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17화 (217/225)

217화 49. 스베아 왕 (2)

제국.

정확한 명칭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제국의 건국자가 정확한 명칭을 말해 주지도 않았을뿐더러 제국의 명칭을 정하는 여러 시도가 모두 무산됐기 때문이다.

신성 룸 제국이라는 그다지 성스럽지도 명예롭지도 못한 이름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고, 노예들의 제국이라는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가장 흔하게 쓰인 건 고어인의 제국이다.

제국을 오랫동안 장악했고, 제국을 세운 민족이 고어인이다보니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혹은 정치적인 의도로 제국을 고어인의 제국이라 부른다.

그렇게 해야만 선제후라는 이름으로 복속된 다른 제국의 구성 부족을 이간질시킬 수도 있으니까.

제국와 이웃한 강국 부르봉에서도 제국은 제국이라는 일반 명사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한, 고어인의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부르봉인은 오랫동안 제국의 적수였다.

라이벌적인 위치까지 올라갔던 적은 없었다.

영토가 넓고 비옥하고 사람이 많고 제국보다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가져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들도 알 수 없는 불운과 역사가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제국의 기적”이 대륙의 패자로 오르려던 부르봉의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켰다.

실제로 현재 부르봉의 치세는 어둠 속에 있다.

왕위에 오른 왕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혹자는 그것이 신의 회초리라 불리는 제국의 노르드마르크에서 유행하던 죽음의 역병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궁정에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

정말이지 지지리도 끔찍한 불운이 왕들을 덮쳤다.

얼마 전에 즉위한 소년왕이 죽은 후 이제 왕위에 오른 건 왕실 혈통에서도 꽤 방계에 자리 잡은 방센 공작이었다.

그는 나이가 서른 정도 되었고 온후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왕으로서의 책무보다는 그가 평생 즐기던 매사냥을 더 즐겼다.

제국 이상으로 살벌하다는 부르봉 궁정의 사나운 궁정 암투도 그가 왕이라는 자리에 흥미를 잃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일 것이고, 방계의 특성상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왕권도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부르봉은 쇠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 왕이 바뀌었지만, 왕의 으뜸가는 신하인 재상의 위치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뱅상 페리에.

호라교단 부르봉-까엔 교구의 일개 원장 신부였던 그는 빠르게 두각을 드러내 왕의 총신으로 자리 잡고 여러 개의 인적 동맹과 정치모략으로 왕보다 더 견고한 신권을 구축했다.

뱅상 페리에는 종교적으로는 호전적인 구교의 원리주의자고 호라에 대한 신앙심도 어지간한 수도사보다 높다고 알려졌지만, 그가 더 사랑하는 건 신보다 부르봉이라는 그의 조국이었다.

재상으로 뱅상 페리에의 목적은 조금은 모순적이다.

가장 강력한 주적인 제국을 약화시키고 분단시키는 것.

그러면서도 제국을 유지하게 하는 것.

뱅상 페리에는 제국의 약화를 바라지만 제국이 무너지는 걸 원하진 않는다.

제국이라는 방파제가 얼마나 많은 잠재적인 적을 막아 주는지 알고 있으니.

또 제국 곳곳의 부유한 선제후령과 공작령은 상업을 중시하는 부르봉의 상품과 풍족한 농산물을 사들이는 부유한 고객이다.

하지만 그 제국이 너무나 강해지는 건, 뱅상 페리에가 무엇보다 경계하는 미래다.

철혈대제 시절, 부르봉은 소극적으로 제국에게 도전했지만 비참하게 무너졌다.

왕이 포로로 잡혔고 군대는 전멸했고, 당시 뺏긴 군기는 지금도 제국의 박물관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였다.

전쟁 배상금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지급해야 했으며 그 여파로 부르봉에 신교도 반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이제 국내의 어려운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저지대 전쟁 당시 뱅상 페리에의 부르봉군은 조용히 남부 지방에서 저항하던 최후의 신교도 반란군 도시를 포위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남은 건 부르봉의 미래를 위해 주변의 기반을 다지는 것뿐.

그런 뱅상 페리에에게 루페르트라는 새로운 황제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건 그가 같은 구교도라고 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뱅상 페리에는 독실한 신자지만 믿음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니.

그는 철저하게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다.

그 뱅상 페리에게 주변의 신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스물다섯도 안 되는 어린 군주가 저토록 뛰어난 식견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일까?”

루페르트만이 아니다.

제국의 위기에 등장한 젊은 군주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누란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해 냈다.

부르봉 학자들이 가르치는 제국의 강점 중 하나가 위기에 등장하는 젊고 유능한 군주라는 이야기마저 있을 정도다.

이제 제국의 황제는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가 순결 서약을 스스로 깨뜨리고 울피아나와 결혼을 발표했을 때, 황제에게 반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제국 내에서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 하나가 된 제국이 무슨 짓을 할지는 역사가 말해 준다.

주변국이 피폐해질 것이다.

모든 부를 제국에 넘겨야 할 것이고, 제국군의 군홧발에 짓밟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최악의 미래를 막기 위해서 뱅상 페리에는 여러 대책을 강구했다.

가장 직관적인 건 부르봉 왕국이 직접 선전포고를 하고 제국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위험성이 너무나 높다.

저 하벨과 떠오르는 신성 같은 만슈타인의 두 군대가 부르봉을 향해 진군한다면?

