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49. 스베아 왕 (1)
그의 이름은 여러 개다.
가장 유명한 이름은 티그리트라는 룸인들이 지어 준 이름일 것이고, 현재 시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이름은 클라우데 4세라는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불리길 원하는 이름은 따로 있다.
바로 루돌프라는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불러 주었던 이름이다.
이제는 죽어서 돌아올 수 없는 천상의 배필 안젤리나.
루돌프는 안젤리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클라우데 4세 제위 초반기, 그는 안젤리나와 만났다.
흔해 빠진 정치적 줄다리기 끝에 그에게 보내진 신부다.
딱히 애정을 줄 생각도 없었고,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었다.
의례적인 관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를 나름의 성의를 담아 대접했다.
피상적인 관계는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뀌었다.
그녀는 장미를 가꾸는 걸 좋아했다.
장미를 가꾸는 건 정원사의 몫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미는 직접 가꾸었다.
처음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녀 만든 들장미가 가득 핀 흐드러지는 꽃향기가 나는 정원 안에서다.
“폐하는 항상 먼 곳을 보고 계시는 거 같네요.”
아직 소녀의 풋풋함이 남은 안젤리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불쑥 말했다.
제위 초반기, 아직 철혈대제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일인지라 클라우데 4세는 반항적인 군주와 선제후, 불만 많은 시민과 종교로 갈린 다툼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만성적인 피로와 지침, 그리고 오랜 시대를 살아온 사람 특유의 권태감이 젊지만, 젊지 않은 황제의 몸에 쌓여 있었다.
“황제는 멀리 봐야 하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답하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얼마나 멀리 보시나요?”
황후의 목소리가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얼마나?”
황제는 생각했다.
1,000.
십진법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특별한 숫자를 떠올린 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제국을 세울 때 최후의 룸인 황제에게 천년 제국을 건설할 것을 떠든 건 자기 자신이니까.
이제 거의 다 왔다.
40년만 버티면 제국은 천년기를 맞는다.
당대에 20년, 후대에 20년.
어쩌면 10년씩 네 명의 황제를 연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켜볼 일이다.
누더기처럼 기운 제국은 한계에 이르렀고 제국에게 눌려 지내던 주위의 열강들은 호시탐탐 제국을 노린다.
심지어 평범한 인간은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이면 세계에서는 죽은 신들의 원한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 봐야 40년이다.
리프니에가 준 회귀의 힘이 있다면, 그 모든 걸 무로 돌리는 궁극의 권능이 있다면, 그 어떤 제왕도 그 어떤 장군도 그 어떤 악의 씨앗도 제국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해한다고 해도 없었던 일로 돌리면 그만이니.
심지어 그에겐 이면 세계의 일을 전담하는 이 세상에 용납받지 못할 권능을 가진 자들이 있다.
이름하여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그런 막강한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뭐가 있을까?
물론 리프니에의 역겨운 성질머리를 받아 주는 건 한계에 이르긴 했지만 40년뿐이다.
천년기를 맞고 루돌프는 모든 걸 그만둘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살았다. 모든 것이 무뎌지고 있어. 심지어 내가 검투사 시절에 맹세했던 그 처절한 약속마저도.’
잠시 생각에 잠긴 황제는 황후가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름다운 여성이다.
하지만 이보다 아름다운 여성은 몇 명이나 보았다.
어차피 여자의 속성이란 천박한 것이다.
그것이 루돌프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번 황후는 뭔가 다르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네요. 폐하.”
“천 년.”
황제가 답했다.
“제국의 천년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년 제국을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 티그리트께서 말씀하셨다던.”
“그래요.”
안젤리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천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없을까요?”
“무슨 뜻입니까? 황후.”
“당장 제가 가꾸는 장미와 그 장미에 기생하는 진딧물은 천이라는 숫자를 알까요?”
“그건. 열등한 미물에 불과할 뿐이니 인간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요.”
“그 미물도 신의 작품 아닌가요? 신의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 신의 세계가 천 년 단위로 움직이나요?”
“글쎄요. 교리문답은 취향이 아닌지라.”
장미를 매만지던 안젤리나가 가위를 내려놓고 황제를 빤히 보았다.
“저는 폐하의 치세를 보고 싶어요. 먼 미래의 천년기가 아닌.”
“……그 천년기를 맞이하기 위해 제 치세가 있는 것이겠죠.”
“그건 미래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죠. 저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세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법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안젤리나가 미소 지었다.
천 년을 살았지만, 늘 고독 속에서 살았던 루돌프는 그 미소를 미세한 충격 속에서 바라보았다.
“…….”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미소는 루돌프를 둘러싼 어둠에 삼켜졌다.
이제는 루페르트의 치세다.
그는 바야흐로 철혈대제의 이름마저도 뛰어넘을 정도의 기세로 웅비하고 있다.
그 레벤호스트의 반란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동료 선제후의 반발조차 없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완벽하게 처리했다.
심지어 단 한 번의 회귀도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루돌프는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다섯 번.
그가 레벤호스트의 반란을 이겨 내는 데 사용한 회귀의 숫자다.
하지만 루돌프는 미소 지을 수 있다.
