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Night Prowler (1)
이스트포레스트 1구역.
윌슨앤코 인터내셔널 사옥 50층.
“술이 참 달군요.”
손님용 소파에 앉은 에드먼드 하인즈는 잔에 담긴 화이트와인을 한입 가볍게 적시고는 말했다.
“어디 와인입니까, 이건?”
왕의 거처처럼 드넓은 사무실.
콘크리트 대신 유리 벽으로 세워진 커튼 월 앞에서, 세 개의 손가락으로 와인 잔을 받친 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토카이 아수 6 푸툐노스 93년산. 헝가리의 꿀물이지. 샤토 디켐의 반의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갑절의 갑절은 되는 달콤함을 맛볼 수 있어.”
“헝가리 와인이라……. 단맛이 나는 술은 제가 잘 찾질 않는데, 이건 좀 다르군요.”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떤 땅에서 자랐든 성장만 바르면 돼.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남자의 말에는 주관적인 견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에드먼드 하인즈는 미소로 맞장구를 쳤다.
“한 잔 더 하겠나, 에드먼드?”
“아닙니다, 부사장님. 일요일 밤에 대놓고 술 냄새 풍기면서 들어가면 와이프가 싫어해서요.”
“엘리자베스 그 친구도 참, 대기업 본사 사장의 사모님치고는 이해심이 썩 부족하구만 그래.”
“어휴, 그러니깐 말입니다! 파하핫!”
“자네가 고생이 많아.”
“바지사장 노릇에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발령 초기부터 부사장님께서 아주 돈독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이쪽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나 있는 것 같던데.”
“예?”
“그쪽 팀장.”
남자는 말했다.
“유진이라는 친구 말이야.”
그 목소리는 쇳물처럼 거칠고 진했다.
에드먼드 하인즈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입을 열었다.
“아아, 유진 군 말씀이십니까.”
“그 친구를 추천했던 건 자네였지. 그래서 한번 가볍게 일을 맡겨 봤는데, 성대하게도 망쳤어.”
“면목 없습니다, 부사장님.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냐. 자네 눈은 탁월해. 진심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 친구가 바보짓을 절대로 안 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단 얘기지.”
“무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유진 군이 일머리 하나만큼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대단합니다만……. 가아―끔 그 열정이 사―알짝 이상한 방향으로 돋아날 때가 있단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전에 자네가 말했었지. 일은 정말 잘하는데 너무 잘해서 곤란하다고. 최근에는 회사에 대해 캐고 있다는 모양이던데.”
“잠깐 또 의심병이 도졌을 뿐입니다. 여튼 부사장님께서 걱정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남자는 입에 머금은 와인을 목으로 넘겼다.
“10년 동안 숙성시킨 술맛을 고작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망치게 되면, 기분이 많이 나쁠 테니까.”
그의 거무스름한 회색 피부는, 검은 밤공기를 타고 내려온 하얀 달빛을 그대로 삼켰다.
***
3월의 마지막 밤.
나는 이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 와 있었다.
“공기 참 드럽네.”
노스네스트Northnest.
시에라시티의 북부 빈민 구역.
어스테이트 최대 규모의 슬럼가이자 마굴魔窟이라 불리는 곳.
약 100년 전, 이 지역의 상공 3km 부근에 초대형 타르타로스 게이트가 열렸었다고 한다.
그때의 여파로 아직까지도 잔존해 있는 에테르 낙진을 막기 위해, 중심구의 하늘은 거미줄처럼 촘촘한 티타늄 결계막이 천장 대신 뒤덮여 있다.
은빛 쇳덩이 사이사이의 불투명한 강화유리를 가까스로 통과한 달빛은 거뭇한 녹색이 되어 축축하고 지저분한 거리를 아스라이 비춘다.
유독성 분진과 미세먼지로 가득한 이곳의 공기를 보건용 마스크 한 장으로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어쭙잖은 기대일 뿐이다.
“거기 오빠, 쉬었다 갈래요?”
“코카인. 메스. 헤로인. 글래스. 말만 해, 말만. 기분 좋게 하는 거라면 뭐든지 있으니까.”
“어이, 인간 형씨. 저쪽 술집은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썩은 쪽잎귀들끼리 파티 중이걸랑.”