자신은 물론 왕의 안위마저도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신호는 제국 디터팔츠의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가 이번 일에 강한 분노를 내비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신교 선제후다.

같은 신교령 중 노르드마르크는 역병으로 무너졌고 트라이아는 전쟁에서 패해 만슈타인의 병참기지로 전락했다.

중립적인 렌타이어마르크는 사실상 슈발츠마인의 속국이 되었고.

그러나 그 혼자서는 부르봉이 그렇듯 제국에 대항할 수 없다.

뱅상 페리에는 수많은 후보를 물망에 올렸다.

가장 유명한 건 쇠르너다.

레벤호스트군의 유일한 승장인 그는 하벨이 레벤호스트를 격파하자 점령지를 떠나 제국을 횡단 저지대 연방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조잡한 군대고 믿을 수 없는 용병 군대의 때를 벗겨 내진 못했지만, 그들이 루페르트에게 맞선 최후의 군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쇠르너는 현재 황제 쪽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 후보는 저 남동쪽의 비스투라다.

그는 문제가 많다.

그의 군대는 군대라기보다는 말을 탄 살인자와 약탈자의 모임이며 실제로 비스투라는 전쟁보다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의 평판은 좋지 않고, 그의 군대는 본격적인 전면전과도 거리가 멀다.

세 번째 후보 앙쥬 왕국은 언제나 반제국 동맹의 선두에 오른 국가지만, 그게 전부다.

앙쥬 왕국은 항상 물망에 오르지만 단 한 번도 제국에 적대한 적이 없다.

앙쥬 왕국의 왕이 제국에 적대하려고 했다면 레벤호스트가 도움을 청할 때 이미 이빨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왕국의 왕은 외국의 사정보다 내국의 귀족 반란에 더 큰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앙쥬 왕국에선 내전의 기운이 팽배하다고 한다.

결국 남은 건 생뚱맞게도 저 빙해 건너 자리 잡은 스베아 왕국의 왕 아돌푸스 바사다.

최근 서쪽의 야만적인 북부인 부족을 모두 복속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의 군대를 정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군대는 명성이 높다.

특히 북방 쪽에서 그는 여러 왕국과 전쟁을 벌였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군대가 야만인 취급을 받는 북방인인 주제에 어떤 군대보다 새롭다고 선진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병사들의 키가 유난히 큰 것도 장점이다.

제국처럼 강력한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마법의 권능을 봉쇄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주술사가 존재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스베아 왕은 독실한 신교도이며, 제국에서 벌어지는 신교도 탄압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는 전쟁을 원한다.

하지만 그도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다.

스베아 왕은 자신 혼자서 제국에 적대하는 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군대가 하벨의 군대와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인지할 정도로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있었다.

이제 뱅상 페리에는 그에게 최후의 결심을 심어 주려고 계획했다.

막대한 지원금을 은밀하게 약속했다.

제국 내 활동에 대한 모든 병사 임금의 지불.

혹 스베아 군대가 주둔을 요청할 경우 모든 국경의 개방 및 군수품의 지원.

심지어 동맹군 결성 시 선임 지휘권 같은 부르봉의 체면을 깎는 제안도 요구해 왔다.

뱅상 페리에는 이 야만적인 북부인에게 치욕스러운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제국에 싸울 의사를 가진 군대는 그의 군대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스베아 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문제는 스베아 왕이 어디에 상륙하냐다.

저지대 연방은 스베아 왕이 거부했다.

카스무어 왕국과 항구적인 전쟁을 벌이는 땅에 자신의 군대가 도착하면 얼토당토않은 저지대 연방 독립전쟁의 장기말로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스베아 왕은 제국 북방에 우호적인 항구를 개방해 줄 걸 요구했다.

뱅상 페리에는 난감함을 느꼈지만, 칼자루를 쥔 건 스베아 왕이다.

뱅상 페리에는 부르봉 첩자 몇 명을 노르드마르크로 보냈다.

* * *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병상에 있었다.

노르드마르크를 강타한 신의 회초리에 걸려서가 아니다.

싸움 한 번 없이 역병에 파괴되고 갖가지 악재에 스러지는 자신의 왕국의 모습을 보고 비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몸져누운 것이다.

그토록 강성한 전사라고 자신을 광고했던 선제후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쇠락했다.

“……그래? 황제가 순결 선언을 깼다고?”

예전 같았으면 대로하여 술병이나 물건을 바닥에 던지거나 검을 뽑아 허공에 대고 휘둘렀을 것이다.

이제는 그럴 기력이 없다.

분노를 느끼지만 그게 전부다.

그를 둘러싼 암울한 현실은 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독실한 신교도로서 신교의 대의가 무너지는 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정도로 중한 사안이다.

“역병만 없었어도…….”

역병만 없었어도 게오르크 아르님은 레벤호스트의 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루페르트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아야 했다.

결국 중립을 유지한 채 그는 동료 선제후가 쫓겨나는 걸 봐야 했다.

“……이제 이 나라의 신교는 끝인가? 다시 그 케케묵은 신부들이 제국을 호령하는 걸 봐야 하는가?”

암울한 어조로 주위에 힘없는 목소리로 무력함을 설파하던 선제후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게오르크 아르님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챔피언?’

틀림없다.

그의 이름은 베르크 란이다.

황제 루페르트의 황제직을 걸고 싸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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