그는 알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진정한 제국의 위기는 시작됐을 뿐이다.
그 선봉에 있는 것이.
“……아돌푸스 바사.”
그 상승 무패의 왕의 힘은 천재적인 군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제는 제국의 만신전 구석에 처박힌 죽은 신들의 사랑을.
그 앞에서는 여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
“루페르트 가우저.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허공을 노려보며 루돌프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그의 뒤엔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괴인들이 말없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또 한 명.
“…….”
베르크 란.
그는 끝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보며 유령처럼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이미 폐하는 선제의 위업을 넘어섰습니다!”
“레벤호스트의 용서를 탄원하는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제국의 밤.
황궁의 유서 깊은 행사장의 주인공은 바야흐로 황제 루페르트다.
두 명의 장군이 카렐리아와 트라이아에서 반란군을 무참하게 분쇄했다.
트라이아 전역은 만슈타인의 군홧발 아래에 있고, 카렐리아 전역은 하벨의 군홧발 아래에 있다.
렌타이어마르크를 약탈하며 공포의 행진을 벌이던 비스투라는 제국 마법사가 포함된 토벌대가 나타나자 국경 너머로 달아났다.
이제 제국의 영토 안에 황제의 적은 없다.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루페르트는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루페르트는 군주와 선제후의 사자, 성직자와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담담하게 모두의 공을 치하한 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던 난제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도펠죌트너에 대한 차별을 이제부터 철폐할 것이오. 그들은 오랫동안 제국을 위해 싸웠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 서서히 시들고 있소. 비록 그들이 약간의 소란을 일으킨 건 맞겠지만 정작 그들을 진압한 건 도펠죌트너 자신들이었소. 나는 제국을 위해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쪽이오. 물론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병사와 그 가족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 정확한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전사들에게 이제라도 안식을 주고 싶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제위 초반기, 레벤호스트가 있을 당시만 해도 루페르트의 발언은 커다란 문제로 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황제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누구도 토를 달 수도 없다.
논리가 특출나거나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황제의 힘이다.
황제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기에 아무도 토를 못 다는 것이다.
겨우 그런 사소한 약점으로 막강한 황제에게 도전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를 정도로 군주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정작 문제가 된 건 그다음이다.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의 시선을 응시했다.
이제 채무를 갚을 시간이다.
골트문트 옆에 서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울피아나의 애타는 시선 또한 느껴진다.
“…….”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운명인가. 아무리 회귀를 해서 뒤흔들고 바꿔 놓아도 신이 정한 진정한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순결 선언을 철폐하고, 울피아나와의 결혼을 발표할 것이다.
이미 예정된 행사도 약간의 반발도 당연히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루페르트에게 제대로 반항할 수 있는 선제후는 디터팔츠의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 하나뿐이다.
신교도 동맹의 맹주는 레벤호스트지만 사실 진정한 신교도 동맹의 수장은 모두가 막스 게오르크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영지는 고어문트만큼이나 부유하고 또한 그를 따르는 군주는 레벤호스트를 상회한다.
그러나 그렇게 강력한 선제후라고 해도 이제 황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걸 위해 루페르트는 전쟁이 승리한 현재까지 만슈타인의 군대와 하벨의 군대를 해산하지 않았다.
반기를 드는 순간, 막강하고 이제는 최근에 승리까지 한 드높은 사기를 가진 두 군대의 공격을 감내해야 한다.
누가 감히 황제에게 반항하겠는가.
막스 게오르크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순결 선언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제국의 안정과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제국은 안정된 반석 위에 올랐다. 나는 원하지 않으나 제국의 백성들과 귀족, 군주들은 제국의 다음 치세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다. 이제 곧 천년 기를 맞는 우리 고어인들의 제국은 내 이후에도 다음 번창하여 또 다른 천년기를 노려야 한다. 그런 이유로 흔들림 없는 권력 승계와 제국의 안정을 위해 나는 내가 이전엔 한 서약을 번복하고 한 명의 지아비로 아내를 맞이하려 한다.”
그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몇 명의 여자를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름을 모르는 시체를 끌고 다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다음은 여전히 그의 욕망을 자극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가장 이상하게 만든 건 그다지 색기도 없고 삐쩍 마르고 태도도 귀엽지 않은 금발의 여성이었다.
‘마리…….’
그녀를 못 본 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폐하.”
옆에 서 있던 골트문트가 조용히 황제를 종용했다.
대답의 시간이다.
루페르트는 얕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어문트 선제후의 영애이신 울피아나 님을 황후로 맞이할 것이오.”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일부는 눈에 띌 정도로 강한 분노를 보이기도 했고, 일부는 씁쓸한 표정으로 영혼 없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루페르트가 그 수많은 얼굴 중에서 똑바로 직시한 건 디터팔츠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다.
그는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휘하 공작과 백작들에게 뭐라고 수군거린 후 빠른 걸음으로 회장을 빠져나갔다.
사라진 선제후 너머로 누군가 접근했다.
“폐하~.”
환희에 찬 울피아나다.
그녀를 보면서 루페르트는 마음의 테두리가 어째서인지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