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렇게 변할 리가 없는데
(19/94)
19화 이렇게 변할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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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이렇게 변할 리가 없는데
2023.06.19.
니엘과 샬롯을 본 순간 델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재빨리 달아나려고 했지만, 니엘과 샬롯이 그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빠르게 다가온 니엘이 델리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델리나? 정말 델리나니?”
그렇게 부르며 니엘이 델리나의 가발을 벗기자, 숨겨져 있던 보랏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델리나……!”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니엘과 샬롯의 말에도 델리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을 뿐이었다. 반면 니엘과 샬롯은 델리나를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드레스는 이게 뭐야? 누가 준 거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
“델리나.”
제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델리나의 모습에 니엘의 미간이 미미하게 꿈틀댔다. 델리나가 니엘의 팔을 뿌리치려고 몸을 뒤흔들었다.
“다른 분의 후원으로 입고 왔어요.”
“……뭐?”
어쩔 수 없이 대답하자 샬롯이 먼저 반응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드레스를 매만지며 샬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제인이 입은 드레스보다 더 비싸 보이는데……. 이걸 정말 너한테 후원해 줬다고? 정말?”
은연중에 델리나와 제인의 드레스를 비교하는 샬롯의 말에, 델리나의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네. 확실히 저한테 뺏은 드레스보다 더 비싸 보이죠?”
“뺏다니, 델리나. 잠깐 제인한테 빌려주는 거였잖아.”
“나중에 돌려주실 생각은 있으셨고요?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못 돌려받은 게 몇 개인데요.”
날카로운 델리나의 말에 놀란 듯 니엘과 샬롯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델리나의 말은 쉬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오늘 제이크가 입은 옷도 오빠 꺼잖아요. 정작 오빠는요? 오늘도 저 찾는 게 아니었어도 오빠 데리고 올 생각이셨어요?”
“델리나, 너…….”
“늘 이런 식으로, 몇 년이고, 몇 년이고……. 그렇게 변명하고 하다가 데뷔탕트도 못 가게 하고, 가둬 두고……”
애써 꾹꾹 억누른 채 쌓아 두고 있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럽고 억울했다. 오늘 이토록 아름답고 활기찬 데뷔탕트를 보니 더욱 그랬다.
과거에 이런 아름다운 광경 하나 보지 못하고 다락방에 웅크린 채 살았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비로소 자유롭게 풀려나 보게 된 광경이 화염에 휩싸인 수도 광장이라는 것도,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너…….”
자신의 동생이 니엘과 샬롯에게 보이는 적대감에 놀란 듯, 기드온의 입이 달싹였다. 니엘과 샬롯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지금 따로 머무는 곳이 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집으로 도로 안 돌아가겠다고?”
백작가로 가지 않는다는 말에 니엘의 눈썹이 올라갔다. 덩달아 놀란 샬롯이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세상에, 애가 무슨 세뇌라도 당한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변할 리가 없는데.”
“그래,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착한 델리나가 그럴 리가 없지.”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델리나의 반항에 놀라면서도, 델리나를 이렇게 만든 원흉이 따로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세뇌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가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고, 거기서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다니, 애초에 네 집은 따로 있잖아, 델리나! 지금 할아버지도 널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
‘할아버지…….’
그 말에 처음으로 델리나가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허락받으면 되는 거겠네요.”
“……뭐?”
“어차피 저희 진짜 보호자는 할아버지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허락은 할아버지한테 받으면 되고요.”
작위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고 자신을 다락방에 가둔 순간부터, 그들을 보호자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야 산더미 같았지만 아직은 저 둘과 함께 저택에 있어야 할 기드온을 위해 델리나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못다 푼 감정들을 다스리듯 델리나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너, 너…… 정말…….”
그러자 니엘의 눈이 서늘해졌다. 표정을 굳힌 니엘이 델리나의 팔을 잡았다. 샬롯도 가세했다.
“애가 가출도 하더니, 어디 나쁜 곳에 가서 세뇌까지 단단히 받은 모양이에요.”
“얼른 돌아가자, 델리나. 이야기는 집에서 다시 하고. 내가 너를 혼낸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좀 단단히 혼이 나야 할 것 같구나.”
강하게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델리나가 이를 반항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델리나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이거 놔요!”
