖아.”
에드윈이 벨리온 대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지할 수 없어. 설령 너라도.”
지금 공식적으로 델리나가 속해 있는 곳은 플로렌 백작가였다. 그러니 플로렌 백작가 사람이 델리나를 데려가려 한다면, 상대가 울피림 대공가라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시 울피림으로 데려가면 그거야말로 납치지 뭐.”
“……그건, 맞습니다.”
펠릭이 자기 힘으로 어쩌지 못하고 벨리온에게 보고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펠릭과 에드윈의 시선이 벨리온에게 쏠렸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광대는 제 발로 그곳에 갔나.”
“아뇨. 황궁 기사들에게 듣기로는 억지로 끌려가는 듯했다고 합니다.”
“그럼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벨리온이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이 뒤에서 물었다.
“가려고? 그 영애 데리러?”
“…….”
“알고는 있지? 네가 그 백작가로 가는 순간 파급력이 엄청날 거라는 건.”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간에 주목을 받는 벨리온과 울피림 대공가였다. 그런 그가 플로렌 백작가에 간다는 것부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었다.
“분명 황궁까지도 소문이 퍼질 거고……. 그렇게 되면 그 영애도 주목받겠지.”
늘 울피림 대공가를 향해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하이르의 눈에 당연히 델리나 또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썩 좋지만은 못했다.
“까딱하다가는 그 영애도 위험해질 수 있고 말이야. 그런데도 구하러 갈 거야?”
쐐기를 박듯 에드윈이 묻는 말에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아가씨. 괜찮으세요?”
플로렌 백작가 저택의 동쪽. 그 한구석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 문 앞에 선 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먹을 것을 들고 온 그녀가 안에 갇혀 있는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먹을 것이랑 마실 것 가지고 왔어요. 어서 드세요.”
“고마워, 릴리.”
가만히 음식을 받아 드는 델리나를 보고서, 릴리는 감정이 북받친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말이에요, 아가씨. 처음에 아가씨가 다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제가 기뻤는지 아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갇히신 거예요?”
그날 데뷔탕트에서 저택에 끌려온 델리나를 보고 사용인들은 모두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니엘과 샬롯은 델리나를 곧장 다락방에 가둬 버렸다.
[어디에서 그런 후원을 받았는지 이야기 안 해 주면, 그 벌로 널 다락방에 가둘 수밖에 없구나.]
[델리나. 이해하지? 우리도 너한테 벌을 주기는 싫지만, 때로는 이렇게 훈육이 필요하단다.]
‘훈육은 무슨, 가둘 거면 방에라도 가둬 놓든가.’
사실 훈육은 핑계고 또다시 델리나가 저택을 빠져나갈까 봐 감시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미 다락방에서 몇 년이나 살았었기에, 델리나는 이곳이 지긋지긋했다.
‘내 드레스도 가져가고…….’
데뷔탕트에서 입었던 드레스도 이미 샬롯이 가져가 버렸다. 드레스가 어디로 갔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제 드레스를 입고 있을 제인을 떠올리자 온몸이 뒤틀릴 정도로 짜증 났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안 울어도 돼.”
“그래도요. 가뜩이나 밖에서 고생하셨을 텐데, 또 이렇게 다락방에 갇혀 계시기까지 하시고…….”
“고생은 무슨, 나 진짜 잘 있었다니까?”
물론 늑대한테 죽을 뻔하고 벨리온 침실에서 그에게 죽을 뻔했으며, 기타 등등 죽을 뻔하기는 했다. 델리나가 그 이야기를 다 하면 릴리는 기절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잘 있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거 봐. 거기서 음식도 잘 줘서 살도 쪘어.”
“확실히 그건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냥 한 소리였는데 나 진짜 그렇게 쪘어?”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인정하는 릴리의 말에 델리나도 진지한 얼굴로 제 뱃살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요 아가씨. 지금은 그 두 분도 아가씨가 사라진 게 너무 놀라서 그러시는 걸 거예요. 저도 빨리 아가씨가 다락방에서 나올 수 있게 요청드려 볼게요.”
