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
(12/94)
12화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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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
2023.06.12.
“데뷔탕트?”
“네. 아가씨도 데뷔탕트를 치를 수 있는 나이시니까요.”
방으로 돌아가서도 도대체 그 이름 값이 얼마일까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펠릭에게서 데뷔탕트 이야기를 듣고서 쏙 들어갔다.
“이번에 칼릭스 님도 참여하시고요. 아가씨께서 만나 보셨던 분들 전부 그날 데뷔탕트를 치를 예정입니다. 그래서 혹시, 아가씨께서도 어떠신가 해서요.”
‘데뷔탕트……!’
데뷔탕트란 말을 들을 때부터 델리나는 눈을 빛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데뷔탕트를 치러 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핑계를 대며 니엘과 샬롯이 델리나의 데뷔탕트를 미룬 데다가, 니엘이 본격적으로 백작이 된 이후로는 거의 다락방에 감금당하다시피 지냈기에, 더더욱 사교계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델리나에게 데뷔탕트는 늘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곧 니엘과 샬롯을 떠올린 델리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사정상 가족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데……. 이번에 아마 내 사촌들이 데뷔탕트를 치를 거거든. 그러면 분명 가족들이 다 올 거야.”
“그러세요? 그러면…….”
잠시 고민하던 펠릭이 손뼉을 쳤다.
“아가씨. 어차피 그 자격은 되시잖아요.”
“응. 그건 그렇지.”
“어차피 다 함께 들어가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먼저 입장하면, 그 이후에 들어가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어차피 자격도 되고, 아가씨도 진짜 플로렌 가문 사람인데요. 가서 한 사람 더 추가로 왔다고 하면 되죠. 게다가 올 사람들이 다 왔는데 누가 다시 가서 가문 명단을 확인하겠어요.”
데뷔탕트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델리나의 눈이 점점 빛났다.
“그날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얼굴을 세세히 다 보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가장 눈에 띄는 아가씨의 보라색 머리는 가발로 감추고, 드레스로 시선이 가도록 화려한 걸 입고 가시죠.”
“그럼, 내가 진짜…… 진짜 데뷔탕트를 할 수 있다고?”
“그럼요. 아가씨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건데.”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그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을, 과거에는 누려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울컥했다. 그런 델리나를 보며 펠릭이 싱긋 웃었다.
* * *
‘데뷔탕트라니, 데뷔탕트라니.’
드레스 치수를 재 본다며 베티가 몸에 줄자를 갖다 댈 때도, 신이 나 복도를 걸으면서도 델리나의 마음은 온통 데뷔탕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 춤도 한번 연습해 봐야 하는데, 어떻게 췄었더라? 춰 본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분명…….’
과거에도 데뷔탕트 하는 날을 꿈꾸며 몇 년이고 연습했었다. 물론 그 춤을 황궁에서 출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았지만, 몸은 그때 연습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여기서 한 번 턴하고…….’
다락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데뷔탕트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홀로 췄던 춤이었다. 한번 춤추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동작들이 이어졌다. 델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서 남자가 허리를 잡으면…….’
델리나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듯 목을 치켜들던,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복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칼릭스였다. 칼릭스의 존재를 눈치챈 델리나가 민망해진 얼굴로 팔다리를 내렸다.
“안녕……?”
“…….”
“저기, 그냥 데뷔탕트 춤 연습을 하고 있던 거였어.”
칼릭스는 줄곧 저택에 머물렀지만, 그 모습을 좀체 보기 힘들었던 터였다. 그런 칼릭스를,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제가 한껏 춤에 취해 팔다리를 이리저리 비비(배배) 꼬고 있을 때 말이다.
“……너도 알지? 이거 무슨 춤인지? 너도 이번에 데뷔탕트 한다고 하던데.”
“…….”
“혹시 괜찮으면 나랑 파트너 연습할래?”
지금껏 연습 파트너는 기드온 정도였다. 하지만 기드온은 한두 곡만 하면 바로 지루하다며 도망쳤기에 그렇게 많이 연습하지 못했었다. 델리나의 말에도 칼릭스는 제가 무척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차피 너도 가니까, 나랑 한번…….”
델리나가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옮긴 순간이었다. 그러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칼릭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델리나가 두 걸음 다가가니, 칼릭스가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고, 세 걸음을 가니 세 걸음을 물러났다.
얘 봐라?
