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Night Prowler (2)
투기자 대기실.
문이 열리자, 그 틈새로 시끄러운 음악과 웅성거리는 소음, 직원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1분 전입니다.”
나는 환복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검은 바디슈트와 발라클라바를 장착한 내 모습은 이제 게임 속 캐릭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방호복 사이즈는 괜찮으십니까?”
“예. 다행히 딱 맞네요.”
ASD 버클러 시리즈 12세대 전투방호복.
<맥스페인>의 신입 투기자에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방어구다. 게임에서는 쪼렙 시절을 근근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가성비 아이템으로 꼽힌다.
“링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당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게시된 내용 이외, 대전 도중 케이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투기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이 점 숙지하셨습니까?”
그 말을 쉽게 풀어 쓰자면 이랬다.
싸우다 누구 하나 죽어도 우린 모른다.
“예에, 뭐, 아까 서명도 했으니까요.”
“좋습니다. 올라가십시오.”
직원은 대기실 문을 활짝 열었다.
“행운을 빕니다. 미스터 카이트.”
나는 좁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수록 귀에 들어오는 소음의 볼륨이 점점 커졌고, 조명 또한 점차 눈부셔졌다.
그리고 이내―
싸움터에 다다랐다.
「자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시작되는 오늘의 두 번째 매치!」
「목숨을 걸고 싸우는 피의 옥타곤에 도전장을 내민 두 선수가, 지금 입장하겠습니다―!」
투기장의 분위기는 가히 최고조였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내레이션과 흥을 돋우는 BGM에 맞춰 구경꾼들이 거센 함성을 내질렀다.
「먼저, 블루 코너!」
「신장 180센티미터. 몸무게 70킬로그램.」
「오늘이 생애 첫 출전! 파릇파릇한 루키!」
「보여준 것은 아직 없다. 그렇기에 보여줄 것이 넘쳐난다! 10연승을 노리는 신인 파이터!」
「────카이트!」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나는 옥타곤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 레드 코너!」
「신장 192센티미터. 몸무게 90킬로그램.」
「투기장 전적 11승 3패! 현재 4연승을 달리는 중인 신예 폭주 기관차!」
「소림에서 단련된 펀치에는 중국 4,000년의 기예가 담겨 있다! 홍룡파 소속의 일류 권법가!」
「────타오 라이거!」
반대편 케이지를 열고 들어온 것은 감색 도복을 입은 30대 중후반 정도 나이의 동양인 남자였다.
“흐음.”
척 보니 상대 투기자의 직업은 무투가.
그중에서도 마샬복서Martial Boxer로 보인다.
동양계 무술을 익힌 클래스로, 주먹 위주의 타격 기술을 주로 사용하며 자신과 같은 무투가 계열 클래스와의 싸움에 특히 강하다.
나는 천장에 붙은 대형 모니터를 슬쩍 보았다.
모니터 화면에는 이번 경기의 승자 예측에 대한 최종 배당률이 공개되어 있었다.
5.07 < 카이트 VS 타오 라이거 > 1.72
내 승리에 거는 것은 상금 5배짜리 도박.
그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내린 공정한 평가.
누가 봐도,
오늘 밤의 희생양은 나였다.
「과연 승부는 정해진 흐름대로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상상 못 할 이변을 일으킬 것인가.」
「지켜볼 준비는 되셨습니까, 여러분?」
물론 나는 가만히 희생당할 생각이 없다.
애초에 여기 온 목적은 ‘살아남기 위해서’니까.
「양 선수, 제자리에.」
「레디────」
내가 얼마나 강한지.
이제부터 알아볼 셈이다.
「파이트!」
***
「주인님께서는 혹시 마력과 마나의 차이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타이퍼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했다.
“마력이랑 마나? 둘이 같은 거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현재 제 바디에는 한숨 쉬는 기능이 없어 음성 출력으로 한숨 쉬기를 표현하겠습니다. 에휴. 어휴. 으휴.」
“닥치고 설명이나 해, 이 깡통 자식아.”
「본디 마나란 술사가 지닌 마력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술사의 체외로 발산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태의 물질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마력의 불꽃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녀석의 말에 나는 금방 다시 되물었다.
“마력은 부탄가스고, 마나는 가스불이다?”
「조금 다릅니다. 마나와 마력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물질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사실상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여도 지장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 이 설교는 왜 하고 있는 건데?”
「주인님께서는 일전에 저에게 마법사로서 강해지는 방법에 대해 물으셨지요.」
“그랬지.”
