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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4화 (14/201)

14화. A Taste of Honey (1)

웨스트록 3구역.

회사 근처 번화가의 한 카페.

“좀 늦네.”

나는 거품이 죄 사그라든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가게 기둥에 붙은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10분.

약속 시간은 벌써 10분이 지났지만, 상대가 늦는 것에 대해 불평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어쨌거나,

선택은 내가 한 거였으니까.

비너스 : ???

비너스 : 만나자구여??? ㄹㅇ????

yjy343 : 네

yjy343 : 상관없습니다

비너스 : 오호

비너스 : 의외네영

비너스 : 전엔 매몰차게 차버리시더니~~

yjy343 : 생각이 바뀌어서요

yjy343 :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비너스 : ㄱㅊㄱㅊ

비너스 : 후회 안 하실 겁니당 ㅎㅎ

그렇게 전날 새벽에 만남 약속을 잡았다.

인터넷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말이다.

비너스 : 저어는 오늘 당장도 괜찬은데요

비너스 : 님은여?

yjy343 : 저녁에 잠깐은 뵐 수 있습니다

비너스 : 그럼 저녁에 보는 걸루

비너스 : 만날 장소랑 시간은 님이 정하세용

yjy343 : 회사 근처에서 뵀으면 하는데요

비너스 : 회사가 어디신데여?

yjy343 : 웨스트록인데 멀진 않으실까요?

비너스 : 가깝네영

비너스 : 제가 찾아뵐게여

비너스 : 아우 넘 설렌다 ㅎㅎ

비너스 : ♪───O(≧∇≦)O───♪

채팅만 보면 나이도 상당히 어린 듯하고.

약속 장소와 시간까지 모두 나에게 일임한 것 또한 사기꾼치고는 지나친 배려란 생각이 들었다.

―잠깐 얘기 나누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쁜 와중에 잠시 짬을 내고 나와, 이렇게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언젠간 나타날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쓰읍, 괜히 만나자 했나…….”

어쩐지 불안불안한 것이,

아무래도 예감이 썩 좋지 않다.

물론 이미 약속을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뭐, 크게 괘념치는 말자. 최악의 경우라도 앞으로 시간 몇 분 더 뺏기고 말 뿐이니.

아직 밝은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며, 거의 다 식어 가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더 홀짝였을 찰나.

“저어.”

문득 옆에서,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yjy343 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밝고 명랑한 톤의 목소리.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비주얼의 상대가 거기에 있었다.

“……비너스 님이신가요?”

“아, 네! 저 맞아요!”

하늘하늘 웨이브 진 녹색 머리카락.

초롱초롱 반짝이는 연두색 눈동자.

그리고―

메타세콰이어처럼 길쭉하게 뻗은 귀.

“아우,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거의 다 왔는데, 요 앞에서 차가 너어어무 막히더라구요!”

“아뇨, 아닙니다. 퇴근 시간이니까 어쩔 수 없죠. 약속 시간도 제가 정한걸요.”

“그건 그렇고 만나자고 해서 진짜로 만나러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보통 인터넷에서 모르는 사람이 대뜸 만나자 그러면 다들 무시하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10초 전까지만 해도 괜히 나왔나 하고 후회 중이었습니다.”

“아핫, 저도 아까 차 막힐 때 그랬어요!”

“일단 앉으시죠. 음료 주문하고 올 테니까.”

“아, 그럼 저는 허니라떼로 부탁드릴게요!”

의외로 상대는 채팅에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별 차이가 없는 생기발랄한 젊은 여성이었다.

“여기, 받으세요.”

“고마워요! 사 주시는 거 맞죠?”

“첫 잔은요. 두 번째 잔부터는 사 드릴지 말지 대화 내용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10잔 얻어먹을 각오로 열심히 해야겠네요.”

나는 반대편에 앉은 상대를 살폈다.

어깨가 드러나는 홀터넥 블라우스와 카프리 청바지. 유행을 잘 타지 않는 캐주얼한 차림.

겉보기엔 대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인다.

“저, 비너스 님?”

“네?”

“초면에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저요? 스물셋인데요.”

나는 앞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엘프라서 한 600살은 먹었을 줄 알았어요?”

무던히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사실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돼가지고 그게, 엘프는 처음 봤거든요.”

“뭐어, 놀랄 만도 하죠. 엘프라 하면 아무래도 고지식한 꼰대 종족 아니겠어요? 인터넷 만남이랑 엘프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잖아요.”