매번 자신에게 다가오던 아이들만 보다가 이렇게 저를 피하는 칼릭스를 보니 어떤 의미로는 신선했다. 결국 다가가기를 멈춘 델리나가 복도 한복판에서 외쳤다.
“저기, 있잖아!”
“…….”
“혹시 너도 막 시험 이후로 무릎이 아프거나 이빨이 욱신거린다든가 기억이 사라졌다거나 그랬니?”
시험장의 일을 계속 남겨 놓는 것도 찜찜했기에, 이번에는 델리나 쪽에서 선수를 쳤다.
“그거 있잖아! 우리 가문의 비밀 비법인데, 며느리도 모르고…… 아무튼,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너무 찜찜해하지는 말라고!”
이놈의 가문 비법 소리를 얼마나 팔아먹는지 모르겠다. 플로렌 가문 선조들이 들으면 오열을 할 소리를 하고서, 델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 비법은 절대 비밀이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거든!”
혹여 그 비법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 봐 비밀 엄수라고까지 말하는 델리나였다.
정작 칼릭스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델리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칼릭스의 뒤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싶어 자세히 보니, 바닥으로 빵가루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혹시 자꾸 피하는 게…….’
반센트가 장치와 실험, 노아가 돈에 미쳤듯이 칼릭스도 미쳐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달콤한 디저트.
만약 저 뒤에 있는 것이 디저트라면, 이토록 다가오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됐다. 델리나는 대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이 디저트를 좋아하는 걸 밝히기 싫어했지.’
살육의 대공이라고 불리는 악명과 달리 칼릭스 대공이 디저트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물론 칼릭스는 그것을 누군가가 대놓고 이야기하는 걸 싫어했다. 디저트를 향한 칼릭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미움과 애정이 뒤섞인, 애증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디저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모조리 베어 버렸지.’
칼릭스 앞에서 디저트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델리나는 조용히 밑으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바라보았다.
‘기왕 숨길 거 잘 좀 숨기지, 참…….’
곧 델리나의 시선을 눈치챈 칼릭스가 자기 밑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제 빵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칼릭스가 눈을 번뜩였다. 그걸 보고 놀란 델리나가 다급히 말했다.
“디저트! 디저트 먹는구나!”
“…….”
“디저트 맛있지! 나도 많이 먹어. 어, 배고프면 세 접시도 먹고……!”
그 순간 칼릭스의 다른 쪽 손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짧은 칼이었다.
“……!”
그 칼을 쥐고 칼릭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뒷걸음질을 치는 쪽은 델리나였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쪽은 칼릭스였다.
‘능력, 능력을 써야……. 아니 근데 뭘 써?’
다정남을 쓰자니 다정하게 찔러 줄 것 같았고, 대형견남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제 키워드 능력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칼릭스가 성큼 다가왔다.
“……!”
델리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델리나가 슬며시 눈을 떴다. 시야로 칼릭스의 붉은 눈이 보였다.
“말하지 마.”
“…….”
“이거.”
칼릭스가 가까이 와서야 손에 든 반짝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칼의 정체는 버터나이프였다. 그것도 관리가 아주 잘되어 반짝반짝한.
‘얘 진짜 디저트에 진심이구나…….’
디저트에 진심인 만큼 칼릭스가 저 버터나이프로 제 목을 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제야 델리나도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완전 입 무거워.”
“…….”
“어, 근데…… 되게 맛있는 디저트 먹네. 저거 먹어 보니까 맛있더라.”
그 말에 조금이지만 칼릭스가 반응했다. 그러자 용기가 난 델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 밥이든 디저트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안 그래?”
“…….”
“그냥 좋아하면 먹는거지 뭐. 난 그냥 케이크를 밥 대신으로도 먹은 적 있어. 좀 달지만 맛있더라.”
“밥으로 먹었다고? 몇 접시?”
순간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칼릭스의 태도에 당황한 델리나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응. 열 접시인가 먹었나, 그럴걸?”
디저트를 한 번에 열 접시 먹었다는 소리에, 칼릭스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칼릭스의 반응을 본 델리나가 급히 말을 수정했다.
“그러니까, 그게…… 열 접시까지는 아니고…….”
“…….”
“……아홉 접시?”
“!”
칼릭스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한 접시 수정한 델리나였다. 칼릭스가 상당히 흥미롭다는 눈으로 델리나를 쳐다봤고, 델리나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죽어도 이놈과 같은 식탁에 앉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