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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광대 드레스 (14/94)


14화 광대 드레스
2023.06.14.



 
계단을 울리는 소리에 젠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델리나도 재빨리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발소리를 내며 나타난 이는 펠릭이었다. 뜻밖의 상대가 나타나자 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나 찾은 거야?”

“그럼요! 지금 아가씨 데뷔탕트 드레스가 와서 다들 아가씨를 찾고 있어요!”

“내 드레스?”

데뷔탕트 드레스라는 말에 흥분한 델리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요. 얼른 입으러 가요. 분명 엄청 예쁠 거예요.”

드레스 이야기에 델리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젠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갈 테니까 꼭 치료받아. 알겠지? 다음에는 케이크 가져올게!”

젠에게 인사를 하고서 델리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뒤따르던 펠릭이 웃었다.

“벌써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케이크도 나눠 먹을 사이면.”

“나눠 먹긴. 내가 주면 입으로 핥아 먹는 수준인데……. 아직 가르칠 게 한참 남았어.”

작게 한숨을 내쉬던 델리나가 드레스로 화제를 옮겼다.

“그나저나 드레스는? 방에 있어?”

“아까 저도 도착한 것만 봤고요. 지금쯤이면 방으로 옮겨졌겠네요.”

데뷔탕트 드레스라니, 정말 데뷔탕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델리나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방문까지 단숨에 온 델리나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델리나를 본 베티가 먼저 인사했다. 베티 곁에는 벨리온이 서 있었다.

“……전하?”

베티야 그렇다 쳐도, 벨리온까지 방에 있자 놀란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펠릭이 대신 말했다.

“아가씨 드레스를 디자인하신 건 전하니까요. 그래서 불렀어요.”

“내 드레스를?”

“네. 원래 데뷔탕트 옷은 보호자들이 선물해 주는 거거든요. 지금 아가씨 후원자는 전하시니까요.”

“그렇구나. 몰랐어.”

“보통은 아이들도 모르게 깜짝 선물하는 경우가 흔해서요, 대부분은 잘 몰라요. 그러면 이제 드레스를 한번 볼까요?”

웬지 펠릭이 더 신난 듯 말했다. 그런데 베티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델리나가 베티를 보며 의아해하는데 벨리온이 한 걸음 다가왔다.

“광대한테 어울리는 걸로 했지.”

“아, 네…….”

어딘가 묘하게 자신감에 찬 듯한 벨리온과 다르게 델리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베티가 드레스를 가져와 보여 주자 델리나가 입을 쩍 벌렸다. 펠릭조차도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니, 아니지, 베티.”

“…….”

“아가씨 드레스를 가져오라니까? 보석 덩어리들 말고.”

“……드레스 맞습니다.”

드레스를 가져온 베티조차 말을 우물댔다. 그 정도로 드레스는 모든 이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드레스 자체는 예뻤다. 문제는 드레스에 달려 있는 어마어마한 보석들이었다. 팔, 가슴, 목, 허리, 다리…… 모든 곳에 보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드레스를 본 델리나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전하, 아니죠? 차라리 대공가의 신상 보석 갑옷이라고 해 주세요!”

“누가 전쟁에 드레스를 입어.”

“그러면 이게 데뷔탕트에 입을 드레스가 정녕 맞습니까?”

저 드레스를 보느니 시력을 포기하겠다는 듯, 펠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벨리온은 덤덤했다.

“광대 옷은 화려하잖아.”

“…….”

“이 드레스도 화려하지.”

그러니까, 화려하게 만들려고 드레스에 보석이란 보석은 다 붙이도록 했단 말인가. 델리나는 이런 망작을 손수 만들어야 했던 드레스 디자이너에게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별론가.”

벨리온이 델리나를 보며 물었다. 델리나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입을 달싹였다.

“제가, 제가 혹시…… 황궁 한복판에서 광대 쇼라도 하나요?”

광대 쇼를 하지 않는 이상 입을 수 없는 복장이었다. 그러나 벨리온은 이게 어때서, 하는 얼굴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해.”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주문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베티의 말이 델리나를 더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드레스 디자인 자체는 훌륭하니 보석만 어느 정도 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말이 이어지자 델리나의 눈에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았다.

“그렇겠네요. 이게 보석만 어느 정도 떼면…… 그러면 그 디자인은 제가 맡지요. 제가 디자인하고, 베티가 그 디자인에 맞춰 보석을 다시 붙이는 식으로요.”