그녀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며 웃어 보였다.

“저야말로 놀랐다구요? 댓글이랑 채팅 쓰는 것만 보고, 분명히 바둑이랑 정치 얘기 좋아하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나올 줄 알았더니, 에에엥? 이렇게 훈훈하게 생긴 20대 오빠라니?”

“아, 저 20대 아닙니다. 올해 서른 살이에요.”

“괜찮아요! 저 위아래로 10살까진 OK니까!”

“……아래로 10살은 좀 위험하지 않나요?”

과연 요정이라 불리는 종족답게, 보조개가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미소는 제법 매력적이었다.

“근데, yjy343 님.”

“예?”

“yjy343 님이라고 부르는 거 너어무 귀찮은데, 이름이라도 좀 알려주시지 않을래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을 성싶었다.

“유진입니다.”

“유진 씨군요!”

“비너스 님은 본명이 어떻게 되시죠?”

“으으음, 저는 그냥 비너스인 걸로 하죠!”

불공평한 처사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이쪽이 저쪽한테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면, 슬슬 음료값을 좀 해 볼까요.”

초록 머리의 엘프, 비너스는 플라스틱 빨대로 허니라떼를 한 모금 쭈욱 빨아들였다.

“유진 씨가 마녀님 블로그에 올린 질문 댓글이, 그 뭐시냐, 보라색 마력이 어쩌고저쩌고……?”

“마나량이 무한대인 보라색 마력의 보유자가 강화 마법을 사용할 때의 활용법에 대해서입니다.”

“혹시 그거 본인 이야기는 아니죠?”

그녀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날렸고, 나는 얼른 고개를 옆으로 휘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실은 제가 마법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최근에 강화 마법을 배웠거든요.”

“그런데요?”

“색채별 마력의 성질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문득 보라색 마력과 강화 마법간의 궁합이 궁금해져서요. 혼자 고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 마녀일기라는 블로그에 질문을 올린 거였습니다.”

“아항, 그래요?”

“극단적인 예시를 들면 참신하고 재밌는 관점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력 보유량 무한’ 같은 말도 안 되는 조건부를 달아 봤던 거고요.”

미리 준비해 둔 변명이었다.

마력 보유량이 무한대에 가깝다거나, 보라색 마력을 가진 마법사라거나…… 하여간 나에 대한 그런 비일반적인 정보들을 낯선 이에게 선뜻 공개하는 건 아무래도 현명한 짓은 아닐 테니까.

“흐음, 강화 마법을 배우셨다구요?”

“예.”

“실생활에 써보신 적도 있겠네요?”

“한두 번 있죠.”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쓰셨나요?”

“강한 힘이 필요할 때 근육을 강화한다거나, 물건이랑 부딪히기 직전에 그 부위에 강화를 써서 다치지 않게 한다거나,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비너스는 어쩐지 장난기가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대며 미소를 지었다.

“마법 훈련을 할 때 따로 학교나 학원을 다녔거나, 아니면 스승을 두시거나 하진 않았죠?”

“예. 독학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라고 말하더니, 그녀는 자리 옆에 둔 핸드백 속을 뒤져 수첩과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수첩을 펼쳐 종잇장 위에다 펜으로 무언가를 슥슥 휘갈겨 적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강화 마법으로 강화할 수 있는 게 뭐냐고 하면…… 대충 이 정도죠.”

1. 기능

2. 강도

“강한 힘을 얻기 위해 근육을 강화한 건, 근육의 ‘기능’을 강화한 경우라 볼 수 있죠.”

“…….”

“그리고 또, 특정 부위의 단단함과 방어력을 늘리기 위해 ‘강도’를 강화할 수도 있고요.”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에요.”

그녀가 손에 쥔 펜의 방향이 내게로 향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강화 마법으로 강화할 수 있는 게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이거죠.”

다시 펜은 수첩으로 내려가 글자를 더했다.

1. 기능

2. 강도

3. 에너지

“……에너지요?”

“네. 물리학에서 말하는 운동 에너지, 위치 에너지, 전기 에너지, 뭐 그런 기타 등등 에너지요.”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다.

다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 어긋났으니까.

“저기, 잠시만요. 강화 마법은 술사의 신체 부위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핫, 그게 사실 흔히들 하는 착각이죠.”

“착각이라고요?”

