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98화 (198/225)

198화 44. 대답 없는 여신 (3)

리히트보덴.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척박한 섬은 루페르트가 떼까치호를 끌고 개척한 이래 꽤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식민지로 변모했다.

리히트 보덴의 총독 아서 픽튼은 완고하고 현명하며 노련한 지도자였다.

본국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십수 년간 멸망 직전의 정착지를 지켜 낸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철의 의지를 가진 그는 돈이 오가는 교역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영지의 부를 하루가 다르게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때는 일각수의 뿔을 주력 교역 상품으로 삼았지만, 아서 픽튼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각수 뿔의 시세가 점점 내려가고, 저 머나먼 남쪽에서 일각수의 뿔과 동종품으로 취급받는 상아가 전보다 더 많이 시장에 풀리는 걸 알고 상품의 다변화를 시도했다.

최근 리히트보덴의 주력 상품 중 하나는 바다표범의 모피다.

빙판 위에 득실거리는 바다표범 무리를 발견하면 잔혹한 모피 사냥꾼들이 배를 세우고 빙판 위에 올라가 바다표범을 노린다.

다 큰 성체들은 민첩하게 바다로 뛰어들지만, 새끼들은 그렇지 못하다.

사냥꾼들이 노리는 건 부모를 잃은 채 어찌할 바 모르는 새끼들이다.

잔인한 사냥꾼들은 빙판 위에서 팔딱거리는 새끼들을 꼬챙이로 찍어 꼼짝 못 하게 한 뒤,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

그럴 때마다 하얀 빙판은 핏자국으로 가득 차지만 사냥꾼들의 입가엔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이 양질의 모피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번 휩쓸 때마다 수십 마리의 새끼들이 죽어 나가고 비참하게 버려진 시체만 남는다.

죽은 어미가 새끼를 찾아보지만, 그 새끼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채 차갑게 식어 있다.

스크라엘링들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지만, 이제 리히트보덴은 더 이상 스크라엘링의 위협에 당하지 않는다.

아서 픽튼은 뭍으로부터 자재를 사서 성채를 구축하고 대량의 화약과 병기, 장정을 데려와 성채를 지키게 했다.

자원은 충분하고 식량도 넉넉하다.

굶주림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답게 아서 픽튼은 무려 3년 치의 물자를 비축했고, 최후의 경우 그들을 제국으로 데려다줄 배편까지 마련했다.

아서 픽튼이 직접 이름 지은 바다의 이빨호는 어디까지나 리히트보덴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으나, 최근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클라인하르트-아카이아 대주교가 아서 픽튼을 직접 그의 궁전으로 초청한 것이다.

대주교의 관심은 아서 픽튼이 발견한 새로운 스크라엘링에 쏠려 있었다.

다른 괴물과 달리 명백한 인간의 모습을 한 그것은 아서 픽튼의 관찰 아래 신중하게 보호되고, 감시받고, 교육받았다.

아서 픽튼은 그 인간 모습을 한 검은 머리 스크라엘링에게 사람의 언어를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생김새가 장식은 아니었는지 그 괴물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인간의 언어 몇 마디를 흉내 내고 사용했다.

밥 줘, 배고파, 용변, 물, 싫다, 총독, 칼 정도가 그 괴물이 익힌 인간의 언어였다.

자식이 없지만, 야망은 큰 사람이 늘 그러하듯 아서 픽튼도 요상한 고집을 갖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후세에 남길 수 있는 업적을 만드는 것이다.

그가 죽어도 그 아서 픽튼이라는 이름이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제국으로 간다.”

인간으로 치면 십 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 됐을까.

어린 스크라엘링은 제국인은 먹기를 거부하는 반쯤 얼린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자신보다 2배는 큼직한 거구의 총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국?”

그 스크라엘링이 말했다.

“그렇다. 마르타.”

대담하게도 아서 픽튼은 그 스크라엘링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사람 좋은 리히트보덴 주교마저도 기겁할 정도로 대담한 행위였다.

호라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은 모두 괴물로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열등한 피조물인데, 그러한 열등한 피조물에게 사람과 그 사람을 돕는 가축에게나 붙일 법한 이름을 붙인다는 게 그의 상식으로는 선을 넘은 행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서 픽튼은 완강하게 자신의 고집을 지켜 나갔다.

‘이 스크라엘링을 인간처럼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호라의 빛이 인간을 넘어 선택받지 못한 열등한 종족에게도 두루 미친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그 불멸의 업적은 후세에 남을 것이다.

아서 픽튼이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확고한 형태로는 감히 그리지 못하는 그만의 꿈이다.

어째서인지 이 스크라엘링에 대해서 대주교가 관심을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서 픽튼은 대주교가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했기에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는 스크라엘링이 발음한 리프니에라는 단어에 더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서 픽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주교가 그 사실을 몇 차례나 걸쳐 물은 건 사실이지만 대주교가 자신을 부르는 건 역시, 인간이 아닌 종족을 교화시키려는 자신의 의도를 알아봤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국으로 향하는 배에 총독과 검은 머리 소녀가 올랐다.

인간의 옷이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전처럼 찢어발기지 않는 마르타를 보며 아서 픽튼은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는 제국인은 먹기를 거부하는 얼어붙은 오징어 다리를 내밀었다.

“리프니에. 리프니에.”

소녀가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불길해 보이는 단어를 중얼거렸지만, 아서 픽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는 기다릴 뿐이다.

곧 그 앞에 펼쳐질 그립고 그리운 인간의 영역을.

