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직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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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직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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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직진남
2023.06.13.
“……잘 있었니?”
오늘 델리나는 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신경 쓰이기도 했고, 선물로 받았다는 건 웃기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탓이었다.
“어휴, 아주 싹싹 비웠네. 맛있지? 나도 철창생활해 봐서 아는데, 진짜 여긴 밥이 맛있게 나오더라고.”
젠의 모습은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치료는 잘 받지 않는 듯 붕대는 이리저리 풀어져 있었고, 목에는 피딱지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치료는 안 받아?”
“…….”
“뭐, 너 딴에는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너 진짜 그러면 철창에서 못 벗어나.”
첫날에 비해 조금 얌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젠은 델리나를 경계했다. 으르렁대는 젠 앞에 풀썩 앉은 델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보여 주며 물었다.
“너도 같이 먹을래?”
“…….”
“나도 여기서 좀 먹고 가려고. 요새 뭘 먹을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아홉 접시 사건 이후 자꾸만 뭔가를 먹을 때마다 칼릭스가 있나 주변을 살펴보는 판국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은밀한 곳에서 먹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자, 반절 줄게.”
“…….”
“빵은 처음 먹나? 이상한 거 전혀 안 들었어.”
이어 델리나가 빵을 한입 떼어 먹었지만 그럼에도 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델리나는 덤덤했다.
“안 먹으려면 말고. 소식하는 것도 몸에 좋다더라. 넌 좀 먹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순식간에 빵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코를 킁킁대던 젠이 작게 입을 벌려 빵을 받아먹었다.
“……!”
한번 빵을 맛본 젠은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손을 사용하는 법도 까먹은 듯, 그는 델리나의 손에 들린 빵을 입으로만 먹어 치웠다. 델리나는 물 잔도 내밀었다.
“그러다 체해! 천천히 먹어!”
순식간에 델리나의 손에 있던 빵 하나가 사라졌다. 입맛이 도는 듯 혀로 입술을 쓱 핥던 젠이 델리나가 가지고 있는 접시에 눈을 빛냈다.
“자, 봐 봐, 이건 물 잔인데, 엎드려서 먹는 게 아니라 손으로…… 잠깐만!”
델리나가 설명하는 사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젠이 순식간에 손에 있던 물 잔을 채 가려고 했다. 그 힘에 물 잔이 옆으로 쓰러졌고 젠이 쏟긴 물을 핥아 먹기 위해 몸을 납작 엎드리는 순간이었다. 창을 연 델리나의 손이 빨라졌다.
“!”
몸을 벌떡 일으킨 젠이 냅다 앞쪽을 향해 달려가다가 벽에 부딪혔다. 게다가 벽에 닿아 있으면서도 더 앞으로 가려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
제 몸이 자꾸만 앞으로 가려 하자 당황한 듯 젠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제야 한숨 돌린 델리나가 젠의 머리 위에 뜬 키워드를 바라보았다.
<직진남>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직진만 하게 하는 능력일 줄은…….
하여간에 뭐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도움이 되었다.
델리나는 그제야 철창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젠은 여전히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델리나는 잠시 시큰대는 팔꿈치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젠이 물 잔을 뺏으려고 할 때 넘어지며 생긴 상처였다.
“이거 봐. 네가 막 달려드니까 이렇게 다쳤잖아.”
자신이 다치게 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델리나의 팔꿈치로 있는 상처를 본 젠이 눈치 보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것을 포착한 델리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제발 급하게 먹지 말고, 손으로 천천히, 응?”
곧 델리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하늘색 스카프였다.
“크르르르…….”
“가만 좀 있어 봐. 치료 안 받을 거면 상처를 쥐어뜯지나 말지…….”
경매장에 있을 때 하고 있던 목줄에 긁혔는지, 젠의 상처 중 목 부분의 상처가 제일 심했다. 젠이 계속 긁은 듯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델리나는 젠의 목을 스카프로 감쌌다.
“자, 이렇게 감싸 놨으니까 치료받기 전에는 풀지 마. 긁지도 말고. 알겠지?”
물론 젠은 델리나가 주의를 주든 말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제 목에 감긴 스카프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듣기로 하스 왕국에서는 특별한 날에 스카프를 선물한다던데.”
“…….”
“뭐, 그러면 오늘을 너랑 내가 빵을 특별히 나눠 먹은 날로 정하자. 그건 그 선물이야.”
하스 왕국 출신인 젠이 스카프는 익숙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은지 젠은 조금 전보다 얌전해졌다.