노스네스트는 한마디로 말해 쓰레기장이다.
거지, 난민, 불법체류자…… 어스테이트라는 비좁은 섬나라에 몰려든 다양한 종류의 하류 인생들이 종내 최후의 보루로써 이 시궁창을 택한다.
빈민촌이나 우범지대 같은 단어는 순화된 표현이다. 노스네스트틀 처음 방문해본 이라면, 여기를 똥통의 지옥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지옥의 똥통이라 불러야 할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여긴가.”
4구역 유흥가의 구석진 뒷골목.
나는 한 상가 입구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지하투기장 맥스페인>
오늘 밤의 목적지.
시에라시티의 잘나가는 싸움꾼들과 도박꾼들이 모이는 이 지역의 숨겨진 핫플레이스.
나는 마스크를 똑바로 썼다. 담배꽁초와 구겨진 삐라가 즐비한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곧, 귀가 찢어질 듯한 음량의 스래쉬 메탈 사운드로 가득 차 있는 클럽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이야.”
번쩍거리는 조명들이 비추는 중앙에 자리한 것은 UFC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옥타곤 케이지.
구경꾼들은 그 주변을 빙 둘러서는 안쪽의 무대를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질러 댔다.
게임에서 보았던 비주얼과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한창 대조 중이었던 찰나―
「헤이! 그쪽에 마스크 쓴 손님!」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 카운터의 남자 직원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호출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모히칸 머리의 직원은 양팔을 쫙 벌리며 과장적인 제스처를 선보였다.
「맥스페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처음 오셨나요? 신규 회원 가입을 원하신다면 옆 창구의 제리란 친구가 도와드릴 겁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으나, 가만 들어 보니 직원의 목소리에서는 전화 통화를 할 때와 비슷하게 미약한 기계적 노이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실례지만, 혹시 안드로이드신가요?”
「예압! 저는 안드로이드 래리입니다!」
게임에서 안드로이드 종족은 파츠 업그레이드를 통해 인간과 외모가 흡사해질 수 있었다.
근데 실제로 보니, 이건 뭐 아예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사람과 똑 닮았다. 어느 부분에서도 로봇 특유의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되게 사람 같으시네요.”
「듣기 좋은 말이네요! 제 예전 주인님께서 돈을 깨나 잔뜩 처바르신 덕분이죠!」
문득 사무실에 있는 타이퍼가 생각났다.
그 불쾌한 골짜기의 표본 같은 녀석도, 파츠만 제대로 업그레이드해 준다면 언젠가 진짜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질 수 있게 되는 걸까.
「지금은 독립했지만, 주인님은 참 좋은 분이셨죠.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삶을 살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랜 노력 끝에 얼티메이트-튜링 테스트를 통과하여 로봇인권을 쟁취해, 이렇게 시간당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죠. 굉장히 행복합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나는 입구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싸움 구경을 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입장료는 40달러, 혹은 440크레딧 되겠습니다!」
“아뇨.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요.”
손사래를 치고 나서 다시 똑바로 짚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관중석이 아닌, 그 중앙의 옥타곤 케이지였다.
“투기자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듣자.
안드로이드 직원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와우, 투기자 등록 희망자시군요!」
“등록은 여기서 진행하는 게 맞나요?”
「가입 및 등록은 원래 옆 창구의 제리란 친구가 도와드리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거야 일주일만에 찾아온 신입 투기자인걸요! 그러므로 저 래리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드로이드 직원은 신이 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자기 손목에 묶인 단말기를 조작했다.
「등록 모드를 실행하였습니다. 투기자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하여, 지금부터 15분 동안의 대화 및 녹화 메모리는 상담 후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내 개인 정보를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뜩한 일이다. 웬만해서는 얼굴도 노출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후드에 마스크까지 쓰고 왔으니까.
「좋아요. 먼저 신분증부터 확인할게요.」
“……신분증이요?”
「가끔 현상범이나 블랙리스트가 찾아와서 말이죠. 걱정 말아요! 방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 기억은 15분 뒤에 말끔하게 사라지니까요.」
조금 꺼려졌지만, 일단은 직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게임에서도 이곳 <맥스페인>은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정직하게 운영되는 업장이었으니까.
