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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예비 흑막 (6/94)


6화 예비 흑막
2023.06.06.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름 델리나 플로렌. 나이는 열두 살. 위로는 쌍둥이 오빠가 하나 있고 부모님은 사망. 지금은 작은 아버지 쪽에서 보호자를 하고 있습니다.”

델리나에 대해 조사하는 것쯤이야 울피림에서는 우스운 일이었다. 조사에 착수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평소 델리나가 즐겨 먹던 가게 이름까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벨리온이 원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은 채였다.

“대공가 정보가 흘러 나갈 가능성이 있는 곳은?”

“현재 알아낸 바로는 전혀 없습니다. 완전 10대 소녀 그 자체예요. 뭔가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놀림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

자기가 통로를 사용해 놓고 그렇게 놀란 얼굴이라니. 두 사람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델리나를 떠올렸다.

“역시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말대로 암살 목적인 건 확실히 아닌 것 같고요. 저도 어제 봤지만 그 몸으로는 전하는커녕 훈련받는 다섯 살짜리 애도 제대로 못 이길 것 같습니다.”

사실 벨리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암살자가 제가 왔다고 알려 주듯이 그렇게 요란스레 온단 말인가. 하물며 피를 사용해야 통로가 움직인다는 말에, 그 아이는 분명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밀을 완전히 알고 있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렇죠. 이대로 그냥 풀어 주기도 그렇고……. 아, 아니면 고문을 할까요?”

“…….”

“아이들이 싫어할 만한 무척 끔찍한 고문을 하는 거죠. 가령 식사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빼는 겁니다. 그러면 몇 끼 못 가서 바로 술술 불게 되겠죠. 아니면 사탕을 두 개를 보여 주고 한 개만 먹게 한다거나…….”

“입 다물어.”

“네.”

잠시 후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하던 벨리온의 입이 열렸다.

“시험 보라고 해.”

그 말에 펠릭의 눈이 커졌다.

“그 아가씨를요? 진짜 후원하시려고요? 그것도 오늘 바로?”

“오늘이 좋아.”

“아, 설마…….”

펠릭은 오늘 오는 네 명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저게 정말 아이들인가 싶은, 그 아이들을.

“네 분 전부를 상대하게 하려고요? 그 아가씨를?”

“…….”

“제가 볼 때는 한 명하고만 해도 박살 납니다.”

전투 실력이 일반 어른들보다도 훨씬 웃도는 아이들을, 그 평범한 아가씨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펠릭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본인이 멋대로 왔으니, 시험도 그래야지.”

“…….”

“그리고 만약 통과 못하면 바로…….”

죽여.

벨리온이 뒷말을 흐렸으나 펠릭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하긴 원래 자신의 주인은 이런 일에 칼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펠릭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어떤 재능도 보이지 않는 그 아이에게 시험을 보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벨리온은 마지막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아가씨였는데.

펠릭은 내심 안타까워하며 대답했다.

* * *

“으으음…….”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델리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돌 천장이었다. 잠시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잠들었지?

고개를 돌리니 쇠창살이 델리나를 반기고 있었다. 델리나는 곧바로 현실을 자각했다.

“맞다. 여기 갇혔었지…….”

늑대 무리에게 습격을 받은 일, 대공가에 오고, 거기서 또 데굴데굴 굴러 하필 들어간 곳이 대공의 침실이었던 것……. 남들이 들으면 정말 꿈이라도 꿨냐고 물어볼 법한 일들에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 보는 감옥의 풍경은 밤과 다를 바 없이 삭막하기만 했다. 델리나는 감옥 안을 어색하게 둘러보다가 그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봤다. 디저트를 주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식사 옆으로는 퍽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러자 어제 일이 또 생생하게 떠올랐고 다시 한번 자신이 대공가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델리나는 그대로 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거기도 난리가 났으려나.’

이제 모두가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들이 어떤 반응들을 보일지 궁금했다. 물론 니엘이나 샬롯 같은 이들에게는 관심도 없었지만, 자신을 어린 시절부터 돌봐 준 사용인들의 반응이 걱정되기는 했다.

‘오빠도 봤겠지?’

지금쯤 그 종이쪽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델리나는 꼭 살아남을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결코 같은 참사를 만들지 않으리라, 델리나는 다짐했다.

