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44. 대답 없는 여신 (4)
답은 정해져 있다.
거절이다.
이 사안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루페르트가 카렐리아의 요구서를 보고 느낀 건 충격도 당황도 아닌 노여움이었다.
대주교가 양보를 했다.
정확하게는 루페르트가 권능을 이용하여 양보시킨 것이다.
루페르트에게 황제의 멍에가 없었다면 클라인하르트의 고집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명예와 치적에 대한 집착은 목숨마저도 초월한 것이니까.
그렇게 어렵사리 대주교의 폭주를 멈췄는데, 카렐리아 의회는 또다시 루페르트에게 날카로운 가시를 들이댔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이건 도전조차 아니다.
루페르트의 황제권에 대한 모독과도 같은 짓이다.
도전이라는 건 최소한 도전할 자격이라도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 생각은 루페르트 하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오랜만에 모든 중신의 생각이 합치됐다.
“비나레츠를 벌해야 합니다.”
“그는 제국인이면서 제국을 망치려 들고 있군요.”
“이쪽에서는 대주교가 양보를 했는데도 그들은 반역의 뜻을 조금도 꺾지 않는군요.”
곳곳에서 들리는 동조하는 목소리는 루페르트의 황제권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려 주는 일종의 음악처럼 들렸다.
하지만 또한 루페르트는 강한 어지러움에 직면했다.
머리가 아프다.
지끈거리고 안구 뒤가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왜 저들은 저런 어리석은 짓을 기어코 강요하는 것이지?’
힘을 가진 황제가 되기 전엔 그 힘만을 추종했지만, 이제 힘이 생긴 지금은 예전에 알 수 없던 황제의 고민이 보인다.
그토록 강한 권력을 가졌는데도 여전히 세상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큰 틀에선 황제의 뜻대로 어떻게든 위태롭게 제국은 시대라는 바다를 나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부딪침과 멈춤이 있었던가.
돛이 제대로 펴지지 않은 적은 부지기수에 배를 움직여야 할 선원들의 태업도 손을 셀 수 없을 정도다.
언젠가 이 문제를 두고 여신에게 상담한 적이 있다.
이제는 목소리를 들은 지 오래된 그의 여신은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해 주었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아서죠. 그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 나라가 완벽할 수 있겠어요?”
여신에 대한 반감은 제쳐 둘 정도로 그 말은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완벽한 건 없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에 이토록 많은 허점이 있다는 건 꼭두각시 시절엔 영원히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불만만 해도 제국의 헌법에 관한 문제다.
‘부르봉 왕국은 왕이 귀족을 휘어잡아 궁정 안에 모두 몰아넣고 그 안에서 경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제국보다 힘이 약하다고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통일성에 있겠지. 반면 우리 제국은 언제까지 선제후라는, 사실상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 같은 걸 방치한단 말인가. 티그리트가 제국을 세웠을 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천 년 가까운 치세 동안 바꿀 수 없었나?’
루페르트는 선제후라는 제도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건 렌타이어마르크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겠지만 보다 심화시킨 건 역시 트라이아의 레벤호스트라 할 것이다.
단지 루페르트에게 악감정을 가졌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그 선제후는 그 수많은 화해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제국에 분란을 가져오려 한다.
문제는 그러한 선제후를 은밀하게 지지하는 동료 군주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저 중립적인 디터 팔츠의 막스 게오르크도, 루페르트에게 큰 신세를 진 노르드마르크의 게오르크 아르님도 루페르트가 강제력을 써서 레벤호스트를 제거한다면 기꺼이 신교의 이름 앞에 동맹의 기치를 세울 것이다.
한때 루페르트는 그들이 제국을 움직이는 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진짜 황제가 된 지금은 그저 어리석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 욕심 위에서 움직인다. 대의니, 제국의 헌법이니, 신의 뜻이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지만 결국 그들을 움직이는 건 왕조적인 욕망에 불과해. 나라 안에 황제 말고도 왕이 여섯이나 더 있는 이런 체제는 끝없는 싸움만을 부를 뿐이다.’
선제후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
피상적이지만 확고한 생각이 젊은 황제의 마음속에 서서히 형태를 잡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
카렐리아 의회의 불만을 가라앉혀야 한다.
총신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요하네스가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불이익을 줘서 의회로 하여금 그 질의 자체를 철회하게 해야 합니다. 듣자 하니 비나레츠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의회를 열어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의제를 통과시켰다고 하더군요. 카렐리아에 적절한 압박을 줘서 모든 걸 무로 돌리는 것이지요. 그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지적하면서 그로 인한 불이익을 열거하는 것이 가장 부드럽지 않을까요?”
“다른 방법은 뭔가?”
“과격한 방법이지만 비나레츠의 제국 내 작위를 박탈하고 영지를 모두 몰수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불이익을 주자는 이야기인가?”
“아마 조용해지지 않을까요? 제가 볼 때 그 백작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요하네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무시가 답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행동이 일종의 선을 넘은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한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죠. 또 한 번의 질의를 해 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황제의 분노를 무릅쓰고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베르너는 황제의 압도적인 권위를 이용할 걸 주장했다.
현재까지 루페르트가 이룬 잇따른 정치적 권위와 지위를 이용하는 안이었다.
