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암살 방식이 퍽 특이해졌는데 (5/94)


5화 암살 방식이 퍽 특이해졌는데
2023.06.05.


168596700793.jpg

 
델리나의 키가 성인 정도였더라면 목이 잘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급히 몸을 바짝 엎드린 델리나는 제 목을 한 번 더듬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이놈의 저택은?”

대공가의 소문이야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아예 자세를 낮춘 델리나는 엉금엉금 기어 정문 옆 벽 쪽을 확인했다.

벽을 만져 보기는 싫은데.

또 잘못했다가 이번에는 쌍도끼가 날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델리나는 그저 거대한 정문과 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벽 쪽은 조사해야 했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바로 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대공가가 멸하면서 알려진 비밀 중 하나였다.

‘가만, 분명 이쯤이라고 했는데. 음?’

비밀 통로 입구를 찾으며 델리나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그때였다. 벽의 가장 아래에 있는 벽돌을 본 델리나가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뭔가 질감이 좀…….’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델리나는 본능적으로 그 벽돌 쪽으로 꾸물꾸물 기어갔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벽돌을 힘주어 눌렀다.

“……그냥 낡은 거였나?”

혹 숨겨진 비밀 통로를 여는 벽돌이 아닌가 싶었지만 놀라울 만큼 반응이 없었다. 델리나가 실망한 표정으로 벽돌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땅을 기다가 생긴 손가락 상처에서 핏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리며 벽돌 틈으로 스며들었다.

“……응? 어, 어?”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던 벽돌이 그대로 쑥 빠지며 입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방심하고 있던 델리나는 그대로 입구로 굴러 들어갔다.

델리나는 입구 통로를 한동안 빙글빙글 돌았다. 도무지 어디로 굴러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깊고 어두운 통로를 델리나는 한참이고 구른 후에 비로소 몸을 멈출 수 있었다.

“우욱.”

한참 구른 탓에 이곳이 어디인지도 자각할 새도 없이 델리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입을 잠시 틀어막고서 앉아 있으니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델리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침대와 기구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델리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샌 암살 방식이 퍽 특이해졌는데.”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델리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달빛이 비쳐 들어왔고 남자의 형형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달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고 달빛은 남자와 델리나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제야 확실히 보이는 남자의 외모에, 델리나는 내심 감탄했다.

짙은 흑발에 감춰진 눈은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이었다. 양 눈의 색이 다른 남자였다. 그는 난데없이 나타난 델리나의 모습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남자의 눈은 지극히 권태로웠다. 암살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양, 익숙하게 침대 머리맡에 있던 검을 빼어 든 남자는 델리나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까딱였다.

“……?”

“와 봐.”

이리 오라고 하는 남자의 손에는 서늘한 칼이 들려 있었다. 델리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남자가 무엇을 착각했는지 알아차린 델리나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저는 암살자가 아니에요!”

가만히 있다가는 남자의 칼에 몸이 분리될 지경이었다. 델리나가 외쳤다.

“저는 델리나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의 후원을 받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흑발에 오드 아이. 그리고 울피림 저택에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벨리온 울피림.

분명 바깥에서는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의 눈을 직접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가 죽은 뒤 그의 눈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그가 붉은 눈과 푸른 눈을 보유한 오드 아이였다는 사실이.

“저는 예전부터 대공 전하의 후원을 받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델리나의 소개를 무시하고 잠시 옆쪽을 바라보던 벨리온이 물었다. 벨리온의 시선 끝에는 델리나가 들어온 벽의 구멍이 있었다.

“정문 옆, 벽 밑에 있던 벽돌을 누르고 들어왔어요. 제가 사실 대공가의 비밀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

“그만큼 정보 수집에 능하고요. 그러니까 분명 곁에 둬도 괜찮을 거예요. 사실 후원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일만 하게 해 주셔도 됩니다.”

