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45. 두 개의 왕관 (3)
마를로네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프리다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여자다.
자기보다 스무 살은 많은 전직 원장 신부의 아내로 취급받지만, 그녀는 주변 사람에게 자신을 가정부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아니고 관계를 가지지도 않는다.
그녀의 남편은 쟝-생트 베리에는 파문당하기 전에 법복을 벗은 동성애자다.
그는 생계를 위해 랑그도크의 한스라는 필명으로 하찮은 가십거리를 적은 팸플릿을 출판한다.
의외로 그의 출판물은 인기가 많았다.
딱딱하고 고지식한-외국인 말마따나 재미라는 속성을 결여한 제국 글쟁이와 다르게 베리에는 제국인들이 보고 폭소할 수 있는 글을 빠르게 써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속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다만 그의 저술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고 있고, 그것이 그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는 평가가 돌긴 하지만 베리에에게 필요한 건 젊고 아름다운 남성과 교제할 수 있는 돈이다.
프리다가 마를로네와 친해진 건 남편의 저술을 맡기기 위해서 그녀가 직접 인쇄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비슷한 둘은 금세 친해졌다.
“글쎄. 난 잘 모르겠어. 황제 폐하가 울피아나 님과 결혼한다는 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왜요? 좋은 일 아닌가요? 폐하도 미남이시고 울피아나 님이야 자타공인의 제국 제일의 미녀신데. 두 분의 결합은 예전에 레벤호스트 선제후와 앙쥬 왕국 공주의 결혼만큼이나 화제가 될 거 같은데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프리다. 난 말이야. 울피아나 님을 직접 보고 만난 적도 있거든? 실제로 내 방엔 그분이 준 옷도 있어. 나하고 안 맞아서 안 입고 다니지만!”
“정말인가요? 그 울피아나 님을?!”
프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다.
울피아나는 루페르트의 생각과 달리 살아 있는 성모급으로 추앙받는 인기 있는 정치인이니.
테타우의 젊은 여성에겐 동경을, 젊은 남성에게는 흠모를 받는 그녀의 영향력은 어지간한 군주보다 크다.
마를로네가 입을 삐죽거렸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자신이 아닌 울피아나의 진짜 모습을 이야기해도 될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프리다 넌 몰라. 난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상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거든. 그 여자는 명백히 이상하다고. 정신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그 선을 아예 넘어서서, 마치 시곗바늘이 한 바퀴 더 돌아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게 아닐까?’
지독한 여자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함부로 입 밖에 낼 순 없다.
울피아나는 선제후의 딸.
그것도 막강한 고어문트 선제후의 딸이다.
괜한 험담을 하다 이 일이 바깥에 새어 나간다면 엄벌은 물론이고, 선제후 가문의 개인적인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건 누구보다 마를로네가 잘 알고 있다.
안젤리나가 마를로네 조손에게 시킨 더러운 임무 중엔 감히 슈발츠마인을 비방한 문필가를 잡아서 족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 문필가는 인쇄소 롤러에 깔려 죽었다.
의뢰주의 명령에 따라 조부가 벌인 짓이다.
그때만 해도 그들이 인쇄소와 연을 맺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소문이 마음에 안 들어. 황제 폐하는 울피아나 님과 어울리지 않아. 아마 두 분이 결혼하신다면 대단히 불행하지 않을까? 특히 우리 폐하에게.”
“으음. 제가 볼 땐 울피아나 님이 손해인 거 같은데. 혹시.”
프리다가 마를로네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폐하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아니, 왜?”
마를로네가 정색하며 물었다.
“아니,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질투는 무슨. 나는 사실만을 말해. 나는 직관력이 있어. 척 보면 척이지.”
“그래서 마를로네 님이 아직도 시집을 못 간 건가요?”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 내가 당장 뚜쟁이한테 가서 부탁만 하면 공작 아들 백작 아들, 선제후 아들조차 줄을 설걸?”
“아…….”
“프리다. 그거 무슨 뜻이야?”
“아무 뜻도 아니에요.”
프리다가 새침하게 웃으며 달아났다.
마를로네를 그녀를 한 번에 붙잡고는 그녀를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았다.
“역시 마를로네 님은 힘이 세네요.”
“도펠죌트너니까.”
싱거운 미소를 흘리며 마를로네는 즐거운 오후의 한때를 만끽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황제가 그 여자랑 결혼한다고?’
마음이 갑자기 꽉 막히는 기분이다.
그 이유는 그토록 뛰어난 직관력으로도 해명할 수 없었다.
타인의 결혼에 왜 자신이 마음 쓰이는지.
* * *
볼크뷔텔 백작 막시밀리안 에베레스 폰 하벨.
하벨이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떨친 노장군은 골트문트의 충직한 심복이었다.
카스무어 왕국군 장교로 군경력을 시작한 그는 대륙의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고, 그중엔 철혈대제 치세에 벌어진 대전쟁의 경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부르봉 왕국과의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그는 보잘것없는 소귀족-용병에 불과했으나, 골트문트의 부친이 공석인 백작 영지의 지배권을 알선함으로써 어엿한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벨과 고어문트는 그야말로 불가분의 관계다.
그는 고어문트가 숨긴 최고의 검이다.
그리고 이제 그 검이 오랫동안 몸을 숨기고 있던 검집에서 빠져나와 빛을 발할 때가 됐다.
대륙 제일의 자산가라는 명성답게 고어문트는 단 한 번에 3만 명에 달하는 정예 군세를 뽑아냈다.
도처에서 장정들이 모여들었고 기회를 찾는 기병대장과 연대장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야전 사령관으로서 하벨은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는 새롭고 기발한 작전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보병 방진의 단단함을 신뢰하는 카스무어식 전술을 선호했다.
