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02화 (202/225)

202화 45. 두 개의 왕관 (1)

트렌하벤은 테타우 북쪽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다.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기보다는 테타우에 부속된 일종의 항만 도시로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을뿐더러 항만을 이루는 수심의 깊이가 일정치 않아 항구로 쓰기엔 부적합한 곳이지만 테타우 고위층이 배를 타거나 그들을 위한 상품을 융통하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 척의 배가 트렌하벤에 도착했다.

여느 배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상선이지만 그 상선에 올라탄 항만 관리자는 그 배가 여느 평범한 상선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배는 리히트보덴에서 출항했다.

모두가 이야기로만 들은 세계의 끝에서 도착한 배가 이곳 트렌하벤에 이른 것이다.

그 배의 책임자는 아서 픽튼, 리히트 보덴의 총독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건장한 앙쥬 왕국의 노전사는 제국 관리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하나는 황제 폐하에 대한 인사이고, 다른 하나는 클라인하르트 대주교의 호출입니다.”

“황제 폐하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군요.”

항만 관리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귀띔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카렐리아에 문제가 터져서요.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전쟁.”

아서 픽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전쟁이라.’

좋지 않은 징조다.

전쟁이 일어나면 리히트보덴과 본국 사이의 교역은 당연히 줄어든다.

리히트보덴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가 끊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철과 목재, 식량과 가축 같은.

뿔이니 진주 같은 사치재는 경제가 호황일 때나 인기가 있는 것이지 어려운 시기가 오면 가치를 잃는다.

‘돌아갈 땐 확실하게 배를 채워서 돌아가야겠어. 철과 화약이 가득 필요하겠군. 죽일 스크라엘링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가 뭍에 오르자 항만 관리가 아서 픽튼 뒤에 있는 사슬로 팔이 묶인 검은 머리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여자아이는 뭡니까? 흔치 않은 용모인데.”

“아, 이 소녀야말로 대주교께서 저를 찾은 목적입니다.”

“그렇습니까?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신대륙인가요? 거긴 사람이 없다고 들었는데.”

“모든 사람이 죽은 건 아니겠지요.”

적당히 얼버무렸다.

스크라엘링이라는 정체를 밝혀 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

항만 관리들은 신기한 눈으로 검은 머리 소녀가 지나가는 걸 보았다.

사슬에 묶인 채 가축처럼 끌려가던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알아듣지 못한 괴성을 내질렀다.

“리프니에!”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적어도 이곳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 사 음절의 신성하고도 불경한 이름을.

* * *

카렐리아의 하급 귀족 얀 프라코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친우인 만슈타인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그의 저택은 탁 트인 평원에 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저택 주변엔 아름다운 과수원과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 카렐리아 귀족의 땅이었다고 한다.

탐나는 땅이다.

아마도 카렐리아 사람이라면 모두 그의 땅을 탐낼 것이다.

얀 프라코프도 예외는 아니다.

그 또한 카렐리아 사람이라고 탐욕이 있는 카렐리아의 흔한 귀족 중 하나니까.

만슈타인과 친하다고 하지만 늘 그는 만슈타인의 행운과 부를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시기했다.

사실 그에게 속한 게 아니다.

연상의 아내가 그에게 준 것이다.

결혼 생활은 5년도 채 지속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재산은 전부 만슈타인의 것이 되었다.

처가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게 만슈타인에겐 든든한 뒷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만슈타인의 뒷배경은 무려 제국의 황제다.

혹자는 만슈타인이 아내를 독살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누구도 감히 만슈타인의 재산을 공개적으로 뺏으려 들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카렐리아의 의회가 제국, 정확히는 슈발츠마인 가문과 반목을 선언했다.

루페르트를 카렐리아 왕에서 내쫓고 새로운 왕을 뽑는다는 소문이 슈코브 시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새로운 왕이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루페르트가 카렐리아 왕관을 잃는다면 카렐리아 전체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경제적 변화다.

친 루페르트파는 그동안 누려오던 호사 대신 갖가지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경제적인 탄압은 대표적인 보복 방식이다.

그들이 가진 수많은 재산, 특히 토지는 황제파가 아닌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만슈타인은 카렐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의 신하.

그가 받은 재산이 어떤 식으로 형성됐든 간에 일단 카렐리아 의회에서 루페르트를 폐위시킨다면 만슈타인의 재산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얀 프라코프 또한 친우의 재산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그가 친우를 만나러 가는 이유는 친우의 재산에 관해서였다.

“세상이 뒤숭숭하군. 뜬금없지만 내가 자네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해 주려 하네. 알다시피 의회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루페르트가 카렐리아 왕에서 쫓겨난다면 황제파로 분류된 사람들은 모두 비할 바 없는 불이익을 받겠지.”

“그래? 그래서?”

만슈타인은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재산을 내게 잠시 이전하게. 내가 그대의 재산을 관리해 주지. 우리 가문이야 원래 중립이고 게다가 신교 쪽으로 분류가 되니 의회 놈들이 뭐라고 할 건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 재산을 전부 자네에게 넘기고 나는 떠나 있으라는 건가.”

“그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자네가 내 재산을 돌려주지 않으면?”

만슈타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얀 프라코프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내가 그런 짓을 하겠나?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뭐,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나저나. 그대 동생이 카렐리아 주둔군 장교라고 했던가?”

