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44. 대답 없는 여신 (5)
대학의 마법사 예나는 여느 마법사가 그러하듯이 신보다 악마라는 존재에 더 큰 매력을 느꼈고, 그들의 힘을 갈망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악마 연구자가 되고자 한 건 아니다.
대학의 여느 전도유망하고 야심 차고 오만한 학생처럼 그녀도 오각의 마법사가 되어 황제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비의 탑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 전설처럼 군림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있었다.
재능의 한계가 삼각에서 멈출 즈음 그녀는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고 악마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악마 자체에 대한 흥미, 다른 하나는 전투 능력의 부재다.
이대로 상승하지 못한 채 삼각에 머문다면 그녀는 대학에서 명하는 대로 제국 곳곳을 돌며 전투를 수반한 임무를 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런 전투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겁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새가슴이라고 할까,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도 죽일 수 있는 사내가 옆에서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입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약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당시의 심약함은 상당 부분 옅어지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좋은 경력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교수 지위를 얻고 삼각의 마법사임에도 동급보다 더 높고 대접받고 있으니까.
물론 악마의 연구를 게을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연구에 매진했다.
뭐라고 할까.
호기였다.
루페르트의 치세가 되면서 책에서나 보던 괴물과 악마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그저 신화나 전설로 치부되는 것들이 현실에 강림하여 불가해한 권능으로 현실을 더럽혔다.
이제는 렌타이어마르크의 피를 흘리는 거인의 이야기는 부정한 강령술사가 만들어 낸 괴물 앞에서 도주한 겁쟁이 병사들이 지어낸 면피용 자작극으로 치부 받지만 예나는 그것이 실제로 나타났고 또 다른 악몽의 괴물을 쓰러뜨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예나의 가장 큰 관심은 렌타이어마르크에서 쓰러진 그 붉은 괴물-미네아의 악마에 관한 것이다.
사람을 조종하는 벌레.
여차하면 하나 뭉쳐 왕국 자체를 멸하는 살아 있는 악마.
그 악마는 그러나 또 다른 악마의 피조물이라고 한다.
그 악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섯 가지 이름이 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알려진 이름은 네이, 야둔, 오로메 3개뿐이다.
거기다 악마를 연구하는 자는 악마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악마라는 건 버림받은 신이니까.
신도를 잃은 신이 악마가 된다.
한때 수많은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 된 그 존재는 신도를 잃으면서 이름이 바뀐다.
가장 많은 변형 형태는 언어에 따른 변화다.
정복자가 한 나라를 파멸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강요할 때, 피정복민이 믿던 신의 이름은 정복자의 언어로 더럽혀진다.
뜻이 통한다고 하나 별 의미는 없다.
신의 이름은 하나이며 그것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
예나는 붉은 벌레를 만들어 낸 다섯 이름을 쓰는 악마가 과거에 대단히 많은 신도를 거느린, 강력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신은 여전히 지금까지 살아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피조물이 신화의 시대에서 기어 나와 현재에 나타날 수 없는 법이니.
신의 피조물이라는 건, 오로지 그 신의 권능하에서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인간이 그들의 창조주인 호라가 만든 태양과 달, 대지와 공기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아. 참. 어렵네. 어려워. 그렇지 않아? 그리스벨?”
예나는 한 마리 검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민간에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함의 상징이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검은 고양이가 마법적인 행운-특히 악마의 관심을 준다고 믿는다.
그 검은 고양이는 그러나 악마와는 아무 연관도 없다.
멍청하고, 발바닥에 잉크를 묻혀 그녀의 저술에 허락되지 않은 흔적을 남기는 귀여운 방해꾼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일을 저질렀다.
서가에 넣을 자리가 없어 위태롭게 쌓은 책의 탑을 향해 갑자기 달려들더니 그 탑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그리스벨. 뭐 하는 거야. 응? 자꾸 그러면 방앗간에 팔아 버릴 거야? 아니, 거긴 잡을 쥐가 많아서 오히려 좋아하려나.”
작업에 매진하던 예나는 무너진 책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책의 탑을 쌓았다.
그런데 집어 든 책 하나가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뭐지? 이런 책이 있었나.’
지나칠 정도로 오래된 책이다.
손을 잘못 대면 책장이 바스러질 정도로.
분무기를 가져와 물을 뿌린 후 그 책을 잘 불려 놓았다.
분무기 안 액체에 풀과 비슷한 성분이 있어 오래된 책을 볼 때 종종 쓰곤 한다.
차 한 잔을 타며 시간을 보낸 후 예나는 차를 마시며 책장을 펼쳐 제목을 확인했다.
[ 신을 잡아먹는 자 ]
꽤 흥미로운 제목.
저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러고 보니 전임 악마학 교수가 갖고 있던 책을 인계받으면서 쌓아 둔 거였지.’
책을 읽어 보았다.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추상적이었고 알맹이가 없었다.
구성은 하나의 주장을 말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현실의 사례를 연대기처럼 푸는 것이었으나 주장도 사례도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가령 하나의 소절을 살펴보면.
그 괴물은 질투가 많다……. 그래서 그 괴물은 그 신을 파멸하기로 맹세한다.
