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45. 두 개의 왕관 (5)
“저런.”
박살이 난 소녀상을 보며 무형의 존재는 혀를 찼다.
돌조각에 생명을 깃들게 하는 건 필멸의 존재에겐 불가능한 묘기다.
이른바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중에서도 그러한 기적은 오직 한정된 존재만이 실현할 수 있다.
무형의 존재가 손을 내젓자 부서진 조각상은 하나로 합쳐졌고, 두 번 손을 내젓자 조각상 위에 온기가 흐르며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고 약동하는 성질로 변했다.
세 번 손을 내젓자 무형의 존재는 살아 있는 소녀의 형상과 합쳐졌다.
검은 머리 소녀는 마치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관절을 풀고는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앳된 모습.
소녀가 눈을 감고 시간의 저편에 있는 어떤 형상을 떠올렸다.
그 소녀가 눈을 뜨자, 소녀는 좀 더 키가 크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후 검은 머리 소녀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작지만 정성스럽게 지어진 신전의 내부.
신전 안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다.
오전과 오후에 청소부가 비로 쓸고 닦긴 하지만 그 이외에 황궁 옆에 있는 신전에 찾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옆에 테타우 대성당이 있는데 굳이 옛 사유지에 있는 조그만 사당을 찾을 이는 그리 많지 않기에.
신전 앞을 지키고 있는 황궁 근위병도 진입장벽일 것이다.
그 검은머리 소녀-리프니에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필멸의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신적인 시각으로 신전에 남겨진 흉흉한 흔적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날렵하게 솟은 콧날이 가볍게 킁킁거렸다.
“미르미도스는 아니고, 레키에탈, 아나바시스의 짓인가요?”
뒤로 팔깍지를 한 채 리프니에는 쓸쓸히 돌아섰다.
“……이번에는 전보다 빠르네요.”
리프니에가 고개를 들어 천장 가까이 난, 유리가 없는 창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우리의 루페르트 가우저는 지금 잘하고 있을까요?”
* * *
처음부터 노련했지만 날이 갈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더욱 원숙해져 간다.
아직 스물다섯도 넘지 않은 젊은 황제를 보는 주변인들의 느끼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가끔 축구 같은 하층민의 놀이를 즐기는 걸 제외하면 루페르트의 업무는 태엽 시계처럼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가끔 업무 스타일이 바뀐 적도 있긴 했다.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저지대 연방의 중요 도시를 두들길 때 황제는 궁정에서 구르고 구른 늙은 중신마저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능구렁이처럼 어려운 업무를 처리했다.
지금은 그때와 또 스타일이 달라지긴 했지만, 황제로서 루페르트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사실이다.
더욱 고무적인 건 타락의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폭군으로 알려진 군주들은 제위 초반엔 정열적으로 제국을 다스렸지만 타고난 성품, 악습, 습관, 인간관계 등으로 인해 점점 사람이 망가져 결국엔 제국 전체를 좀 먹는 암군으로 전락한다.
그러한 좋지 않은 습관은 술, 여자, 간사한 신하,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에서 비롯되는데, 황제 루페르트에게 그러한 좋지 않은 악습의 씨앗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여자를 멀리했고, 가까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울피아나가 옆에 있다고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은 잘 안다.
황제가 사적으로 울피아나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황제는 또 술을 마시긴 하지만 아주 가끔, 필요한 경우에만 마실 뿐이며 음주량도 극히 적다.
기분이 나빠질 경우 그는 술에 의지하기보다는 공에 의지했다.
간사한 신하가 없는 것도 황제의 장점 중 하나다.
이른바 삼총신이라 불리는 현재 루페르트의 참모진은 저 위대한 대황후 안젤리나가 몸소 재능을 알아보고 붙여 준 사람이다.
젊고 유능하고 능력이 있고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 그들은 충언과 재능으로 황제를 보필했다.
심지어 그들에겐 부패의 징후도 없다.
루페르트가 가장 아낀다는 요하네스가 약간의 돈놀이를 하는 걸 뺀다면 루페르트의 총신들은 누구보다 청렴하고 결백했다.
루페르트는 최근 모두를 백작으로 승진시켰다.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는 측근들에 대한 적절한 지위이자 보상이다.
일부 말 많은 신하들이 불만을 늘어놓긴 했지만 루페르트는 그런 사소한 목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군주다.
하지만 그 황제에게도 약점은 있다.
루페르트가 최근에 임명한 장군인 만슈타인이라는 군인이다.
아직 그는 검증되지 않았고 그 핏줄도 카렐리아 쪽이다.
카렐리아 군자금을 모조리 훔쳐서 달아나 카렐리아 반란군에게 통렬한 일격을 먹였다는 공적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군자금이 보관된 카렐리아의 프라덴엔 군자금만이 아닌 여러 명목의 예치금이 보관되어 있었고 만슈타인과 그 부하들이 군자금만을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를 모두 횡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만슈타인을 싫어하는 자는 그 횡령한 돈으로 군대를 만들고 있다는 게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만슈타인은 군사 경력도 짧고 굵직한 전쟁에 나간 적도 없다.
그의 경쟁자가 대부분 저 철혈대제 시절의 대전쟁을 경험한 걸 고려한다면 만슈타인은 분수에 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런 악평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황제의 보호 아래 빠르게 자신의 군대를 불려 나갔다.
“하벨은 서로, 만슈타인은 동으로.”
루페르트의 계획이다.
하벨이 골트문트가 모집한 제국군-구교 동맹군을 이끌고 직접 카렐리아에 나아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만슈타인은 자신이 직접 모집한 황제군을 이끌고 레벤호스트의 본진-트라이아와 하위 군주령을 공격할 것이다.
