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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201화 (201/225)

201화 44. 대답 없는 여신 (6)

클라우데 2세, 안드리아의 루돌프, 티그리트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내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이름은 안드리아의 루돌프다.

그 옆엔 선제후 레벤호스트가 편안하게 앉아 카렐리아로부터 온 서신을 웃음기를 띤 얼굴로 읽고 있었다.

“운이 좋군. 특별한 공작을 하지도 않았는데 카렐리아에서 직접 나를 불러 주다니.”

그는 주변에 서 있는 신하들에게 명랑한 어조로 자신의 좋은 기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루돌프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나갔지만 더 이상 루돌프는 레벤호스트의 눈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레벤호스트는 카렐리아의 왕이 되어 황제 루페르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생각에 취해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저 클라우데 2세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지. 실제로 그가 클라우데 2세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클라우데 2세처럼 되려는 건 확실한 사실이야. 선제후들을 속이기 위해 순결선언 같은 수작을 부렸지만 실제로는 궁정에서 울피아나와 거의 부부처럼 지내지 않나? 때가 무르익으면 그는 순결 선언 같은 약속은 쓰레기통에 집어 던질 것이고 선제처럼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들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 그는 선제후 제도 그 자체를 폐기하고 저 동방제국의 폭군처럼 자신 앞에 모든 이가 엎드리는 야욕을 드러낼 것이다.”

그동안 잇따른 불운에 주눅이 들었지만 불운이 지난 후엔 잇따른 행운이 다가왔다.

레벤호스트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곧 카렐리아 사태에 개입할 것이다.

이미 그의 군대는 준비되어 있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하위 군주들은 기꺼이 그의 군기를 따라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켜 신교의 대의를 지지할 것이다.

노르드마르크가 동맹에서 빠진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신 카렐리아를 손에 넣는다면 역병으로 초토화된 노르드마르크 같은 가난한 나라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루페르트 가우저와 클라인하르트 대주교의 야망은 분쇄될 것이다.”

망상에 가까운 미래를 구상하며 미소 짓는 레벤호스트를 보며 루돌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안개에 싸인 그는 인간의 눈이 아닌 인지 그 자체를 마비시키는 소름 끼치는 권능의 기반 위에 서 있으니까.

선제후의 집무실을 빠져나가며 루돌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이하군.”

황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리하게 일이 돌아가고 있다.

말 그대로 잇따른 불행과 불행이 겹쳤다.

심지어 대단히 낮은 확률의 불행이 터져서 재앙적인 사태를 만들었다.

카렐리아 의회가 그런 식으로 빠르게 이반할 거라고는 루돌프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황제는 궁지에 몰렸고 이제 회귀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루돌프가 황제였다면 그는 기꺼이 이 시점에서 회귀를 할 것이다.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전 자체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결과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회귀를 하지 않았다.

회귀의 권능을 완벽하게 감지할 수 있는 유이한 인물인 루돌프는 또 다른 리프니에의 사도, 루페르트가 왜 회귀를 시도하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나쁜 건가. 지금 대목에서 내전의 징조가 보이는 것 자체가 패배의 징후다. 레벤호스트를 잡으면 끝날 거 같나? 전혀 아니야. 하나를 쓰러뜨리면 다른 하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지. 어떨 땐 하나를 잡으면 두 개가 동시에 고개를 들기도 하고. 파괴되는 제국을 두 눈으로 본 자가 이런 선택을 한다고?’

잠시 생각을 하던 루돌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순간 그의 입가에 늙은이의 미소가 아닌, 힘찬 젊은이의 미소가 물감처럼 번졌다.

‘설마 또 여신의 그 나쁜 버릇이 발동한 건가?’

어쩌면 이쪽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리라.

리프니에는 평범한 신이 아니다.

어떤 신보다 더 깊고 강력한 권능을 주지만 그 반대급부로 그 여신은 수혜자의 고통을 원한다.

천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했기에 알 수 있다.

그의 여신 리프니에는 알면 알수록 혐오할 수밖에 없고 멀리해야 될 존재라는 걸.

‘신이라고 하나 그것은 마음이 병들었지.’

어둠 속에서 미소 지으며 루돌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을 숭배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리프니에는 모든 걸 주지만 동시에 끝없이 고통과 시련을 주고 그 사도를 시험하려 든다.

“그대는 내게 제위를 양보했어야 했다……. 나만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지.”

루돌프가 어둠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사막의 색채를 가진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앙상하고 뒤틀린 몸을 가진 볼품없는 사내였다.

루돌프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은 제각각이다.

사막을 닮은 여인은 존경과 희미한 애정을 담아 그를 응시한 반면 볼품없는 사내는 두려움과 증오, 그리고 경멸을 담아 루돌프를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것 같군.”

제국 성인들의 시선이 루돌프의 입에 모였다.

“남아 있는 제국 성인들을 소집해라.”

루돌프가 돌아섰다.

“제국을 끝장낼 때가 왔다.”

사막을 닮은 여인은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앙상하고 뒤틀린 사내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제국을 만든 당신이 왜 제국을 파괴하려 들지? 모순 아닌가?”