“응. 고마워.”
“아니에요. 다른 사용인들도 지금 얼마나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참고 계세요 아가씨!”
다시 씩씩해진 릴리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델리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다가 음식을 들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
유일하게 빛과 바람이 드는, 작은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델리나가 있는 곳의 높이는 상당했다. 척 봐도 뛰어내릴 수 없을 것 같은 높이에 델리나는 빵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뛰어내려 봐?
물론 어디 하나 부러질 것을 각오해야겠지만, 사실상 어마어마한 도박이었다. 그렇다고 다락방 문을 따고서 도망가자니 마주치게 될 기사들이나 사용인들이 문제였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성인 한 명은커녕 또래 아이 하나 제압할 수 없었다.
진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네…….
델리나가 자신의 처지에 서글퍼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이 있으면 뭐하는가, 과거로 도로 돌아오면 뭐하는가. 제아무리 저택의 구조를 잘 안다 한들 지금의 능력으로는 다락방 탈출도 못 하는데.
“……데리러 올까?”
상황이 이쯤 되자 델리나는 벨리온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희망적인 생각을 해 봤지만 그마저도 확신이 없었다.
그렇지, 사실 데리러 오지 않는 게 더 가능성이 있지…….
자신의 침실로 숨어 들어온, 수상하기 그지없는 여자애가 후원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지금 광대라고 불리며 후원을 받고 있다지만, 사실상 저는 그에게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닌가. 다른 아이들처럼 이렇다 할 재능이 정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데리러 올 리가 없는데…….’
그런 자신을 받아 주고 데뷔탕트까지 치르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
‘아니면 또 모르지. 광대라면 방 탈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벨리온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어서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
델리나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영 반갑지 않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제이크와 제인이었다.
“…….”
물론 델리나는 그 둘을 보자마자 표정을 한없이 일그러뜨렸다. 제이크와 제인이 델리나를 보고는 이죽거렸다.
“와, 진짜 다락방에 가둬 놨다더니, 진짜네?”
“…….”
“거기 살기는 좋아? 너한테 딱인데.”
제 부모가 델리나를 다락방에 가뒀다는 것에 기세등등해진 듯, 제이크와 제인은 델리나를 놀리기 바빴다. 정작 델리나는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네랑 이야기하는 것도 힘 빠지니까 그냥 내려가.”
“웃겨. 너 지금 다락방에 갇힌 거 몰라서 그래? 너 자꾸 우리한테 이러면 엄마 아빠한테 말한다?”
“어, 말하든가. 기왕이면 잘 좀 말해서 나 좀 쫓겨나게 해 주면 더 좋고.”
보통이 아닌 놈들과 지냈던 지금의 델리나에게 제이크나 제인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델리나가 두 사람에게 흥미를 잃고 도로 창문으로 가자, 제이크와 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다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엄마 아빠한테 말해서 너 평생 여기 가둬 두라고 할 거야!”
“오늘 날씨가 좋네.”
“어차피 너 꺼내 줄 엄마 아빠도 없으면서!”
그 말에 처음으로 델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델리나의 반응을 알아차린 두 사람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졌다.
“진짜 우리 말 안 들으면 안 꺼내 준다?”
천천히, 델리나의 얼굴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델리나의 서늘한 표정에 잠시 움찔한 제이크가 외쳤다.
“뭐, 뭐! 그렇게 보면 어쩌게?”
“……됐고, 그냥 가.”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둘에게까지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괜히 흥분하지 마. 저렇게 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락방에 갇히고서 수백 번을 들었던 말이었다. 그랬기에 무뎌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한때는 다락방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결과는 같았다. 자신은 여전히 다락방에 갇혀 있었고, 제이크와 제인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은 상황에, 델리나가 어깨를 바르르 떠는 그 순간.
“광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창문 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델리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창문 바로 밑에 서 있는 벨리온을.
“전하……?”
백작가에 벨리온이 찾아왔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에 델리나가 입을 달싹였다. 벨리온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얼굴로 델리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