주전장은 카렐리아겠지만, 트라이아의 중요성도 만만치 않다.
두 전장 모두 승리를 거둔다면 어쩌면 내전은 외국의 개입 없이도 싱겁게 종결될지도 모른다.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이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어.’
노련한 농부가 물길을 억지로 틀어막는 대신 조금씩 풀을 풀어 저수지를 관리하는 것처럼, 모든 걸 막지 않고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으리라.
최근 루페르트가 생각해 낸 문제의 해결법이다.
결국 어떤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니까.
원인이 있는 이상 결국 사고는 터지게 되어 있다.
루페르트의 치세에 터진 사고도 원인을 찾으면 결국 저 철혈대제 시절부터 비롯된 해묵은 문제가 터진 것이다.
렌타이어마르크의 반란도, 레벤호스트의 역심도, 카렐리아의 반역도.
물론 루페르트에게도 불안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곧 일어날 내전을 앞두고 루페르트는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신님이 사라졌다.
그 말은 회귀의 권능 자체가 봉인된다는 이야기다.
회귀가 없다는 건 루페르트의 가장 큰 힘을 쓸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만약에 하벨이나 만슈타인이 전장에서 패배한다면?
그때는 루페르트는 황제 직위를 잃거나, 테타우가 불에 타는 걸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른다.
“…….”
수많은 고민을 앞둔 채 늦게까지 업무를 수행했다.
창밖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홀로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는 황제를 향해 한 명의 여인이 소리 없이 접근했다.
“폐하. 평소보다 수심이 깊어 보이시네요.”
울피아나다.
“네. 아무래도 전쟁을 앞두고 있다 보니.”
“신기하네요.”
울피아나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봤다.
인간이라기보다는 파충류와 같은 그 모습에 루페르트는 과거의 꺼림칙함을 느끼며 울피아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폐하는 무슨 일이 있든지 두려움 없이 올곧게 맞서는 분이셨는데. 왜, 그 대리결투 때 늙은 도펠죌트너가 거의 패배할 때조차 폐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울피아나의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실소했다.
‘그러한 의연함은 회귀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
생각지도 못한 점에서 울피아나의 본심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의 울피아나가 루페르트에게 끌린 모습은 어떠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몇 번이나 보이긴 했었고, 그것을 자기로 무기로 삼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전쟁은 두려우신가요?”
울피아나의 말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지만, 그녀의 반감을 사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
어쩌면 둘은 다시 한번 부부의 연을 맺을지도 모르니까.
“전쟁은 두렵지 않습니다.”
루페르트가 이미 밤이 되어 버린 제국 수도의 거리를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게 될 백성들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어머, 어쩜.”
울피아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폐하의 진심도 모르고 그만, 하찮은 아녀자의 식견을 내비치고 말았네요.”
“아닙니다. 불안한 마음이 있던 건 사실이니까요.”
울피아나는 가만히 루페르트를 응시하다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물러났다.
시종을 제외하면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없는 황제는 조금은 맥이 풀린 표정으로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을 머물렀을까.
[ 루페르트 가우저. ]
느닷없는 청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노곤한 표정을 짓던 황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여, 여신님?!’
루페르트는 급히 뒤를 돌아서서 안에 대기하던 시종을 내보냈다.
시종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루페르트는 다급히 자신의 목에 건 소라고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 몇 달간 힘없이 쓰러지기만 하던 소라고둥이 이번에는 책상 위에 똑바로 직립했다.
“여신님!”
루페르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신님은 여신님이다.
루페르트는 그 수많은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리프니에를 적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티그리트가 그 모습을 본다면 아마 당한 게 적어서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겠지만, 내막은 다르다.
루페르트는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오랜만에 저를 보니 반가운가요? 그런 표정은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아, 아닙니다. 여신님.”
“꽤 오래 자리를 비웠죠? 그래요. 그동안 나쁜 일은 없었나요?”
“몇 가지 사건이 있긴 했습니다.”
“그럼 회귀를 할까요?”
여신이 평소답지 않게 시원스레 말했다.
그 모습에 루페르트는 잠시 옅어졌던 신앙심이 급격히 회복되는 걸 느끼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왜요?”
“이대로 한번 나가 보고 싶습니다.”
“그래요? 이유가 있나요?”
“아니요. 그동안 너무 회귀에 의지한 거 같아서요. 회귀가 안 될 때는 정말이지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지만 역사라는 것이 결국에는 어디론가 흐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흐음…….”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무,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싶어서.”
“그런가요?”
“인간이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또 실망을 하는지, 음. 황제인 당신이라면 조금은 이해할지도 모르겠네요.”
리프니에가 복귀했다.
루페르트는 최고의 전력과 더불어 보험마저 확보했다.
‘레벤호스트.’
이제 싸움을 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 * *
운명의 날이 왔다.
레벤호스트가 슈코브의 유서 깊은 교회에서 카렐리아의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를 때, 루페르트 또한 같은 이름을 가진 왕관을 쓰고 거리를 향해 나 있는 황궁의 발코니 위에 서서 운집한 수만 명의 테타우 시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카렐리아 왕관의 정당한 주인으로 제국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을 호라가 보는 앞에서 맹세합니다.”
“카렐리아 왕으로서 참칭자를 제압하여 제국에 안녕을 가져올 것을 호라신과 여기 있는 모두를 증인으로 맹세하겠다.”
같은 이름의 왕관을 쓴 두 군주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맹세를 했다.
두 왕관 중 하나는 용광로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