「그 해답은 마나의 ‘순도’에 있습니다.」
녀석은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법사의 실력은 여러 요인으로 결정됩니다. 정통 비전 마법 계열인 아케인을 예로 들자면, 신체의 마력 반응 적합도, 보유한 마력의 용량과 최대 출력량, 마법과 술식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마나의 순도 등이 바로 마법사의 강함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나는 이해했다는 느낌의 눈짓을 주었다.
실제로 전에 <마녀일기> 블로그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포스팅을 본 적이 있었다.
「상기한 요소들은 상당 부분 선천적인 재능에 크게 의존합니다. 마나의 순도 역시 그렇지만, 훈련을 통해 의미 있는 성장이 가능합니다.」
“마나 수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충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 마법은 쓰면 쓸수록 단련된다. 뭐 그런 거잖아.”
타이퍼의 고개가 끼익 소리를 내며 끄덕여졌다.
「마나의 순도는 체내의 마력을 얼마나 순수하게 뽑아낼 수 있는가에 달렸습니다. 순도가 높은 마나일수록 마법의 세기에 큰 영향을 줍니다.」
“꾸준히 단련하면 마나의 순도가 높아지고, 똑같은 마법이라도 더 강하게 쓸 수 있다는 거지?”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다만?”
「현재 주인님의 마나 순도는 처참한 수준입니다. 평범한 마법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포텐 터뜨릴라면 한참 걸린단 얘기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3개월의 데드라인이 걸려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때쯤.
타이퍼가 말했다.
「강해지는 게 목적이시라면, 주인님께서는 지금도 충분히 강한 마법사라 볼 수 있습니다.」
“어째 아까랑은 말이 좀 다른데.”
「아시다시피, 주인님의 마력 보유량과 출력량은 평범한 마법사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합니다.」
녀석은 덧붙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지금 레벨의 강화 마법만으로도, 웬만한 실력의 상대는 어렵지 않게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재능 없는 학생의 의욕을 꺾지 않으려고 애쓰는 선생님의 상냥한 빈말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타, 타오 라이거…… 다운! 다운입니다!」
「잽 한방에 쓰러졌습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마샬복서는 먼저 들어온 상대의 공격을 흘려가며 반격하는 아웃복서 스타일의 무투가.
이기는 법은 간단하다. 흘릴 수 없는 공격을 가하면 된다. 반응할 수 없는 스피드의 공격을.
「못 일어나나요? 못 일어납니까?」
「……」
「……」
「아아! 끝났어요! 순식간에 경기 종료!」
「카이트 선수, 시합 개시 8초 만에 타오 라이거 선수를 쓰러뜨리고 첫 승을 거머쥡니다!」
「데뷔전 KO승! 믿기지 않는 결과입니다!」
나를 향한 구경꾼들의 함성 소리가 커지는 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확신도 덩달아 커졌다.
“되겠는데, 이거.”
10연승.
어디 한번 달려 볼까.
***
「이번에도 잽 한 방에 끝났습니다! 세 경기 연속 원 펀치로 마무리! 3연승을 달리는 카이트!」
「0.1톤의 해머를 숟가락 다루듯 하는 상대와의 힘겨루기에서 완승! 이게 정녕 신인의 경기력이 맞습니까! 슈퍼 루키 등장! 이걸로 6연승째!」
「또 이겼어요, 또 이겼어요, 또! 또! 또! 이겼어요! 파죽의 기세는 멈추지 않습니다! 연승에 연승을 이어가는 괴물 신인! 카이트, 9연승입니다!」
끝나고 샤워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9연승까지는 예상보다 훨씬 싱거웠다.
물론 상대편 선수들이 약한 덕분도 있었다.
게임 내에서도 <맥스페인>은 쪼렙 시기를 빠르게 탈출하기 위한 렙업 및 앵벌이 장소 역할을 하는 만큼, 강적과 만날 확률은 거의 없긴 했다.
어쨌거나 타이퍼 말이 맞았다.
웬만한 실력의 상대라면 내가 이긴다.
「자, 이제 다음 도전자가 올라옵니다.」
그래,
웬만한 실력이라면 말이지.
「지금, 신인 투기자 최초 10연승 달성이라는, 맥스페인 역사상 전무후무한 역대급 기록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아무래도, 이번 경기야말로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 매치이자 메인 이벤트가 될 것 같습니다.」
장내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고 있었다.