“강화 마법은 술사의 마력이 깃들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든 강화할 수 있어요. 다만 보통의 경우, 마석이 포함된 물건이나 인챈트 시킨 아티팩트가 아니라면 마력을 집어넣는 일이 그리 쉽지 않죠.”

“…….”

“가이우스급 이상 되는 마법사라면 그게 가능은 하겠지만, 어차피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들은 대개 마나 수련의 영향으로 무투가한테도 안 꿀리는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웬만해선 강화 마법 자체를 따로 수련하거나 그러진 않으니까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강화 마법이라 하면 올라운드 범용 마법.

오히려 마법사보다도 다른 직업군에게 훨씬 더 애용 받는 마법인 만큼, 마법사 캐릭터만이 습득 가능한 최고 숙련도 레벨의 강화 마법은 다회차 플레이를 하면서도 전혀 볼 일이 없었다.

“강화 마법의 숙련도를 충분히 올리면, 자신 이외의 물체에도 강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요.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숙련도를 그렇게까지 올리지 않아도 가능해요.”

그녀는 다시 펜촉을 내게로 향했다.

“보라색 마력.”

나는 왠지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즉, 자색 마력이죠. 유진 씨는 혹시 자색 마력의 색채 고유 성질에 대해 알고 있나요?”

“잘은 모릅니다.”

“위력도 꽝. 유지력도 꽝. 호환성도 꽝. 자색 마력은 <기타 색채> 특유의 단점뿐만 아니라 모든 색채 중에 거의 최악을 달릴 만큼 나쁜 점만 갖고 있죠. 그나마 괜찮은 특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

“그건 바로― 어디든 잘 깃든다.”

그녀는 펜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자색 마력의 보유자가 강화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상당히 걸출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걸요?”

조종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게는 마치 맨빵 위에 바른 한 스푼의 벌꿀처럼 너무나도 달콤한 이야기였다.

“생각해 봐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지 강화할 수 있는 마법사. 꽤 유니크하잖아요?”

“아까 말씀하신 ‘에너지 강화’도 가능하겠네요.”

“맞아요. 에너지는 어디에나 존재하죠. 이를테면 마력 불꽃에도 아주 미약한 열에너지가 있으니까요. 또, 실생활에서 예를 들자면, 이 커피.”

비너스는 손에 쥔 펜으로 식어 버린 카푸치노가 약간 남아 있는 내 커피 잔을 가리켰다.

“자색 마력의 보유자라면, 강화 마법으로 식은 커피를 다시 따뜻하게 데울 수도 있을 거예요.”

“커피에 있는 ‘열’을 강화하는 원리군요.”

“오오, 학생! 이해가 빠르시네!”

지식의 쾌감이 느껴졌다.

강화 마법이란 게 단순한 신체 강화 외에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이 가능했다니.

특히나 에너지를 강화한다는 개념은 나 혼자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 했을 접근법이다.

“참, 여기서 중요한 팁이 하나 있는데요. 이 커피의 ‘열에너지를 강화한다’라는 이미지보다는, 커피의 ‘온도를 높인다’라는 이미지, 혹은 ‘커피를 따뜻하게 만든다’ 같은 쉬운 이미지로 접근해야 돼요.”

“…….”

“마음속 이미지, 전문적인 용어로는 심상이라고 하죠. 마법을 사용할 때는 술식과 결과물이 뚜렷한 그림으로 그려지느냐, 그런 것도 따져 봐야 하거든요.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말이죠.”

기분이 묘했다.

아까 전부터 그녀의 말들은 왜인지 나에게 ‘한번 해 보라’라고 부추기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 쪽으로 시선을 내려, 그 안에 의식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나지막이 오른손의 위치를 옮겼다.

육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약하게 마력을 흘려, 찻잔 속 식은 커피에 한 방울씩 담았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강화 마법.”

이미지를 떠올렸다.

커피의 온도를 높인다.

커피를 따뜻하게 만든다.

그것을 몇 번이고 되새기자,

모락―.

새하얀 김이 살포시 떠올랐다.

손에 닿은 찻잔도, 조금 따뜻해졌다.

돼, 됐다!

설마 진짜로 성공할 줄이야!

감격적인 순간.

나도 모르게 환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

문득 느껴진 것은―

“……?”

손가락 끝에서 땀이 나는 느낌.

“아.”

그리고 내 오른손에서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보라색 불꽃이,

화륵 화륵 예쁘게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

나는 반대편 자리의 비너스를 보았다.

“역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매우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진 씨, 흑마법사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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