“제가 볼 땐 트라이아 선제후 쪽을 미리 압박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카렐리아 의회가 저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건 선제후가 그들을 도울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겠죠. 그러니까 머리는 트라이아 선제후라는 겁니다. 그 머리를 아예 외교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면 카렐리아 의회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행동을 철회할 겁니다.”
오토 브라에의 안도 흥미롭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택한 건 그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인 요하네스의 안이었다.
카렐리아 의회에 압박을 가한다.
특히 비라네츠에 붙은 귀족들을 압박한다.
동시에 비라네츠를 몇 가지 죄로 기소하며 제국 내 그의 작위와 영지를 박탈하는 방안도 동시에 추진했다.
카렐리아의 무모한 서찰이 황제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카렐리아 의회의 과격파 의원들은 실질적인 제국의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사신이 도착하여 의회에 상주하며 의원을 감시하는 한편, 별도로 사람을 보내 과격파 의원 한 명 한 명에게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의 위험성과 중대성, 그로 인해 받을 불이익을 고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인 위협 앞에 의원들은 고개를 하나둘 숙였다.
그들의 시선은 그들을 선동했던 제국 출신의 짤막하고 몽땅한 몸을 가진 성마른 백작을 응시했다.
비라네츠 백작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렌타이어마르크에 있는 그의 영지가 몰수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렌타이어마르크는 독립된 선제후 가문의 영토지만 현재 렌타이어마르크는 사실상 황제의 지배를 받는 영지와 다를 바가 없다.
렌타이어마르크 가문은 황제의 뜻을 받아들여 비라네츠 백작을 12가지 죄, 횡령과 사기, 반역과 이단, 기타 갖가지 잡범죄를 엮어 그를 제국 법원에 기소했다.
비라네츠의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고 카렐리아 과격파 의원들은 몸을 사렸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전쟁이 없어도, 큰 다툼이 없어도 이번 전쟁은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상황이 황제의 생각대로 돌아갔고 주변의 흐름 또한 황제의 뜻에 순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페르트도, 요하네스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다.
그건 개인이라는 요소다.
비라네츠 백작은 비록 식견이 부족하고 탐욕스럽고 주제에 맞지 않게 오만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이지만, 무모한 용기와 그를 실행할 행동력을 갖고 있었다.
황제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비라네츠 백작이 의원들 앞에서 사자처럼 포효했다.
“설령 황제가 나를 겁박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신앙을 꺾지 않겠소. 카렐리아의 종교는 우리 카렐리아의 시민들이 정해야 할 것이고 황제 폐하는 거기에 따라야 할 것이오. 왜냐하면 우리의 자유는 선제이신 클라우데 2세께서 직접 약속한 것이니!”
거대한 사건은 혼자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흐름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부름에 응답하는 부름이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루페르트는 운이 없었다.
비라네츠가 목숨을 걸었다.
그러자 황제의 사신의 겁박에 의기소침하던 과격파 의원들이, 그들의 선조인 광야를 활보하던 기마 부족의 피를 각성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는지, 집단으로 비라네츠의 편을 들고 나섰다.
“죽음도 우리의 결정을 갈라놓을 순 없소.”
“우리는 제국인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오.”
“백작을 탄압하는 건 우리를 탄압하는 것이오.”
“황제 폐하의 답변을 촉구하오.”
의회가 다시 뒤집혔다.
온건파의 대표인 야볼라프는 이 흐름을 막을 수 있었다.
카렐리아 귀족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그라면 그보다 어리고 경험 없는 귀족에게 웃어른으로서 충고의 말을 해 줘서 그들의 분노를 달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볼라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총기를 잃고 관성에 이끌려 그저 살아갈 뿐인 늙은 귀족은 지금까지 해 왔던 방법.
방관밖에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야볼라프의 방관 속에 두 번째 항의 서한이 황제에게 도착했다.
황제는 답변을 해야 했다.
그 답변은 하나다.
피로 물들 검이다.
“…….”
두 번째 항의 서한을 받은 그날 루페르트는 황궁 옆, 과거 장미 저택이라 불리는 안젤리나가 사용하던 저택 쪽으로 조용히 향했다.
황제임에도 호위 하나 없이, 그러나 누구에게도 인지되지 않은 채 루페르트는 장미 저택이 있던 자리 위에 세운 작지만 화려한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맨발로 들어선 황제는 텅 빈 제단 위에 목에 건 소라고둥을 올리고 실로 오랜만에 그의 여신을 찾았다.
“여신님.”
루페르트가 리프니에를 불렀다.
저 검은 장막 뒤편에 조각상과 안젤리나의 시체로 만든 검은 머리 소녀가 있을 것이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토록 전쟁을 막으려고 다방면으로 힘을 썼지만, 결국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회귀 말고는 답이 없다.
회귀를 해야만 한다.
내전은 피해야 할 결과이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니까.
그 회귀를 하기 전,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허락을 구하고자 했다.
그냥 나팔을 불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중요한 대목에서는 여신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여신을 오래 만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회귀를 하려 합니다.”
그의 여신은 그러나, 답이 없다.
루페르트는 잠시 검은 장막 쪽을 보다 소라고둥을 불었다.
부우우우우---
바다를 닮은 나팔 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음?”
황제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회귀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