“아, 일어나 계셨어요, 아가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창살 너머로 퍽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아는 델리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다가온 상대를 봤다.

“왜 식사는 안 하셨어요. 특별히 맛있는 디저트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체할 것 같아서요.”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에 저리 맛있는 케이크가 있는 것도 웃겼다. 그럼에도 펠릭은 델리나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그래도요. 아가씨. 든든히 먹어야 나가죠.”

“저 나가요?”

나간다는 말에 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 나가기는 하는데……. 아가씨한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하나씩이 있는데요. 뭐부터 들으실래요?”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요. 아가씨가 원하던 후원자 결정 시험을 보시게 되었어요.”

“진짜요?”

정말로 제가 원하던 상황이 되자 델리나가 창살에 몸을 붙인 채 눈을 빛냈다.

“네. 아가씨는 전하가 후원하는 다른 분들과 겨루시게 될 거고요. 거기서 살아남으시면 돼요.”

“살아남아요? 그리고 다른 분들이라니, 한 명이 아니에요?”

“네. 총 네 분인데요. 그래도 일단은 다들 아가씨 또래예요.”

“……그거 참 힘이 나네요.”

또래면 뭐하겠는가. 어차피 어른들도 이기는 아이들일 텐데. 창살을 잡고 있던 델리나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럼 그 아이들이 누군지 알려 줄 수 있나요?”

“죄송해요. 그건 알려 줄 수 없어요. 전하의 후원을 받는 아이 중에는 신원을 숨긴 이들도 있거든요.”

하긴. 그러니까 미래에서도 뒤늦게 알았었지. 그 다섯 사람이 전부 대공가에서 키워졌던 이들이었던 걸.

“그러면 나쁜 소식은 뭔데요?”

“나쁜 소식은, 만약에 그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말끝을 흐린 펠릭이 손날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본 델리나가 표정을 굳혔다.

“죽네요.”

“그렇죠. 죽죠.”

곧 펠릭이 열쇠로 감옥 문을 열어 주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델리나가 천천히 감옥을 빠져나왔다.

“가자마자 바로 시험을 치르게 될 텐데, 밥 안 드셔도 괜찮겠어요?”

“네. 이따 와서 먹을 거니까, 남겨 둬요.”

‘안 죽어. 절대 안 죽을 거야.’

델리나는 죽을 생각 따위는 요만큼도 없었다. 다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시험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델리나는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곧 저 멀리서 벨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잠옷을 입고 있던 지난밤과는 다르게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벨리온 곁에는 각종 무기가 널려 있었다.

“펠릭에게 이야기는 들었겠지.”

“네.”

“골라서 들어.”

‘무기…….’

델리나는 다양한 무기 중에서 가벼워 보이는 검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이거보다 더 작은 칼은 없나요?”

“없어.”

가벼운 칼마저도 델리나에겐 무척 무거웠다. 팔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다른 무기들도 들어 보았지만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곧 델리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도망도 재능에 포함되나요?”

“버티기만 하면 뭐든지.”

하지만 시험장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즉 도망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마저도 몇 초 만에 잡힐 것이었다. 델리나는 결국 제일 작은 막대기 하나를 비장하게 집어 들었다. 그런 델리나를 보며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사람 웃기게 하는 재능이 더 있겠군.”

“네?”

“광대 같은 거.”

“…….”

젠장.

분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가벼운 칼도 못 드는데 시험을 본다니. 그것부터가 이미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단단히 막대기를 잡았다.

“정말, 제가 버티기만 해도 후원해 주시는 거죠?”

벨리온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곧 벨리온이 손을 들어 근처로 있던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

시험장이 바로 보였다. 델리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펠릭이 옆에서 응원하듯 두 주먹을 열심히 흔들었지만 델리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문 앞에 도달했다.

‘좋아. 침착하자, 침착, 침착…….’

델리나의 손에 의해 문이 열렸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문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그것을 의식한 듯 문에서 손을 뗀 델리나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방 안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누구인지를.

<예비 흑막>

“……!”

아이들의 머리 위로 예비 흑막이라는 글자가 떴다. 그것을 본 델리나의 눈이 점차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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