* * *

대주교가 성 스코다의 교회를 성당으로 전용하려는 계획을 철회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긴 봄이 끝나고 무더운 여름으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카렐리아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문제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싱겁게 끝났다.

저 완고한 대주교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카렐리아인 하나가 만슈타인을 찾아왔다.

“대주교가 성 스코다의 교회를 성당으로 바꾸는 걸 포기한다고 하더군.”

얀 프라코브가 웃으면서 말했다.

귀족이지만 부농에 가까운 그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러하듯 전쟁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카렐리아가 전장이 되면 군대가 들이닥칠 것이고, 그러한 군대는 어김없이 논과 밭을 황폐화하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이 땅이 반란을 일으키면 농사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제국군이든 반란군이든 농작물을 함부로 가져갈 것이고 말발굽이 갓 자라난 이삭을 짓밟을 것이다.

그 정도면 다행이다.

포악한 군인들은 심심풀이로 밭을 갈아엎기 일쑤고 재미로 가축을 죽인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병정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뻗는 것이다.

카렐리아는 제국의 영토, 그것도 황제의 땅이기에 아무리 날 선 병정이라고 할지라도 거기까진 하지 않겠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은 불똥과도 같아서 어디에 튈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런 얀에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낭보였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

똑똑하고 식견 높은 만슈타인이지만 이번만큼은 여유롭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얀 프라코브는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거야.”

만슈타인은 여전히 확신을 품는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졌는데도?”

“구실은 중요하지 않지.”

“구실이 중요하지 않다니.”

“전쟁을 바라는 인간들에게 구실이라는 건 술을 끊으려는 사람이 술을 다시 마시려고 지어내는 핑계와 같은 거지.”

“그래?”

만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라네츠는 어떤 형태로든지 전쟁을 일으킬 거야. 그 뜨내기 제국인이 카렐리아에서 성공하려면 결국은 기득권을 밀어내야 하거든.”

“야볼라프 백작 같은?”

“그도 포함이 되겠지. 사실 비라네츠에겐 특별한 적은 없어. 그는 단지 변화를 원할 뿐이지. 제국에서 백작이라고 하지만 제국엔 땅뙈기 하나 없이 이름만 백작이고, 실제로는 카렐리아 하급 기사에 불과한 의회에서 1표밖에 행사할 수밖에 없고 좌석도 저 구석에 있는 자신의 하찮은 신세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인간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겠지.”

“겨우 한 사람의 의지로 제국이 불탈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나?”

“비라네츠 뒤엔 소위 슈코브 시민들이라는 작자들이 있지. 특히 상인 나부랭이들.”

만슈타인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상인들이 전쟁을 바란다는 건가?”

“자네보단 피해가 덜하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죽어. 카렐리아가 점점 교역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건 자네도 아는 사실 아닌가? 모두가 말하지. 카렐리아의 오늘은 어제만 못하다고.”

“그건 그렇지.”

“그들도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상황의 변화를 원하지. 아마도 그들이 비라네츠에게 주문하는 것도 변화일 거야. 아마 그들은 그들이 저울로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적절한 속임수로 적절하게 이윤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전쟁은 저울이 아니야. 불길과 같은 거지. 옮겨붙으면 어떻게 불타고 어디로 옮겨붙을지는 불을 붙인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러한 불장난을 비라네츠를 통해 하려 들지.”

“그럼, 전쟁이 일어난다고 봐야 하나?”

“기다려 보라고.”

만슈타인은 평화롭게 말했다.

얀 프라코브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슈타인의 이번 말 만큼은 그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해받고자 노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단지 움직일 뿐이다.

자신의 야망과 별들의 속삭임에 의해서.

별점이 그에게 말해 주었다.

올해 안에 카렐리아에 거대한 재앙이 덮칠 거라고.

어쩌면 이 세계를 끝장낼 수도 있는 불길이 피어오를 것이라고.

별점만이 아니라 그의 날카로운 지성도 카렐리아가 어디로 향하는지 똑바로 주시하고 있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먼 미래가 아닌, 곧.

만슈타인과 얀 프라코브의 대화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렐리아 의회에서 결국 사달이 일어났다.

아무 예고도 없이, 자신의 지지세력만 모이는 임시 의회를 기습적으로 개최한 비라네츠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언했다.

“이제는 더는 기다릴 수 없소. 황제 폐하에게 직접 물어볼 때가 온 것이오. 선제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 지키지 않을 것인지. 언제까지나 확답 없는 대답을 기다릴 수는 없는 법. 의회의 이름으로 우리는 황제 폐하에게 직접 물어야 할 거요. 우리에게 믿음의 자유를 줄 것인지, 주지 않을 것인지.”

야볼라프를 위시한 귀족들이 뒤늦게 검을 빼 들고 의회에 난입했으나 이미 의제는 가결됐고, 의회의 인장을 찍은 서신을 지닌 사절이 테타우를 향해 출발한 뒤였다.

“어쩌려고 이러는 건가?”

야볼라프가 성성한 흰 눈썹을 곤두세우며 몰아세웠다.

비라네츠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전부 다 카렐리아를 위한 것이오.”

“당신을 위한 것이겠지.”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알 거요. 우리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건가?”

야볼라프가 물었다.

그 물음엔 뻔뻔한 비라네츠도 대답하지 못했다.

평행선을 달리는 갈등 속에서 카렐리아의 서신을 가진 사절이 테타우에 도착했다.

0