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45. 두 개의 왕관 (2)
프라덴 경비병 입장에서 만슈타인을 막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제국대령 만슈타인은 카렐리아 경비 기병대의 대장으로 같은 카렐리아군이다.
그것도 현재 최고위 장교인 페콜 프라코프와 동격이고, 페콜 프라코프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페콜 프라코프의 형인 얀 프라코프와 절친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주둔군 안엔 존재하지 않는다.
“만슈타인 대령님. 어찌하여 여기에 기병대원을 데리고 오셨습니까?”
부하의 전갈을 듣고 숙소에서 나온 장교가 아직 졸음이 덜 가신 얼굴로 용무를 물었다.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상부의 명령이네.”
“상부의 명령이요?”
“그래. 위쪽에서 뭔가 준비할 게 있는 모양이야.”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뒤늦게 소집된 만슈타인의 기병대가 마저 프라덴 시내로 진입했다.
500기에 달하는 기병이 도시 안에 들어오자 광장이 제법 비좁아졌다.
지나다니던 관리와 시민들은 수군거리며 화려한 갑주와 투구를 쓴 기병대가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현재 프라덴의 수비를 맡은 이는 베드르지흐 드보르자크란 이름의 소령으로, 주로 보급과 인사를 맡는 행정계 장교였다.
그의 부하 중 하나가 베드르지흐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대령이 우리 상관이라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 그와 그의 기병대를 이 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요? 목적이 확인되기 전에 일부를 내보내라고 요구하는 쪽이 안전해 보입니다만.”
이에 베드르지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했다.
“그대는 대령이 혹시 반역이라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나?”
“반역까진 아니더라도…….”
“대령이 다른 마음을 품어도 그의 기병대는 그의 사병이 아닌 카렐리아 경비기마대야.”
“제국인이 반 아닙니까?”
“절반은 카렐리아인이지.”
“마자르인도 섞인 거로 압니다만.”
“아무튼 만슈타인 대령이 문제를 일으켜도 전부가 그에게 동조하진 않을 거야.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기마대에 심어 둔 우리 쪽 사람이 먼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했겠지. 우리 주둔군과 경비기마대 쪽의 카렐리아인과 힘을 합치면 만슈타인 대령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베드르지흐의 의견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다.
어떤 부대의 지휘관이라고 해서 그 부대 전체를 통솔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카렐리아처럼 수많은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에선 그 통솔의 난이도가 더욱 높아진다.
실제로 만슈타인의 기병대는 절반이 제국인이고 나머지 절반은 카렐리아인과 이웃한 마자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기병대 장교는 만슈타인이 젊은 시절 리히트보덴에 다녀왔을 때부터 함께했던 충성스러운 부하가 맡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기병대의 운영을 카렐리아 의회가 주는 급료에 의존했지만 수시로 사재를 털어 병사들의 경조사를 챙겼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부하들을 몸소 도와주기도 했다.
심지어 도박 빚을 진 병사 하나가 깡패들에게 붙잡히자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와선 깡패와 담판을 낸 적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병대 내에서 만슈타인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고 기병대 병사들은 카렐리아보다 만슈타인 개인에게 더 충성했다.
실제로 만슈타인은 기병대를 카렐리아 경비기마대 대원이 아닌, 자신의 사병처럼 만든 것이다.
그런 그가 명한다면 기병대는 지금 당장 프라덴에 불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총질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만슈타인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테지만.
“아, 다름이 아니라. 가져갈 게 있어서 말이야.”
그가 장교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을 가져가겠단 말씀입니까?”
“카렐리아의 가장 중요한 것이지.”
“네? 카렐리아의 가장 중요한 것?”
“카렐리아에서 돈만큼이나 중요한 게 어디 있겠나.”
만슈타인이 주변을 돌아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프라덴의 금고를 압류하고 거기에 예치된 자금을 반출하겠다.”
“이건 반역입니다.”
장교가 말했다.
“반역은 지금 슈코브 의회에 모인 놈들이 하고 있겠지.”
만슈타인이 피스톨을 겨누었다.
이에 기병대 일부가 주춤했다.
카렐리아 출신 기병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만슈타인은 물론 그들의 동료들마저도.
이것이 장악이다.
모두를 장악할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을 장악한다면 따르지 않는 소수도 그 대부분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게 군대의 속성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 소스라치게 놀란 베드르지흐는 주둔군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만슈타인이 한발 빨랐다.
만슈타인의 기민한 장교들은 어느새 성벽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주둔군 전체를 그들의 손아귀 안에 틀어쥐었다.
이미 프라덴은 완벽하게 만슈타인의 수중에 넘어갔다.
발악은 할 수 있겠지만 무익한 시체만이 쌓일 것이다.
아무 예고도 없이 프라덴을 장악한 만슈타인이 장교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네. 무익한 전쟁이야.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욕심 많은 상인과 망상에 젖은 얼치기 귀족들이 진짜 소중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들도 알지 못하는 정의를 입에 담으며 일으키는 전쟁이지.”
“……대령님은 카렐리아 사람이 아니십니까?”
“카렐리아 출신은 맞지.”
“그렇다면 왜?”
“하지만 나는 카렐리아 사람이기 이전에 제국인이다.”
만슈타인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이미 성 전체를 장악한 만슈타인의 기병대는 사방으로 퍼져 시 전체를 제압했다.