“아, 그래. 이야기 안 했었나. 이제는 슈코브에 있어.”

“그렇군. 지금도 슈코브에 있나?”

“그렇다네.”

“좋아. 그럼 내 즉시 공증인을 불러 내 재산을 그대에게 이전하도록 하지.”

“그래 주겠나?!”

“당연하지. 난 자네를 믿으니.”

얀 프라코프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글쎄. 그건 지나 봐야 알겠지. 전부 돌려줄 생각은 없어. 적어도 이 저택은 내가 가져야겠어.’

얀 프라코프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 앞에서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사내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뱀이 들어 있는지.

‘얀 프라코프. 결국 마각을 드러내는군. 자네의 잘못은 아니야. 단지 이 탐욕스러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습성이 그대에게 옮겨붙은 것에 불과하겠지.’

만슈타인이 얀 프라코프에게 접근한 이유는 하나다.

얀 프라코프의 동생인 페콜 프라코프는 카렐리아 방위군의 대령이다.

장군을 두지 않은 카렐리아에서는 만슈타인과 더불어 최고위급 인사다.

페콜 프라코프가 카렐리아의 진정한 군사 지도자로 평가받는 반면, 만슈타인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보낸 객장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만슈타인과 그의 기병대는 정계에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의회는 물론이고 주 방위군으로부터 아무런 전갈을 받지 못한 사태다.

말 그대로 개점휴업인 셈.

하지만 만슈타인은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빤히 알고 있다.

곧 또 다른 부대를 보내 그와 그의 기병대를 체포하려 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구금과 재산 박탈로 끝나겠지만 운이 나쁘면 항변의 기회조차 없는 재판을 받은 후 처형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얀 프라코프의 이야기를 듣고 확신을 얻었다.

‘자네 동생이 프라덴을 비웠군.’

카렐리아 방위군은 3백 명 규모의 월급을 받는 정규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슈코브 옆에 자리 잡은 소도시 프라덴을 지키는데, 그곳에 카렐리아 전역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금을 보관하기 때문이다.

그 세금은 정산을 거쳐 황제에게 보내지지만 적어도 이제부터는 카렐리아를 위한 군자금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이건, 내 인장이네. 지금 급한 용무가 있어서 자리를 비울 것이니, 공증인이 오면 즉시 재산 이전을 실시하도록 하게.”

“그래 주겠냐? 역시 만슈타인. 정말로 호쾌하고 판단이 빠른 친구군. 모두가 자네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탐욕에 눈이 먼 얀 프라코프는 만슈타인의 하인들이 그에게 검은색 계통의 장식용 갑옷이 아닌, 기병대의 두꺼운 흉갑과 허벅지에 두꺼운 장갑판이 달린 기병용 갑주를 입히는 걸 보고도 아무런 지적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어디론가 간단한 출정을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렐리아 기병대장인 만슈타인의 본업이 그러한 것이니.

“그럼, 다녀오게.”

“그래. 얀 프라코프. 내 일이 끝나면 돌아오겠네.”

만슈타인은 그대로 저택에 대기 중인 소수의 부하와 함께 아내의 집을 떠났다.

창가의 발코니 위에서 얀 프라코프는 멀어지는 친우를 보며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네. 나의 친구여.”

만슈타인은 코웃음을 쳤다.

좌우에 있던 부하들이 놀라서 물었다.

“대령님.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내 재산 전부를 내 친구라고 주장하는 촌놈에게 모두 넘겼다네.”

“그게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이고말고.”

만슈타인이 낯빛을 진지하게 바꾸며 좌우에 명했다.

“카렐리아 기병대 전체를 소집해라.”

“어디를 칠 생각입니까?”

부하의 답에 만슈타인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끝 모를 평원을 노려보며 답했다.

“프라덴.”

“프라덴이요?!”

부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묻는다.

이에 만슈타인은 빙그레 웃으며 부하들에게 답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카렐리아의 군자금 전체와 바꿀 수 있다면, 내 아내의 재산은 값싼 것이겠지.”

* * *

프라덴. 작고 구식이지만 단단하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슈코브로부터는 걸어서는 3시간, 말로는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

프라덴에 카렐리아의 세금이 모이는 걸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프라덴 자체가 덜 알려진 도시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도 주민이라기보다는 카렐리아 자체의 관료나 귀족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군인과 관료, 귀족 말고는 드나들지 않는 한적한 도시에 한 무리의 기병대가 도착한 건 카렐리아 의회에서 한창 루페르트에 대한 폐위 안건을 상정하고 있을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요! 이건 반역이라 말이오! 이 이상의 반역은 위험하오.”

이제 와서 온건파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대세를 장악한 건 비라네츠의 강경파였다.

“레벤호스트 선제후가 이곳에 올 것이오. 이미 다 일은 진행됐고 우리가 하는 행위는 단지 추인 행위에 불과하오.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지.”

이미 승자의 미소를 머금은 비라네츠가 오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동안 만슈타인이 이끄는 기병대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프라덴에 진입했다.

‘드디어 때가 왔군.’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만슈타인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모든 재산을 잃음과 동시에 그는 모든 걸 거머쥐게 될 터이니.

감출 수 없는 야망의 빛이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 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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