「흠, 본인 맞으시겠죠? 잠깐 마스크 좀 벗어 주실까요? ……네, 좋습니다. 확인 끝입니다.」
직원은 곧장 시민증을 돌려주었다.
「자아, 우선 투기자 등록비로 300달러를 받을 건데요. 그리고 오늘 밤에 바로 경기에 나가실 생각이라면, 참가비로 300달러를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크레딧으로 지불하시나요?」
“달러로 할게요.”
「사장님이 좋아하시겠네요. 요즘 들어 크레딧 환전이 제값 받기가 어려워서 말이죠. 수수료를 조금씩 더 받고 있는데 그래도 손해랍니다.」
나는 현찰로 600달러를 건넸다.
직원은 몇 장의 종이를 꺼내 1분여 동안 무언가 끼적이더니, 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
「닉네임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깜빡했군. 이런 것도 있었지.
어쩐다? 본명은 당연히 안 될 거고.
대충 아무렇게나 지은 것도 상관없으려나.
“그러면 그, ‘마스크맨’으로…….”
「아, 미안해요. 그 이름은 안 됩니다.」
“예?”
「이미 닉네임을 ‘마스크맨’으로 등록한 투기자가 28명이나 있어서요. 당분간 혼선을 피하기 위해 등록 불가 닉네임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허어, 그런가요…….”
「정 닉네임을 정하기 어려우시다면, 래리 작명소를 이용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대신 멋들어진 닉네임을 하나 지어 드리도록 하죠!」
“…….”
조금 꺼려졌지만,
일단은 직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직원은 의자를 돌려 반대편 벽면의 책장에서 사전을 몇 권 꺼내 들고는 그걸 훑어보기 시작했다.
「유진 연. 미스터 연. 흐음, 한국 출신이죠?」
“예.”
「‘연’이란 글자는 한국어로…… ‘kite’군요! OK! 됐습니다! ‘카이트!’ 이게 당신의 닉네임입니다!」
작명에는 10초 정도 걸린 것 같다.
“카이트……?”
「그래요! 어떻습니까!」
곰곰이 발음을 되새겨 보았다.
울림은 나쁘지 않다. 사람들한테 불릴 닉네임이라 치면 적어도 ‘마스크맨’보다는 나아 보인다.
“알겠습니다. ‘카이트’로 하죠.”
「예압! 래리 작명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용 요금은 물론 무료입니다!」
남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직원은 내게 입장권 대신 쓸 수 있는 배지와 정식 투기자 등록증, 규정 안내서를 지급했다.
「투기장의 룰은 간단합니다. 상대가 항복하거나, 10초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면 승리예요. 화기 사용 금지, 범위 레벨 2 이상의 마법 사용 금지, 상대 투기자 이외의 다른 사람 공격 금지, 기물 파손은 적당히, 나머지는 전부 허용입니다!」
“강화 마법 사용은 가능합니까?”
「물론이죠! 승리 수당은 기본 300달러. 연승할 때마다 기본 수당에 100달러씩이 추가로 붙습니다. 만약 2연승을 한다면 300 더하기 400 해서 총 700달러, 3연승을 한다면 거기에 500달러를 더 받는 거죠. 이해하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근데, 10연승을 하게 되면 보너스 상품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직원은 나보다 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10연승을 달성했을 시에는, 승리 수당 총합 7,500달러에 추가로 7,500달러를 따로 더 얹어 15,000달러를 안겨 드리죠!」
“그게 다인가요?”
「투기자 뱃지도 플래티넘으로 교환해 드리는데, 그걸 달면 노스네스트 내 제휴 업소들의 VIP룸에 프리 패스로 무료입장이 가능하답니다!」
상품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겨우 15,000달러밖에 안 되는 푼돈이나 룸살롱 입장권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투기자도 베팅이 가능하죠?”
「그럼요! 하지만 승부 조작을 막기 위해, 본인의 승리에 걸 때만 가능합니다!」
“연승 기록은 어떻게 되나요?”
「으음, 저희 투기장에서 신입 투기자의 첫날밤 최고 연승 기록은…… 4연승이군요.」
오늘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배움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
“이따 제가 싸울 경기에 돈을 걸고 싶습니다. 연승 예측 베팅으로요.”
「몇 연승에 거시겠습니까?」
나는 현찰로 1만 달러를 건넸다.
“10연승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