이에 루돌프는 소탈하게 웃으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내가 황제가 아닌 제국은 제국이 아니다.”

그가 앙상한 사내를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크리오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

아주 잠깐 루돌프의 눈동자에 거역할 수 없는 섬뜩한 살기가 셀 수 없는 칼날처럼 뻗쳐 나왔다.

앙상한 사내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루돌프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같은 시간 황제 루페르트는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충격에 직면해 있었다.

여신이 사라졌다.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회귀 이후 이렇게 흔들린 적이 있었을까.

루페르트는 무릎을 끼고 기다시피 하여 바닥에 흩어진 소녀의 파편을 주워 모았다.

억지로 소녀의 형상을 맞춰 보려 했지만 잘될 리 없다.

오히려 균형을 잃은 파편들이 떨어지며 더 잘게 부서질 뿐이었다.

손아귀 안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모래를 보며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평소 여신의 영역 주변에서 느껴지던 심해를 연상케 하는 차고 음울한 기운은 흔적도 없고 늘 맡는 테타우의 공기만이 소리 없이 루페르트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여신님!”

다시 여신을 불렀다.

그러나 리프니에는 대답이 없다.

충격과 절망 속에서, 그보다 더 크게 밀어닥쳐 오는 두려움 속에서 루페르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허공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제 루페르트는 자신이 어떤 황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회귀라는 권능 위에 서 있던 위태로운 성이다.

더 이상 여신이 응답하지 않자 과거의, 무능하고 끌려다니기만 하던 무력한 과거의 자신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루페르트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과거의 자신을 부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신님은 잠시 나를 떠난 상태다.’

루페르트는 억지로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것마냥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발걸음조차 제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내장에 칼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 전신을 찌르르 울렸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다시 물었다.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신님이 없으면 저는…….”

루페르트는 부서진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번 사태만 해도 회귀를 믿고 느슨하게 밀어붙인 감이 없잖아 있다.

적당한 흐름을 보고 적당한 방법으로 밀어붙였다.

왜냐하면 그런 적당한 방법들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더 쉽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혹시 모를 후폭풍의 영향까지 고민한 멀리 내다보는 선택지였다.

과욕이었다.

확실하게 처리했어야 했다.

설령 나중에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더라도.

마치, 선제처럼 말이다.

“…….”

아주 잠깐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티그리트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런 바로 앞만 보는 선택만 한 건가?’

무시하고 경멸하고 있지만 사실 그 무시와 경멸은 티그리트가 황제를 둘러싼 강력한 경쟁자이기에 불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해도 그가 천 년간 제국을 운영한 건 사실이니까.

날것 그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기에 루페르트는 상대방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티그리트와 같은 위치에 끌어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버티지를 못할 테니.

실제로 루페르트는 선제가 저지른 과오를 발견하며 틈만 나면 그의 방식을 비웃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적어도 선제의 방식이 당대에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건 루페르트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가 그런 방법만을 억지로 골랐다는 것.

이제 진정한 황제로 거듭난 루페르트에겐 자연스레 보인다.

수많은 방법이 있음에도 그러한 당장의 앞만 보는 선택을 한 건 성품이나 기질을 넘어선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티그리트. 그 인간은 여신님을 누구보다 증오한다. 하지만 그 증오는 여신님에게서 비롯됐겠지…….’

리프니에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이미 몸으로 겪은 바다.

처음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루페르트가 리프니에에게 가진 이미지는 제멋대로인 십 대 소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니라면.

루페르트가 알지 못하는, 보다 잔인하고 악랄한 기질이 있다면?

이를 테면 루페르트에게 ‘주제넘게’라고 말하던 그러한 냉혹함이 여신의 본질이라면?

“…….”

소용돌이치는 생각 속에서 루페르트는 끝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인내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여신님은,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가장 회귀가 필요한 시간에 일부러 자취를 감추신 건가? 그런 건가?’

의지하는 마음이 증오로 바뀌는 건 대단히 흔한 일이다.

마치 과일이 썩어 몸에 해롭지만 당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술이 되는 것처럼.

그러한 좋지 않은 생각은 사람을 침몰시키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위안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한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 점에서 루페르트는 남들보다 비범한 구석이 있다.

“무슨 소리냐. 루페르트 가우저!”

은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루페르트가 윽박지르듯 소리 질렀다.

“내겐 여신님뿐이다…….”

황제가 돌아섰다.

“그분이 뭘 하든, 나는 그분의 사도이다. 이 점은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변치 않을 것이다.”

담담히 의지를 담아 읊조리는 와중에 한 가지 의문이 뱀처럼 고개를 들었다.

제국이 멸망한다면?

제국이 멸망해도 여신의 사도로 남겠는가?

그 질문에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창에 몸이 꿰뚫린 듯한 전율 속에서 루페르트는 여신의 신전을 빠져나갔다.

비록 그 몸은 충격에 짓눌려 마비된 상태지만 그 눈빛만큼은 황제의 위엄을 위태롭게나마 간직하고 있었다.

‘여신님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해 보이겠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겠다.’

황제로서의 진정한 능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 시험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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