비밀 통로라고 해도 기껏해야 저택 복도로나 가는 줄 알았건만, 하필 직통으로 벨리온에게 연결된 길에 델리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벨리온이 저 칼로 자신을 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입구를 함부로 쓴 건 죄송합니다. 저도 설마하니 방까지 바로 올 줄은 몰라서…….”

혹 입구를 함부로 쓴 것이 그의 심기에 거슬렸을까 싶어 델리나는 벨리온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하지만 벨리온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채였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벨리온이 침대 옆에 있던 줄을 당겼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네. 부르셨습니까?”

꽁지머리를 잘끈 묶은 초록 머리의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다가 델리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굽니까?”

“암살자.”

“네?”

“……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애.”

암살자라는 말에 초록 머리 남자가 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직 암살자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안 죽이고 산 채로 감금시키려고요?”

활기찬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그 말에 기겁한 델리나가 외쳤다.

“아뇨! 저 정말 암살자가 아니라 후원받고 싶어서 온 건데요!”

그 말에 남자가 델리나의 뒤에 있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입구를 타고 온 겁니까?”

“어.”

“호오. 피로만 열 수 있는 입구인데…… 그걸 이 아이가 알고 있었고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이는 델리나였다.

피, 피로 열 수 있는 거였구나!

대공가의 비밀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완벽히 풀리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최대한 몰랐던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저는 그 외에도 다양한 비밀들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를 곁에 두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왜.”

하지만 그런 말에도 벨리온은 시큰둥했다.

“그냥 죽이고 입 다물게 하면 그만인데.”

“아니, 아니, 그!”

그 순간 정말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벨리온에 기겁한 델리나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가 죽으면 바로 대공가의 비밀이 퍼지도록 손을 써 뒀어요!”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줄곧 무감한 눈빛을 하고 있던 벨리온의 눈썹이 조금이지만 움직였기에. 기세를 몰아 델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선 제 조건은 여전히 그거예요. 여기 있게 해 주세요.”

“…….”

“뭐든 할게요. 제발요.”

흑막들 모두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델리나는 더더욱 간절했다.

“전하. 일단은 놔두시는 게 어떠십니까?”

상황을 보던 초록 머리 남자가 말했다.

“일단 조사를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결정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고요.”

“……좋아.”

그 말에 벨리온도 수긍하며 칼을 도로 내렸다.

“감금시켜 놔.”

“알겠습니다.”

일단 목숨은 부지했다. 초록 머리 남자는 여전히 엎어져 있던 델리나에게 손짓했다. 물론 손에 기다란 밧줄을 든 채.

“자, 얌전히 묶이실까요?”

“…….”

‘일단 살긴 살았는데…….’

제 팔목을 감싸는 밧줄에 델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록 머리 남자가 밧줄을 묶으면서 말했다.

“살살 묶어 드릴게요. 방금 몸동작을 보니 그냥 맨몸으로 가둬 놔도 별 상관 없을 것 같지만요.”

“…….”

“아, 그러고 보니 정보력이 뛰어나던데, 그럼 제 이름도 알겠네요?”

“……펠릭이요. 벨리온 대공의 보좌관. 펠릭.”

“오, 맞아요. 정답! 감옥이라고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요. 내 감옥이다 생각하시고 편히 쉬세요. 그래도 정답 맞추셨으니까 사식으로 디저트도 넣어 드릴게요.”

“그거 참……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이 마냥 재밌는지 펠릭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는 사이 델리나의 팔목이 밧줄에 묶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예, 예.”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것은 벨리온이었다. 그제야 펠릭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델리나 또한 얌전히 펠릭의 뒤를 따랐다. 이동하면서도 펠릭은 디저트 메뉴로 뭐가 좋은지 물었고 델리나는 하나하나 답해야 했다.

어쨌든 대공의 저택에 들어간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델리나는 우선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진짜 왔어. 그 대공가에.’

비로소 어둠이 눈에 익숙해졌고 대공가의 전경이 보였다. 델리나는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16859670079315.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