공성가로서의 능력은 평범하지만, 부르봉의 푸른 벌판과 저지대의 도랑과 진창, 옛 룸 제국의 황야에서 그가 보여 준 단단한 운영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주기에 충분했다.
그 하벨은 특히 보병대의 구성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직접 명성 있는 연대장들을 면접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연대를 끌어들이려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곧 제국 의회에서 제국군의 편성이 허락되면 하벨은 자신의 군세는 5만 명 넘게 불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숫자는 정직하지. 그리고 많은 숫자는 적에게 공포를 안겨 준다네. 그 대부분이 허수라고 해도, 커다란 숫자를 가지고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숫자 자체가 의미를 갖게 되겠지.”
하벨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곧 루페르트의 귀에 들어갔다.
‘하벨이라. 그는 위대한 장군이지.’
하벨이라는 이름은 회귀 전의 그 얼빠진 루페르트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고어문트의 장군으로 제국군 총사령관을 맡던 그 노장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냈고, 반도를 처벌했다.
레벤호스트의 군대를 글자 그대로 증발시키고 트라이아를 점령한 것도 하벨이었다.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화재 사고가 일어나 트라이아의 수도를 깡그리 불태운 사건이 일어나 자신은 물론 골트문트의 평가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그 화재는 불행한 사고지 하벨이 원한 게 아니다.
눈먼 총알에 맞고 전장에서 사망할 때까지 하벨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제국 전체를 호령했다.
루페르트는 그 하벨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내전을 피할 수 없다면, 렌타이어마르크 반란처럼 속전속결로 끝낼 수밖에. 전처럼 빠르게 반도를 제압할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역심을 품은 반란 분자에게 좋은 교훈이 되겠지.’
외교는 끝났다.
공은 전쟁을 움직이는 자-장군들에게 넘어갔다.
루페르트가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건 적절한 장군을 기용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다 주는 게 전부다.
이미 으뜸패와 같은 장군이 이쪽의 손패로 들어왔다.
남은 건 그를 얼마나 잘 유동적으로 지원하냐다.
하벨이 군사를 일으키는 동안 만슈타인이 테타우에 도착했다.
루페르트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검을 진심을 담아 맞이했다.
“만슈타인.”
루페르트가 감회에 찬 얼굴로 자신의 장수를 맞이했다.
“폐하.”
만슈타인은 황제의 인장에 입술을 맞추었다.
“자, 앉게. 좋은 술이 있군.”
루페르트가 시종에게 불러 최상급의 포도주를 따르게 했다.
각각 서로가 한 잔을 마신 후 루페르트는 기분 좋은 취기가 감도는 걸 느끼며 만슈타인을 바라보았다.
“만슈타인. 그대는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해 줬소.”
“뭐랄까, 보이더군요. 카렐리아인들의 행동이.”
“그래?”
“대부분의 카렐리아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신교를 믿지도 않고요. 신교를 믿는 건 돈 많은 상인과 귀족, 그들을 흉내 내고 싶은 얼치기 시민밖에 없습니다. 카렐리아 전체를 놓고 보면 한 줌에 불과하죠. 그런데 그 한 줌이 다른 다수를 압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쪽은 그쪽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요.”
여전히 확신에 차 있는 눈동자, 확고한 안목을 가진 사내다.
‘이렇게 뛰어난 자가 내게 온 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여신님이 내게 내려다 준 행운이다.’
만슈타인이 여기 오기 전에 안 좋은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귀족이 만슈타인이 프라덴에서 훔친 군자금의 상당수를 횡령했고, 그걸 자신의 금고에 온전히 보관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음해와 비방·중상은 황제 된 입장에선 질리도록 보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모략과 투서가 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수많은 음해 중에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하나의 진실을 위해 자신이 믿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진 않다.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횡령 건을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우며 그의 의중을 물었다.
“하벨이 군을 조직한다고 하더군. 내 그대를 휘하 장군으로 추천하지. 하벨을 넘어 총사령관이 될 순 없겠지만 렌타이어마르크 때처럼 기병대 사령관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거야.”
만슈타인을 장군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이번 전쟁에서는 아마 부관 정도에 그치겠지만, 또 다른 전쟁에서 만슈타인은 하벨처럼 “만슈타인군”을 이끌고 루페르트의 적을 처단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만슈타인의 생각은 루페르트와 달랐다.
“폐하. 대단히 영광스러운 제안입니다. 정말이지 영광스러운 제안입니다. 하오나…….”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른 복안이라도 있는가? 만슈타인.”
“네. 그렇습니다.”
만슈타인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은 이 전쟁을 관망할 생각입니다.”
“관망이라. 이대로 장군이 되지 않고 시간을 보내겠다는 건가? 경력을 쌓을 좋은 기회인데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짚이는 곳이 있습니다.”
“짚이는 곳이라.”
“어쩌면 군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개의 군대라.”
“분견대가 아닌, 제국 전체에서 활동하는 두 개의 군대지요.”
“카렐리아와 트라이아. 두 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걸 생각하는 건가?”
만슈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시선이 황제를 똑바로 향했다.
“카렐리아와 트라이아. 두 곳을 동시에 제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루페르트는 황제군의 창설을 포기하고 그 자금 대부분을 하벨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이제 와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한다는 건 시기상으로도 자금상으로도 빠듯하다.
세금을 더 거둔다면 모르겠지만 세금을 거두면 늘 그렇듯 인기도 같이 떨어지는 법이니까.
주저하는 황제를 향해 만슈타인이 말했다.
“제 사비로 군대를 모집하겠습니다.”
“뭐라고?”
황제가 놀란 눈으로 자신의 검을 보았다.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다만, 급료는 폐하께서 지급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