만슈타인의 기병 하나가 뒷문을 통해 급히 시를 빠져나가 슈코브로 향했지만, 이미 대기하고 있던 만슈타인의 또 다른 기병이 달려 나와 면전에서 피스톨을 쏴 그를 거꾸러뜨렸다.
그 모습을 본 베드르지흐는 그제야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설마하니 탈영병까지 계산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도 소문으로 들어서 안다.
황제 루페르트가 저 렌타이어마르크 동란을 그토록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던 배경엔 만슈타인이라는 걸출한 장교의 계획이 있었다고.
이미 때는 늦었다.
도시는 만슈타인의 것이고 만슈타인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주둔군의 침묵 속에서 만슈타인의 병사들은 프라덴의 금고를 열어젖혔고 그 안에 담긴, 눈이 멀 정도로 환한 금화를 보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게 다 얼마야.”
“어마어마한 돈이군. 이렇게 많은 금화를 언제 볼 수 있을까?”
“잠깐 다들 나가 있어. 장교님들께서 금고를 보겠다고 하네.”
“뭐야? 대령님 몫으로 슬쩍 챙기려는 건 아니겠지?”
해가 지기 전에 스무 대의 수레와 500기의 기병이 도시를 빠져나가 슈발츠마인을 향했다.
뒤늦게 카렐리아 귀족들이 프라덴에 도착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텅 빈 금고가 전부였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카렐리아 동란의 첫 번째 사건이다.
* * *
만슈타인이 카렐리아의 세금은 물론이고 군자금마저 깨끗이 털어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빠르게 루페르트의 귀까지 전해졌다.
얼마 만일까.
루페르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린 건.
“만슈타인. 나의 만슈타인.”
여신의 부서진 동상을 봤을 때만 해도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오직 어둠만이 있으리라고 보았지만, 실제로 펼쳐진 현실은 그의 상상을 가볍게 넘어섰다.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신하인 만슈타인이 카렐리아에 통렬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루페르트는 휘하의 기병대 3천 기를 보내 만슈타인의 행렬을 보호하도록 했다.
카렐리아의 군자금은 온전히 루페르트의 군자금으로 전용될 것이다.
‘레벤호스트.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이대로 레벤호스트가 카렐리아의 왕관을 쓴다면 그는 자신의 재산만으로 카렐리아와 트라이아 두 곳을 모두 지켜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카렐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그 막대한 부로 막강한 군대를 일구겠다는 계획이 처음부터 부러진 것이다.
시간을 미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이미 루페르트는 군대를 일으키고 있다.
카렐리아 의회가 두 번째 질의를 요구한 날, 루페르트는 황제군이 아닌 제국군을 소집했다.
카렐리아의 행위 자체가 제국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제국의회의 승인 등 여러 까다로운 요건을 거쳐야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는 제국군의 소집과 동시에 그의 사병 - 황제군 또한 소집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리 무식한 병사라 해도 선제후보다는 황제의 군기 아래 서는 걸 선호할 것이다.
실제로 황제가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군대를 모으자 제국 각지에서는 전쟁에서 이득을 얻은 자, 전쟁을 통해 인생을 바꿔 보려는 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테타우로 모여들었다.
테타우의 총기 제조상은 쉬지 않고 불을 내뿜으며 새로운 총기를 제조했고, 대장간에서는 장창과 갑주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구업자들은 군마의 발굽에 새로운 편자를 박았고 자수업자들은 새로운 전쟁에 쓸 군기에 달 장식과 금실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제국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루페르트와 레벤호스트. 모두가 아는 두 군주의 반목이 이제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듯이 행운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법이다.
만슈타인이라는 뜻하지 않은 호재가 지나간 후 더 이상의 행운을 없을 거라고 보았지만 느닷없는 운명이 다시금 루페르트 앞에 나타났다.
고어문트의 선제후인 골트문트가 루페르트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했다.
이미 수시로 사석에서 만나는 사이라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음에도 정식 알현을 요청한 건 그가 정치적인 행위를 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동시에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하며 루페르트가 골트문트를 왕좌에서 맞이했다.
“이 전쟁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골트문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황제에게 말했다.
“고어문트가 카렐리아를 벌하겠습니다.”
노련한 정치가답게 루페르트는 골트문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한눈에 파악했다.
결국은 오랫동안 이야기하던 혼인 - 자신과 울피아나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루페르트는 어쩔 수 없이 서약을 저버려야 하고,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울피아나와의 결혼 생활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두려울 게 있을까.
루페르트는 알현실 구석에서 자신을 한결같은 눈동자로 응원하듯 바라보는, 이제는 그 공포심이 어느 정도 가신 울피아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름답다.
단순한 감상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르트와 골트문트.
과거의 동맹이 재현됐다.
* * *
고어문트가 황제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은 테타우의 인쇄소에도 어김없이 흘러 들어갔다.
인쇄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마를로네도 그 소문을 들었다.
정치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미래와 안락함만을 생각하는 그녀에겐 누가 누구랑 손을 잡았니, 무슨 전쟁이 벌어지니 하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 늙은 도펠죌트너가 한 말이 송곳처럼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
“우리 황제. 나이에 맞지 않게 고단수란 말이야. 순결 서약을 해 놓고 모두를 방심시키더니 결국 가장 강한 제후와 손을 잡고 그 서약을 무시해 버리는 선택을 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마를로네가 하품을 하며 도펠죌트너에게 물었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뭐긴 뭐야. 황제 폐하가 장가를 간다는 이야기지. 그 아름다운 울피아나 님한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