“자, 손으로…… 먹는 건 아직 안 바랄 테니까, 천천히만 먹자. 알겠지? 너 몸도 바로 풀어 줄게.”
철창문을 닫은 델리나가 능력을 풀었다. 곧바로 몸이 자유로워지자 놀란 듯 젠이 델리나와 제 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앞에 놓인 물그릇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 같지 않은 태도였지만 델리나는 가만히 젠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 날뛰던 젠은 이제 얌전해졌다.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이게 한 정체 모를 힘이 델리나에게서 왔다고는 느끼는 모양이었다.
가르칠 게 한두 개가 아니겠는데.
기본적으로 사람 말은 알아듣는다지만 하는 행동은 짐승 그 자체였다. 델리나가 자세를 낮춰 젠과 눈을 마주했다.
“젠.”
또 한 번 델리나가 이름을 부르자, 젠이 델리나를 쳐다봤다.
“네가 나 이렇게 상처 입혔으니까 나도 이제 가서 치료받을 거야.”
“…….”
“그러니까, 이렇게 붕대를 감고 치료할 거라고.”
손으로 붕대를 감는 시늉까지 하며, 델리나는 제 까진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너도 치료받아. 알겠지?”
“…….”
“다음에 왔는데 오늘이랑 똑같은 상황이면 안 돼?”
“…….”
“자, 얼른 알겠다고 해.”
“……?”
“이렇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라고.”
델리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덩달아 젠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 방금 약속한 거야.”
“…….”
“꼭 치료도 받아. 알겠지?”
델리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못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젠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델리나 또한 하고 싶은 말만 뱉을 뿐이었다.
“그래. 잘했어.”
“크르르르…….”
“가만있어 봐. 너 칭찬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델리나를 경계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제 대놓고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델리나가 젠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잠깐만, 진짜 너무 강아지 키우듯 하는데.
순간 저도 모르게 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던 델리나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델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젠이 슬며시 제 머리를 델리나의 손에 댔다.
“…….”
손바닥에 푹신한 것이 만져졌다.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델리나는 자연스레 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젠도 델리나의 손길을 받으며 얌전히 있었다.
‘이래도 되나.’
어쩐지 진짜 주인과 개 같아서 델리나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젠을 칭찬해 주는 방법은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참, 다른 사람들도 공격하면 안 돼?”
“…….”
“네가 아직 여기 저택을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서 내가 제일 최약체거든? 너 진짜 밖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가는 진짜 큰일 나.”
진심 어린 충고도 잊지 않고 하는 델리나였다.
“참, 내 이름을 안 알려 줬네. 난 델리나야.”
“…….”
“내 이름 뭐라고?”
단순히 공격만 안 하는 것으로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기본 의사소통도, 당연히 필요했기에 델리나는 젠에게 말을 하도록 유도했다.
“따라 해 봐. 델.”
“……데.”
“리.”
“리.”
“나.”
“나아.”
“자, 뭐라고?”
“데에리나.”
좀 어눌하긴 해도 알아들을 만한 수준이었다. 델리나가 환해진 얼굴로 곧장 다른 물건들을 가리켰다.
“자, 봐 봐. 이거는 옷이고, 이거는 스카프야. 그리고 이건 접시, 이건 고기.”
“…….”
“그냥 듣기만 해. 너도 배운 기억은 있을 테니까.”
지금은 많이 까먹었겠지만.
“나, 참. 진짜 내가 주인님 같은 것도 아닌데…….”
정말 무슨 강아지에게 하듯 훈육시키고 있자니 자괴감이 들었다. 델리나가 중얼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젠이 입을 열었다.
“주이니?”
“아냐, 아냐. 그건 잊고. 다음 단어.”
그렇게 젠에게 철창 안에서 알려 줄 수 있는 단어를 모조리 알려 주고서 힘이 빠진 듯 델리나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젠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델리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젠의 모습에 델리나가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네발로 기지 말고 두 발로 서라니까……. 에효, 됐다.”
이제는 말하기도 지친 델리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 아무튼 복습. 이건 뭐라고?”
델리나가 재빨리 주변의 사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 델리나가 가리킨 것을 가만히 보던 젠이 입을 달싹였다.
“오.”
“이건?”
“스카프.”
“이건?”
“저업시.”
“이건?”
“고기.”
“네가 관심 있는 게 뭔지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저가 관심 있는 것만 명확하게 발음하는 젠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델리나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이자, 델리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델리나.”
“……어?”
“델리나.”
너무도 정확하게 발음하는 ‘델리나’라는 단어에 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젠은 델리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철창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델리나의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 지하실 계단을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