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05화 (205/225)

205화 45. 두 개의 왕관 (4)

군대는 단순한 병정들의 모임이 아니다.

군대는 그 자체로 병사라는 단위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은 나라다.

어마어마한 식량과 돈을 소모하고 주변을 끊임없이 황폐화한다.

군대엔 병사만이 있는 게 아니다.

병사를 따르는 상인들과 노동자, 매춘부들이 수레를 끌고 군대를 따라 이동한다.

새로운 군대가 생긴다는 소문이 들리자 종군상인들이 앞다투어 군대가 터 잡을 곳에 진을 치고 장사 준비를 하는 건 흔한 풍경이다.

종군상인 막스도 그러한 장사치 중 하나다.

주변의 다른 상인들은 하벨의 군대를 찾아갔다.

장군의 명성이 드높고 돈이 많은 고어문트 선제후가 돈을 대주기 때문이다.

장사도 병사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돈 없는 병사는 산적이나 깡패와 다를 게 없다.

급료가 밀리는 병사들을 상대한 종군 상인들은 알고 있다.

병사와 장교가 써 준 차용증이라는 게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게다가 그 군대가 패배할 때도 문제가 된다.

으레 종군상인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군대를 따르다가 군대가 병영을 설치하면 그 주변에 장사판을 벌이는데 승리한 군대라면 술에 취한 병사들 주정을 제외하면 별문제가 없지만, 그 군대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난 적의 기병대가 들이닥치는 것도 문제지만, 진짜 큰 문제는 아군의 패잔병이다.

아군의 패잔병이 더 악랄하고 집요하게 이쪽을 약탈한다.

그러므로 종군 상인도 편을 잘 골라야 한다.

하벨 같은 검증되고 경력 있는 장군은 그렇기에 늘 종군 상인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인기 많은 장군을 따르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기 많은 장군에겐 당연하게도 많은 경쟁자가 있으니까.

경쟁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수익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막스는 하벨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트라이아 쪽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종군 상인도 출신이 중요하다.

슈발츠마인 사람인 그가 트라이아에서 장사를 한다면 십중팔구 첩자로 몰려 모든 걸 잃고 어쩌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막스가 선택한 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성, 만슈타인이었다.

이제 서른다섯 정도 된 젊은 장군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의문표가 붙은 인물이다.

그는 군사 경험이 짧고,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렌타이어마르크에서 활약을 했다지만 그 전쟁은 워낙에 격의 차이가 나던 전쟁이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전쟁에서 능력이 두각을 드러낸다는 말도 어폐가 있고.

만슈타인이 황제 루페르트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도 의문시되는 사항 중 하나다.

겨우 황제의 총애만으로 장군이 된 자가 과연 만만치 않은 트라이아의 장군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소문에 의하면 레벤호스트는 친히 군대를 일으켜 본대를 맡고 거기에 더해 수많은 군대를 전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늑대 같은 용병 대장이 그러한 잡다한 군대의 필두를 장식하며 트라이아와 혼인과 혈연으로 연결된 군주들-특히 트론하임 변경백, 푀르킨베르크 공작이 가난하지만 용기는 충만한 군대를 일으켜 레벤호스트를 보조할 것이다.

카렐리아 쪽에서도 저마다의 군대를 조직하고 있지만 그건 여의치가 않다.

만슈타인이 카렐리아의 금고를 탈탈 털어 글자 그대로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워낙 부유한 지역답게 카렐리아는 특별세를 거둬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고 있지만, 거기도 막스가 갈 곳은 아니다.

“여보. 괜찮겠어요? 만슈타인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는데.”

수레 옆에 탄 아내가 막스의 선택에 회의를 드러냈다.

“그 사람은 황제의 연줄만으로 장군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트라이아 사람은 용맹하고 유능한 장군들이 많다는데 과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에 막스는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도 엉겁결에 한 판단이다.

빚을 내서 종군 상인이 되었지만, 하벨을 따라가다가는 이윤은커녕 원금조차 건지지 못하리라는 계산이 서서 어쩔 수 없이 만슈타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실제로 만슈타인 군대 옆에 모여드는 종군 상인의 숫자는 적고 수준도 형편없었다.

만슈타인이 패배하지 않는 한, 적어도 그의 군대가 유지되는 한 막스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상당한 이익을 거둘 것이라 전망했다.

그렇다.

패배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하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 매춘부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물었지. 너 정말 슈발츠마인 사람 맞냐고!”

“아, 이거 고추 주변에 종기 같은 게 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만슈타인 밑에 모여드는 이른바 “신병”을 보면 안 그래도 없던 믿음이 싹 달아난다.

하벨 밑에는 경험 많고 노련한,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드는 병정들이 가득했는데, 만슈타인의 군대엔 아직 스물도 넘기지 못한 깡패들과 양아치들만 모여들고 있다.

게다가 그것들은 이미 성병에 걸린 데다가, 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방에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매독이 제국에서야 흔한 질병이라고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병인 건 불변의 사실이다.

이러한 질 낮은 병사가 과연 잘 싸울 수 있을까?

자맥질로 단련된 트라이아의 건장하고 키 큰 병사를 상대한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 번의 격돌도 버티지 못하고 왕겨처럼 흩어지는 건 아닐까?

그 숱한 물음 속에서 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하벨 쪽에 갈까……?’

그의 마음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 하벨 앞에 한 무리의 기마 무리가 지나갔다.

선두에 선 자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르고 장식용 갑주를 입은 누가 봐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다.