“펠릭이 디자인을?”

“제가 이래 봬도 드레스에 일가견이 좀 있습니다. 제 전전전전 애인이 드레스 디자이너였거든요. 거기서 데이트하면서 드레스란 드레스는 다 봤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부탁 좀 할게. 둘 다.”

저 재앙의 드레스를 어떻게 해서든 바꾸기 위해 셋이 비장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홀로 고독하게 남은 벨리온은 여전히 드레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좋은데.”

“……전하. 생각해 보니까 칼릭스 님 옷도 디자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어디로 갔죠? 설마…….”

“같이 화려하게 했지.”

칼릭스의 옷도 이렇다는 소리에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펠릭과 베티가 머리를 맞댔다.

“칼릭스 님 것까지 가능해?”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지만 기간을 맞출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합니다.”

“……그래, 칼릭스 님은 검도 쓰시니까 여차하면 그냥 갑옷으로 입으시라 하지 뭐.”

재앙의 드레스에 이은, 칼릭스의 방으로 간 재앙의 옷을 상상한 그들은 그것을 홀로 마주하게 될 칼릭스를 조용히 애도했다.

* * *

충격과 공포의 드레스 사건이 지나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듯 델리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드레스는 이제 베티와 펠릭의 손에 맡겨졌다. 드레스가 있던 자리를 보던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드레스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벨리온은 퍽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정말 저를 광대로 생각하는 것도 황당했지만, 그 극단적인 드레스 디자인은 더 심했다. 

진짜로 황궁 한복판에서 광대 쇼를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여차하면 입으로 불까지 내뿜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델리나는 다시 데뷔탕트를 떠올렸다.

이제 정말 곧…….

무려 네 명의 흑막들이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자리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어찌 울피림 대공가의 후원을 받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일단 뭐 사이가 좀 가까워져야 뭘 해 보기라도 할 텐데.

가까워지기는커녕 저리 꺼지라고만 안 해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충격과 공포의 대형견남 사건으로 능력을 함부로 쓰기도 망설여졌다.

줄 거면 좀 제대로 된 능력을 줄 것이지 무슨 이런 걸…….

진짜 무슨 광대라도 된 것 같은 능력에 델리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직 써 보지 못한 능력들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튼 데뷔탕트에 집중해야지.’

뭐가 되었든 간에 여전히 방심해서는 안되었다. 이에 가만히 다가올 데뷔탕트를 생각하던 델리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오빠는 이번에 못 오겠지.’

과거에도 데뷔탕트는 제이크와 제인만 했었다. 그랬기에 기드온이 그 자리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나도 이번에 하는데.’

어쩌다 참석하게 된 거긴 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델리나가 중얼거렸다.

“한번 전하한테 부탁해 본다면…….”

아냐, 아니다.

곧 델리나가 머리를 거세게 저었다. 광대라고 그런 드레스를 줬는데 광대 오빠한테는 얼마나 더 심할까 싶었다.

게다가 무심해 보여도 벨리온의 성정이 칼같다는 걸 델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또 시험을 봐야 한다고 기드온을 시험장으로 내몰지도 몰랐다.

‘일단 대공가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니엘과 샬롯이 플로렌 백작가에서 본모습들을 감추고 생활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본성을 드러낼 터였다. 그때 두 사람을 잡는 것이 델리나가 추후에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그것보다는 일단…….’

수도와 지방의 모든 귀족이 모이며, 더불어 황족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데뷔탕트. 그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현 황제와 벨리온의 관계였다.

‘분명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지.’

나라 하나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울피림 대공가는 황제에게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벨리온은 실력 있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황제는 그 소문을 들으며 대공이 무슨 꿍꿍이일까 불안해하고 있었고.

‘하긴 나도 예전에 울피림 대공을 떠올렸을 때는 분명 뭔가 음험한 속내가 있을 줄 알았지.’

게다가 황제는 대공가의 행위들을 반역으로 간주해 대공가를 치기도 했다. 벨리온은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정작 대공가에는 그런 반역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 것 같긴 해.’

지금도 저를 광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아마 아이들을 육성하는 이유도 별것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에 데뷔탕트에 집중하자. 가서도 조심하고, 그 흑막 놈들도…… 으음……. 잘 지내보고…….’

곧 오게 될 데뷔탕트를 생각하며 델리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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