“놓으면 또 그 나쁜 곳으로 가려고? 얼른 집에 다시 가야지!”
“싫어. 안 가요, 안 간다고요!”
한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델리나가 몸을 버둥거렸고, 소란을 알아차린 기사 몇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들을 보고 델리나의 얼굴이 환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잽싸게 니엘이 나선 것이다.
“이번에 데뷔탕트 데뷔한 내 조칸데, 얘가 자꾸 황궁이 좋다고 집에 안 간다고 떼를 그렇게 써서……. 소란 피워서 미안하네. 곧 가지.”
“조카분이 맞습니까?”
“그럼. 얼굴만 봐도 모르겠나. 여기 신분 패도 있고.”
기사들은 니엘의 신분 패와 얼굴만 확인하고는 별다른 제지 없이 뒤돌아섰다. 델리나가 놀라 외쳤다.
“잠……!”
하지만 델리나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샬롯이 손을 올려 델리나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 델리나. 이만 집에 돌아가야지?”
“……!”
결국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고, 저항도 할 수 없었던 델리나는 그저 무력하게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데뷔탕트가 진행되는 홀과는 달리 발코니는 고요했다. 발코니에 가만히 앉아 있던 벨리온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커튼을 열고 나오는 곳에는 에드윈이 서 있었다. 하지만 벨리온은 가만히 에드윈을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라도 받아 주지?”
벨리온의 반응에 피식 웃던 에드윈이 다가왔다.
“나도 아까 봤어.”
“…….”
“그 영애.”
델리나를 봤다는 말에 그제야 벨리온이 반응했다.
“난데없이 광대라니, 처음에 들었을 때는 뭔 소리인가 싶었거든. 무슨 은어 같은 건가 싶었는데 네가 애초에 그렇게 복잡한 짓을 하는 놈도 아니고, 그렇다면 진짜 광대로 들여왔다는 건데…….”
조금 전 아슈드와 델리나의 춤을 떠올린 듯 에드윈이 큭큭 웃었다.
“덕분에 돈 안 내고 아주 진귀한 장면을 봤네.”
“…….”
“그래서 뭐야. 진짜 광대로 들여온 거야?”
벨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윈 또한 예상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듣긴 들었어. 시험도 보고, 후원도 받고 있다고.”
“…….”
“노아 그 애도 무슨 일인지 흥미를 보이고 있고. 확실히 그런 거 보면 진짜 평범한 영애는 아닌 모양이야.”
벨리온 대공가와 디아몬 공작가.
별다른 접점이 없는 듯한 두 가문이었지만 두 사람의 퍽 친밀한 듯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표정이 영 안 좋은 걸 보니까 황제 폐하랑 오붓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왔나 보지?”
“…….”
“왜, 또. 무슨 말을 했길래.”
에드윈이 벨리온의 미간에 주름을 보며 물었다.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을 궁금해하고 있지.”
“…….”
“넌 아이를 대공가에 계속 보내도 괜찮나.”
지금 노아는 은밀하게 대공가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그 사실을 들킨다면 분명 디아몬 공작가도 황가의 경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걱정되는 듯 벨리온이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음, 뭐. 그럼 계속 안 들키지 뭐.”
“…….”
“물론 아주 안 들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에드윈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노아도 그걸 알고서 대공가에 가는 거니까. 그건 그 아이의 의지고 나도 딱히 막을 생각은 어.”
“…….”
“게다가 황궁이든 울피림 대공가든 둘 다 소중한 우리 고객님들인걸. 난 둘 다 포기 못 해.”
에드윈답다면 에드윈다운 말이었다. 벨리온도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아, 근데 그 영애랑은 대화를 좀 더 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돼?”
“안 돼.”
“에이, 뭐 내가 너 앞에서 이상한 걸 팔겠어? 그냥 좀 궁금한 것도 묻고, 서로 좀 훈훈한 시간 가지면 좋잖아.”
“훈훈하게 뭘 팔겠지.”
“안 그런다니까.”
철벽을 치는 듯한 벨리온의 반응에 에드윈이 실실대며 웃는 그때였다. 요란스레 커튼이 열리며 펠릭이 발코니로 왔다.
“전하. 좀 일이 생겼습니다.”
“뭐.”
“그게, 아가씨 관련인데…….”
이어지는 펠릭의 말에 벨리온의 미간이 점차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