막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 사람이 만슈타인인가?’

미남은 아니다.

매부리코에 창백한 피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쓸데없이 반짝이는 눈은 보는 사람의 반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거부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남다르다.

뭐랄까, 마치 신을 보는 듯한 사도의 얼굴들이다.

그 만슈타인이 말을 세우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주변에 공장을 세워야겠군. 창고를 만들어야 해. 특히 많은 군화가 필요하겠지. 나의 군대는 제국은 물론이고 이 대륙 전체를 활보할 테니.”

그때 막스는 보았다.

그다지 호감형이라고 볼 수 없는 사내의 눈동자에 떠오른 확신을.

사람이 저렇게까지 확신 어린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의심과 의문으로 가득 찬 막스에겐 불가능한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저 사내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트라이아 선제후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과신하고 있지. 그의 뿔을 꺾어 놓는 것도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최대한 많은 군사를 모집해라. 질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병사의 질이라는 건 지루한 훈련보다는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에서 보다 높게 끌어 올릴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만슈타인이 바람처럼 말을 내몰았다.

그의 장교들이 장군의 뒤를 따랐다.

막스도 순간 강한 충동을 느꼈다.

마차를 끌고 만슈타인의 뒤를 따라가고픈.

하지만 그의 마차는 느려터진 짐말이 끌고 화물도 많다.

게다가 옆엔 아내도 타고 있다.

“뭐 해요? 당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참나. 하벨한테 가요. 당장. 여기엔 희망이란 게 없으니.”

“아니.”

막스가 아내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있어야만 해.”

의문으로 가득 찼던 막스의 눈에 환한 광휘가 번들거렸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돈을 벌 거야. 그래, 여자도 데려오자고. 승리를 일궈 낸 병사들은 더 많은 여자를 원할 테니. 빚을 더 내고 당신이 포주를 해. 엄청난 돈이 들어올 거야.”

확신.

만슈타인의 속성이 일개 종군 상인에게 전염됐다.

* * *

한 무리의 수레가 슈코브의 성문을 지나갔다.

슈코브에서 쫓겨난 구교도들이다.

그중엔 귀족도 있었고 시민도 있었다.

시민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진 않았지만 모진 말은 아끼지 않았다.

“제국의 개들아!”

“우리는 카렐리아인이다. 마인인이 아니라고! 핏줄부터 달라!”

“제국으로 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더러운 배신자들! 재산을 전부 뺏었어야 했는데!”

한 늙은 귀족이 가만히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욕하는 시민 하나를 노려보았다.

노귀족이 말했다.

“내가 젊을 때,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아는가?”

그 물음에 시민은 시선을 피했다.

노귀족이 지나가자 그 시민은 다른 구교도에게 비슷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것이 현재 카렐리아의 수도 슈코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때 누구보다 제국의 수도로 복귀하길 간절하게 바라는 자들이 이제는 누구보다 제국, 정확히는 슈발츠마인을 증오하는 역도로 변했다.

구교도는 모두 쫓겨났다.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토지가 전 재산인 귀족에겐 해당 사항 없는 말이다.

구교도가 사라진 도시의 의회는 자리가 꽤 많이 비어 있었다.

구교도 귀족들이 모두 쫓겨났기에 그 자리가 전부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이제 남겨진 자들이 나눠 가질 것이다.

이 반란을 획책한 비라네츠도 그중 하나.

그는 이미 꽤 괜찮은 포도 과수원과 양조장, 풍차가 딸린 마을 여러 개를 가진 후작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대로 트라이아 선제후를 불러 굳히기만 한다면야, 영원토록 그 재산은 나의 것이 되겠지.’

다른 망상가가 그러하듯 비라네츠 또한 자신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생각 같은 건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비길 수는 있겠다.

그것이 그 같은 인간들이 가진 공통적인 비전이었다.

이제 전권을 틀어쥔 비라네츠는 한때 경쟁자였던 야볼라프를 내려다보며 연단에 올라 낭랑하게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 카렐리아는 너무 오랫동안 인내했습니다.”

그는 오늘 루페르트의 폐위를 선언할 것이다.

루페르트가 쓴 두 개의 왕관 중 하나인 카렐리아의 왕관을 기어코 박탈하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낭독문을 선언 중에 그가 보고 있는 건 새롭게 거머쥘 후작령의 윤택한 토지가 전부니.

어리석은 어른들이 불장난을 하는 동안 레벤호스트는 대관식을 준비했다.

“드디어 때가 왔군.”

사태를 낙관하는 건 비라네츠만이 아니다.

비슷한 낙관이 레벤호스트의 눈동자에도 서려 있었다.

루돌프는 그늘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리석은 녀석.”

루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너의 부친도 멍청했지만, 너는 너의 부친보다도 더 어리석구나.”

레벤호스트의 군대가 카렐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슈발츠마인을 거쳐 가는 것이 최단 경로겠지만 아무리 레벤호스트라고 해도 거기까진 할 수 없었다.

그는 디터팔츠를 지나 렌타이어마르크 일부분을 경유해 카렐리아로 진입할 것이다.

파멸의 행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고 성대했다.

* * *

“아아~.”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불가해한 무언가가 기지개를 켰다.

“잘 잤네요. 정말이지 오랜만에.”

형언할 수 없는 존재는 끝없이 깊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았다.

영원히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은 수많은 생명을 주시하던 중 그 존재가 하나의 생명을 기억해 내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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