「괴물과 맞붙을 상대는, 또 다른 괴물.」
「신장 202센티미터. 몸무게 117킬로그램.」
「투기장 전적 45승 0패.」
「반년 만에 옥타곤으로 복귀한 무패의 사나이! 모르는 이가 없는 최강전설! 지하의 철권왕!」
나는 무대 위로 올라온 상대를 보았다.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허.”하고 웃었다.
「────우나이 칸투!」
아는 놈이었다.
이미 싸워본 적까지 있는.
“헤이, 따까리 친구.”
“…….”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먼저 말을 걸어 보았지만 반응은 미약했다.
놈은 그저 말없이 기계 팔에 붙은 스위치와 버튼 따위를 틱틱 조작하기 시작했다.
잠시 그러고 나더니,
주먹을 쥔 채 나를 봤다.
“물론 기억한다. 애송이 흑마법사.”
“쪽팔린 기억은 다 잊은 모양이네. 그쪽은 그 애송이한테 팔 하나 뜯기지 않았던가?”
“지난번과는 다를 거다.”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놈이 장착하고 있는 기계 팔의 모양새는 저번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장비 바꿨구나?”
“널 위한 거지.”
“알아.”
스테이트 아머리 SR53 ″슈가 레이″.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기동성과 마법 방어에 특화된 전략형 전투철완.
“최대 파워가 살짝 딸리지만, 그만큼 출력 조정이 쉽지. 싸우다 코어가 드러나는 일도 없고.”
“마법사치고는 철완에 대해서 잘 아는군.”
“근접전까지 고려해서 액세서리로는 미스릴 너클을 달았구만. 나한테 진짜 지기 싫은가 본데?”
“선생님께 누를 끼친 쓰레기가 내가 보는 앞에서 싱글벙글 까불고 있게 놔둘 순 없지.”
“그러고 보니 너 왜 이런 데서 놀고 있냐? 혹시 나 때문에 짤렸어? 그래서 분풀이하려는 건가?”
“놀이터 흙장난은 끝났다.”
우나이 칸투는 어깨를 풀었다.
푸슈―. 놈의 양쪽 기계 팔에서는 위압감을 뽐내듯 무수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만족하기 전까진, 항복하지 마라.”
일대일 격투로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는 놈.
게다가 마법전을 대비한 전용 장비까지 갖추고 왔다.
10연승을 코앞에 두고.
이런 놈이랑 싸워야 한다니.
“거참.”
나는 왜 이렇게도,
운이 좋은 걸까 싶다.
하여간 지금이라도 나타나 줘서 다행이다.
안 그래도 단순 강화 마법만으로 치고받는 피지컬 싸움에 질리던 참이었으니까.
「파이트!」
곧 시합이 시작됐다.
우나이 칸투는 탐색전 따위를 벌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타앗!
놈은 개전과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새끼를 잃은 멧돼지 같은 맹렬한 기세로.
막는다? 피한다? 반격을 노린다?
어떤 행동을 골라도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때문에 내가 한 선택은 그 셋 전부 아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강화 마법.”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가느다란 한 줄기의 자색 불꽃이, 전방의 상대를 향해 은밀히 발사됐다.
내가 노린 목표는,
놈의 양쪽 기계 팔.
제아무리 마법 방어력이 높은 장비라 해도, 순수한 마나가 깃드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자색 마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색 마력을 쓰는 마법사 따위는 없으니까.
그 누구도 그런 걸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아간 마력의 불꽃이 철완에 닿았다.
마나가 깃들었다. 기계 팔에 내 의지가 이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속삭였다.
“기능 강화.”
타이퍼가 가르쳐준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로.
처음 복사기의 기능 강화를 시도했을 때처럼.
그러므로 결과 역시 그때와 같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사물은 우울증에 걸린 새침데기처럼 반응할 것이다.
마나 따위는 전부 튕겨내 버리고,
끝내는 저 혼자 망가져 버릴 테지.
―파직! 파지직!
강화 마법 실패로 인한 부작용.
내 코앞에 닿기 일보 직전, 우나이 칸투는 철완에 생긴 이상을 감지한 듯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앙!
코어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
철완의 기능은 모조리 정지.
시합은 갑작스럽게 소강상태에 진입했다.
나는 양팔을 잃은 우나이 칸투에게 다가갔다.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놈은 기계 팔을 정비하려 했지만,
당연히 뭔 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저번에 나는 너한테 두 대나 처맞았는데, 너는 나한테 제대로 처맞은 게 한 대도 없더라고.”
“…….”
“그니까, 내가 만족하기 전까진―.”
나는 주먹을 들었다.
강화 마법을 풀파워로 두른 주먹을.
“항복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