……수많은 메뚜기가 일어나 농작물을 모두 먹어 치웠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분노한 신이 다가오자 그 괴물은 속임수로 신을 잡아먹었다.
사실의 열거는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없고 의도도 이유도 없다.
마치 관객이 맥락을 알 수 없는 연극 무대를 보는 기분.
잠시 흥분했던 예나는 자신이 과거에 이 책을 잠깐 펼쳐 본 사실을 기억했다.
‘아, 맞아. 더럽게 재미없는 책이 있었지. 그게 이 책이었네.’
큰 흥미 없이 책장을 넘기던 예나는, 재미없는 책을 보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무심결에 마지막 페이지로 책장을 넘겼다.
다 읽기는 싫고 어떻게 끝나는지라도 확인해 볼 요량이다.
마지막 문구는 앞과 달리 하나의 미래를 예견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괴물은 업보를 치를 것이다.
이게 전부.
그런데 그 무의미한 문구 아래 아마 전임자의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예나는 돋보기를 대고 그 희미한 글씨를 확인했다.
그 괴물 위에 제국어로 쓴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균형의 여신”이었다.
“균형의 여신이라.”
악마만큼이나 신에 정통한 예나는 만신전에 모신 -패배한 신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호라에게 패배-주로 룸 제국의 정복에 의한-하여 만신전에 들어간 신 중에 균형의 여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균형 같은 모호한 개념은 신의 속성이 될 수 없다.
기복을 위해 숭배받던 신들에게 어떤 고대인들이 균형을 달라고 말하겠는가.
‘부족 전체가 곡마단의 광대마냥 외줄 타기로 생계를 이어 나간다면 모를까, 그런 신이 있을 리가 없지.’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녀의 제국, 이 테타우에 균형의 여신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는 제국의 황제다.
“…….”
황제의 얼굴은 경악으로 뒤덮였다.
‘회귀가 되지 않아. 어째서지?’
“여신님.”
루페르트가 제단에 올린 소라고둥을 올려다보며 여신을 불렀다.
“여신님!”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었나.’
없다.
적어도 여신의 심기를 거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여신이 몇 개월간 입을 열지 않는 것도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특별한 용무가 없을 때 리프니에는 심하게는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회귀가 필요한 순간에 여신이 갑자기 침묵할 줄이야.
‘이건 아니야.’
내전은 회귀의 대상이 아니다.
회귀로 막아야 할 첫 번째 목표다.
루페르트는 검은 장막 너머를 노려보았다.
“여신님. 부탁입니다. 뭐라도 말씀을 해 주십시오. 지금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여신님의 권능을 필요로 합니다.”
정중하게 말하고 있지만, 황제의 마음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또 뭐가 불만인 거지? 대체 왜 나를 또 이런 식으로 괴롭히냐고? 이런 식으로 구니까 티그리트가 저딴 식으로 일그러진 거 아닌가.’
여전히 루페르트는 티그리트를 증오하고 경멸하지만, 티그리트의 말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여신에 대한 커져 가는 혐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 여신은 몇 번이고 루페르트를 실망하게 하고 상처를 주었으니까.
울피아나가 그 분야에는 비할 바 없는 선두주자지만 지금처럼 조용한 조력자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이제는 리프니에가 그 선두에 섰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그래도 리프니에가 울피아나마냥 인간성 그 자체를 시궁창에 처박는 짓은 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여신님이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신님이 없으면 안 돼. 지금은 회귀를 해야 한다. 회귀를 해야만 한다고. 이다음의 미래는 보고 싶지 않아. 알 필요도 없고.’
다급함 속에서 황제의 머릿속에 수십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대부분은 지난 결정에 대한 후회다.
‘요하네스가 아닌 베르너의 안을 채택했어야 했나. 그들에게 한 번 더 지껄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어야 했나. 아니면 오토 브라에의 의견처럼 그놈의 외교적 고립을 시켜야 하는 게 맞았나. 대체 거기서 또 어떻게 외교적 고립을 시킬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게 방법일 수도 있었겠지. 그것도 아니면…….’
황제의 눈에 이글거리는 살기가 떠올랐다.
‘비라네츠. 그 하찮은 벌레 놈을 죽였어야 했나…….’
살인자가 필요하다.
섬뜩하게도 살인자를 생각하는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를로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루페르트는 자신의 생각이 성급했다는 걸 느끼고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지. 그녀는 그대로 살게 하는 게 맞아. 그래. 좋은 혼처를 구해 줘야지……. 만슈타인처럼.’
사람은 가족을 이룸으로써 안정을 찾는다.
군주도 귀족도 평민도 마찬가지다.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는 절정에서 마무리로 접어든다.
그 마무리는 대부분 따뜻하고 교훈적인 형태로 끝난다.
마를로네에게도 그런 기회를 줬으면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저항감이 그 결정을 미루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야.’
전쟁을 막아야 한다.
다 절박함과 다급함이 루페르트에게 과감함을 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황제는 검은 장막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엔 소녀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의 아바타가 있을 것이다.
그걸 보면 잠든 여신도 깨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장막을 들췄을 때였다.
“…….”
황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장막 뒤에 있는 건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부서진 소녀의 석상이 사지가 부러진 채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여신님?”
제국은 불탈 것이다.
저주와 같은 문구가 황제의 뇌리에서 소리 없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